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어제와 오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어제와 오늘

현대중공업 노조 활동가 조돈희 씨에게서 듣는다

한 현대차 노조 활동가가 박일수 열사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울산대 병원에서 현대중공업 노조 활동가인 조돈희 씨를 만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들었다.

조돈희 씨는 1981년에 현대중공업에 입사해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89년 128일 파업, 1990년 골리앗 농성에 참가했던 현대중공업 투쟁의 산 증인이다. 그는 투쟁들 속에서 해고와 구속을 여러 차례 겪었고, 1995년 세번째 해고된 이래 지금까지 복직하지 못했다. 지금은 현장 활동과 해고자 복직 투쟁을 병행하고 있고, ‘노동자의힘’ 회원이기도 하다.

지금 현대중공업 직영 노동조합은 대책위에도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하청노동자 박일수 열사의 죽음에 대해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집행부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조돈희: 탁학수 집행부는 대책위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민주노총이 자기 조직 위상을 강화하려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독자적인 대책위를 꾸려서 해결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열사의 뜻을 계승하기는커녕 이 죽음을 왜곡하고 단순한 비관 자살로 몰아가려 했습니다. 회사와 노조 집행부가 똑같은 내용으로 지역의 여론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박일수 동지만이 아니라 최근에 직영노동자 한 명도 산재 문제로 자살했는데 …

조돈희: 현재 탁학수 집행부와 그 전대 최윤석 집행부는 비정규직의 산재 사고에 대해서는 개입을 안 한다는 방침을 세워 놓은 집행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산재 문제로 자살한 유상석 씨는 현대중공업 조합원이었죠. 그러자 노조 집행부는 겉으로는 “회사가 책임져라,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라”고 항의를 했지만, 실제로는 유족 배상에만 집중했고 합의가 되면 상황이 종료되는 거죠.

유상석 씨는 허리를 다쳤는데 다리쪽으로 통증이 번져 수술과 재수술까지 했어요. 그가 쓴 투병일기를 보면, 요양이 끝나고 복직을 하더라도 이 아픈 몸으로 그 힘든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고통에 시달렸던 걸 알 수 있습니다. 산재 요양이 끝나고 현장에 복귀해도 회사는 아픈 조건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치를 고려해 주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집행부는 이런 문제를 한 번도 제기한 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집행부의 태도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현대중공업에는 언제부터 노골적인 노사 협조적 노동조합이 들어섰습니까?

조돈희: 2002년도 9월이죠. 민주파 집행부의 사무국장이 비리를 저지른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조합원들한테 얼굴을 들 면목이 없죠. 1990년대 초반부터 회사가 노동조합과 현장을 무력화시키려 기도했는데 그 속에서도 죽 민주파가 집행부를 잡아 왔거든요. 그런데 이들마저 도덕성의 문제를 드러내자 이 틈을 타 회사 목소리를 대변하는 집행부가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이런 집행부가 들어서니까 현장 통제는 더 심해지고 출근 시간도 계속 빨라졌습니다. 출근시간이 아침 8시인데 7시 40분부터 반장들이 나와서 체조하고 아침 조회를 해요. 8시 5분 전이 되면 벌써 용접 불꽃이 튀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투쟁 회피적이게 된 데는 역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5년 무쟁의 선언의 배경은 무엇이며, 그 뒤 9년 무쟁의가 이어지고 있는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조돈희: 1990년대 초반부터 신경영전략이라고 불렸던 노무관리가 대우조선에 이어 현대중공업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사측이 급속하게 현장 장악력을 갖게 되죠. 현대중공업 노조 활동가들은 사측의 공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어요. 1995년에 노동조합 대의원 기구의 절반 이상을 친회사 성향이 장악하면서, 노동조합 집행부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1995년에 집행부도 생각을 바꿨는지 회사와 무쟁의 선언을 했고, 스스로 생산에 협력했습니다. 사실, 당시 노동조합 집행부의 행보가 그 뒤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었죠..

노동자들 사이에서 회사측의 전략이 먹혀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1994년 63일 간의 LNG 점거 파업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는데, 그것이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까?

조돈희: 그 때 저는 1년 동안 징역을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어쨌든 그 투쟁이 성과 없이 끝나면서 우리가 손실을 많이 입었습니다. 엄청난 파업을 했는데도 회사는 노동조합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어떻게 투쟁을 접게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연말에 성과급 2백 퍼센트를 지급하겠다는 회사측 약속을 받고 파업을 접었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이것을 어겼어요. 그러자 당시 이갑용 위원장이 약속을 지키라며 단식 투쟁을 했고 그러다가 연행돼 구속됐습니다. 결국 회사는 성과급을 60퍼센트 지급했죠.

당시에 조합원들은 투쟁을 제대로 해 요구를 얻어 내지 못한 노동조합 간부들에 대해 불신이 컸습니다. 회사의 약속 불이행이 집행부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파업하면 돈 못 받는다는 인식을 부추겼어요. 대중 투쟁보다 위원장 개인 단식으로 투쟁을 이끌었던 게 성과를 온전히 얻지 못한 문제를 낳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990년대 말 이후 한국의 조선업은 세계 1위 자리를 굳혔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현대중공업 현장노동자들의 임금, 노동조건 그리고 삶은 어떻게 변하고 있습니까?

조돈희: 작업 환경과 복지 등 작업장 조건이 많이 개선된 건 사실입니다. 1980년대와는 달리 작업 시스템도 많이 자동화됐죠. 하지만 이것이 육체 노동의 피로함을 해소해 준 것도, 노동자들의 불만을 근본적으로 해소해 준 것도 아닙니다.

임금은 한국 대기업의 평균 수준을 유지해 왔다고 말할 수 있죠. 어떤 사람들은 1980년대에는 20만 원 받았는데 지금은 200만 원 받지 않느냐, 임금이 10배 오르지 않았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 비교할 수는 없어요. 여전히 사회적으로 필요한 임금을 받는 수준은 아닙니다.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한층의 노동통제죠. 한 노동자가 더 많은 물량의 일을 담당하게 돼 노동강도가 강화됐구요. 상황이 더 어려워졌어요. 회사측은 일부 줄 것은 주면서 현장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애써 왔어요. 노동조합이 아예 필요 없는 상황을 만들고 싶은 것이죠. 노동조합을 통한 단결을 와해시키고 교섭력을 저하시키려 합니다.

현대중공업은 1990년대 중반부터 ‘생산 합리화’를 강력하게 추진해 왔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추진됐고 현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조돈희: 두레운동이나 반생산체제는 자본의 조직화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의식과 회사 사랑, 민족주의 등을 내세워 노동자들을 회사 조직체계 내로 편입하는 것이죠. 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것입니다. 회사는 반장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그들을 회사쪽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원래는 반장이 아니라 대의원과 소위원들이 노동조합 체계 안에서 반을 운영하려 노력했는데 회사 조직 체계가 치고 들어온 것이죠. 이것이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 게 사실입니다.

민주 집행부 시절에는 이에 맞서기 위해 여러 노력들을 기울였습니다. 반 회의를 할 때 활동가들이 이 자리에 들어가 노조 활동을 보고하고 함께 논의하도록 하는 등 말입니다. 수천만 원의 돈을 들여 자본의 의도를 파헤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는 연구를 단체들에 의뢰했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장기적인 전략을 가지고 이에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현재 상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하청 노동자 죽음에 대한 현대중공업 직영 노동조합 집행부의 태도에 대해 현장조합원들의 반응이나 대응은 어떻습니까? 또, 전노회를 비롯한 활동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까?

조돈희: 일하고 온 노동자들에게 물어보면, 사람들이 하청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서 통 얘기를 안 한다는 것예요.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이죠. 제 생각에는, 현대중공업 조합원들의 절반 이상은 사측과 노동조합이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현장과 지역의 활동가들과 함께하지 못해 미안해 할 거구요.

사람이 죽어도 꿈쩍하지도 않는 암울한 현장을 바꾸는 것이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는 과제와 목표를 가지고 전노회와 분과 동지연합 등이 사내 하청 노동자들과 함께 현장대책위를 꾸렸습니다. 현장대책위는 회사 논리에 맞서 열사 정신이 왜곡되지 않도록 선전·선동을 하고, 조합원들이 중식 집회와 지역 활동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리 김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