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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 탄생 때부터 폭력에 바탕을 둔 국가

1987년에 베니 모리스라는 이스라엘인 역사가가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의 등장》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당시 그 책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 스라엘 군대의 공식 자료를 연구한 그 책은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창건이 무장 테러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주장을 확인해 주었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땅에 거주하던 아랍인 1백만 명의 약 4분의 3이 강제 “이주”, 다시 말해 추방당했다.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의 국가만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그들인 시온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계속 부인해 왔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나찌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량학살)라는 어두운 그림자에서 끌어낸 이스라엘 국가의 도덕적 신뢰성이 상당히 퇴색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리스의 연구는 1948년이 정말로 “나크바(대재앙)”였다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정치적·도덕적 주장을 뒷받침해 주었다.

모리스의 옛 동료들은 그가 “이스라엘을 증오하는 자”라며 공격했다. 이스라엘 학계는 그를 왕따시켰다.

좌파는 그를 껴안았다. 유대인인데도 모리스는 국외 이주가 금지돼 있었다. 요르단강 서안 지방과 가자지구에서 군 복무를 거부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리스 자신은 좌파에 대해 의구심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좌파의 주장을 강화해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자신이 시온주의자였다. 그는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는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며 지난 17년을 보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주요 자유주의 신문인 〈하아레츠〉(땅)조차도 2004년 1월 9일 모리스와의 특집 인터뷰 후에 모리스의 결론이 “정말 끔찍하다”고 말했다.

그의 옛 동료였던 이스라엘의 좌파 인사 두 명, 곧 아비 슐라임(Avi Shlaim) 교수와 바루크 키멀링(Baruch Kimmerling) 교수는 모리스의 결론이 “파시스트적”이라며 비난했다.

모 리스는 새 책 《다시 고찰하는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의 등장》(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에서 자신의 연구를 심화시켜 보여 준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하아레츠〉와 인터뷰에서 밝힌 “내가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던 이스라엘의 학살 행위”를 폭로하고 있다. “강간 사건도 매우 많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시온주의 무장 세력이 1948년에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학살한 가장 유명한 사건, 곧 데이르 야신 사건과 그 밖의 다른 많은 사례들을 차례로 확인해 간다. 그는 그런 일들이 “전쟁 범죄”였다고 서슴없이 쓰고 있다.

그는 “많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빼곡히 벽에 세워 놓고 총살하거나 무더기로 우물에 빠뜨려 살해한” 작전을 소개한다.

군 인들의 이런 월권 행위와 우발적 행동은 전혀 통제를 받지 않았다. 모리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것이 하나의 유형이었다. 그 작전에 참가한 장교들은 대부분 그들이 받은 추방 명령을 분명히 이렇게 해도 좋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래야만 주민들을 거리로 내몰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살인 행위로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벤 구리온[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은 그 문제를 덮어 두었다. 학살을 자행한 장교들을 위해 사실을 은폐한 것이다. …

“벤 구리온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주시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명시적 명령은 없었지만 이주 계획임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스라엘] 지도부 전체가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벤 구리온은 이주론자였다.”

인터뷰의 이 지점에서 〈하아레츠〉 기자가 말을 끊는다. “당신이 벤 구리온을 비난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모 리스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벤 구리온은 옳았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국가는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얼버무릴 수 없다. 팔레스타인인들을 근절하지 않고서는 유대인 국가가 이 곳에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리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혹시 내가 눈물이라도 흘리기를 기대했다면 실망시켜 미안하다.”

모리스는 “인종 청소”라는 용어를 서슴없이 사용해 과거사를 정당화한다. “배후지를 청소하고 경계 지역도 청소하고 주요 도로들도 청소해야 했다. … 우리 호위대와 우리 정착민들에게 계속 총을 쏴대는 마을들을 청소해야 했다.”

갑자기 모리스는 벤 구리온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아레츠〉 기자가 예상한 방식이 아니었다. 깜짝 놀란 기자는 모리스에게 방금 한 말을 다시 해 달라고 요청한다.

모리스 : “나는 벤 구리온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1948년에 역사적으로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구 통계 상의 문제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용기가 없었다.”

기자 : “내가 지금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벤 구리온이 아랍인을 너무 적게 쫓아낸 게 잘못이었다는 말인가?”

모 리스 : “그가 이미 축출에 관여했다면 일 처리를 완벽하게 했어야 했다. 나는 이런 발언이 아랍인들과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리라는 점을 잘 안다. … 그러나 그 문제가 단호하게 해결됐다면 이 곳이 더 조용할 것이고 고통도 적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만약 벤 구리온이 요르단강에 이르는 이스라엘 국토 전역에서 대규모 추방 계획을 단행해 전국을 말끔히 청소했다면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게 바로 치명적 실수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기자 :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듣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믿기지 않는다.”

모 리스 : “사태가 유대인들의 비극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벤 구리온이 1948년에 이주 정책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요르단강 서안지방과 가자지구는 물론 이스라엘 땅 내부에도 휘발성이 높은 대규모 거류지를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모리스는 한술 더 뜬다. 앞으로 “철저한 이주”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예측한다. 그가 아랍 세계와 이슬람교를 경멸하고 인종차별적 증오를 드러내는 데는 한이 없다.

“ 이슬람교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슬람 세계의 가치는 [서방이나 이스라엘과] 완전히 다르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인간의 삶이 서방과 동일한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들은 야만인이다.” 앞으로 이주가 불가능하다면 “그들을 가두기 위해 우리 같은 것을 지어야 한다. 이런 말이 끔찍하게 들리리라는 것을 안다. 정말 잔인한 말이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가둬야만 하는 야생 동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시온주의의 본질과 그 광신주의, 비합리성을 드러내고 미래의 사태를 경고한 베니 모리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모 리스는 말한다. “시온주의의 전반적 계획은 묵시록적이다. 그 계획은 적대적 주변 환경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 존재 자체가 불합리하다. 그 계획이 1881년에 실현됐다고 해도 불합리했을 것이다. 그 계획이 1948년에 실현됐어도 마찬가지로 불합리했을 것이다. 그 계획이 미래에 성공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 그럼에도 우리는 이렇게 멀리까지 왔다. 어찌 보면 이것은 기적이다. 나는 1948년의 사건과 1948년의 계획 속에서 살며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아마겟돈이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20년 내에 이 곳에서 핵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기 자 : “시온주의가 유대인들에게 그토록 위험하고, 또 시온주의가 아랍인들을 그토록 비참하게 만든다면 시온주의는 오류가 아닐까? 어쨌든 우리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잔인하고 비극적인 시온주의, 다른 하나는 시온주의의 폐기일 것이다.”

모리스 : “맞다, 바로 그렇다. 당신은 정곡을 찔렀다. 그것이 바로 정답이다.

시온주의의 본질과 지향

헨리 메이틀스


1948 년 이스라엘 국가 창건 이후 이스라엘 정부, 군대, 일부 국민이 저지른 잔혹 행위는 충실하게 기록돼 왔다. 팔레스타인의 민중봉기(인티파다)를 탄압하는 최근의 정책과 점령지에서의 공포통치 역시 이스라엘의 정책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잔인한지를 잘 보여 준다.

이 스라엘이 전 세계의 모든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면서도, 여러 세대 동안 그 땅에서 살다가 1948년에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은 불허하는 인종차별적 “귀환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세운 시온주의자들은 “땅 없는 민족에게 임자 없는 땅을”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그 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1947∼48년에 인종 청소를 당했다. 유대인이 다수를 이루는 새로운 국가의 창건 때문이었다.

미 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이유는 아랍 세계에서 서방의 석유와 군사적 이해관계를 지원할 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국에게는 이런 이해관계에 도전할지도 모르는 아랍의 지배자들과 민중들을 응징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의 한 유력 신문은 이를 두고 아랍 세계의 “경비견” 구실이라고 불렀다.

게 다가 나찌가 유럽의 유대인을 말살하려 했던 홀로코스트를 동서 양진영이 모두 막지 못했던 것도 문제였다. 이를 이용해 시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고국을 도덕적·윤리적으로 정당화하는 선전 도구를 확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정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러나 시온주의는 고비 때마다 배타적인 유대인 국가라는 목표를 위해 반동적 세력과 협력하거나 동맹해 왔다. 시온주의는 유대인 혐오에 대한 특정한 반응이었고 현재도 그렇다. 시온주의는 유대인 혐오가 비유대인들의 고질병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런 태도를 누그러뜨리려 애쓰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며, 대안은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세워 완전 무장하고 적대적인 세계와 단절하는 것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시온주의는 단순히 이론에만 그치지 않았다. 1895년에 시작될 때부터 시온주의는 실천적 함의를 갖고 있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정권들과 협상하고 타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9 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제정 러시아가 그 사악한 정권이었다. 짜르 정권은 빈번히 유대인을 학살하고 유대인 탄압법을 제정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많은 유대인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운동은 시온주의에 전면 반대했다.

시온주의는 절망과 고립의 정치다. 완전 무장한 채 팔레스타인인들을 인종 차별하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