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변혁의 주체 논쟁:
노동계급의 잠재력은 어떻게 현실화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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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우파 정부의 고통전가에 맞선 노동자들의 저항은 계속됐지만, 많은 저항들이 성공과 승리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지금도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저항과 절규는 계속되지만 투쟁 장기화와 고립, 분열 등도 나타나고 있다.
사회 전체로 봤을 때 노동자들이 가장 가난한 것은 아니다. 또 가장 고통받는 계급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특별하다. 그들이 생산하는 부가 사회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을 규정하는 것은 그들이 생산과 맺는 관계다. 노동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팔아야만 하는 처지다. 생산직, 사무직,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를 막론하고 이것은 진실이다.
자본주의에서 사장들은 최대 이윤을 뽑아내고, 경쟁자들보다 싸게 팔기 위해 분투한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사업 감각” 덕에 부자가 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해 이윤을 얻는다. 사장들은 생산물의 가치보다 더 적은 돈을 노동자들에게 준다.
이것이 노동자들에게 힘을 부여한다. 노동자들이 없으면 이윤이 말라붙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작업장, 산업부문, 혹은 국가 전체도 멈출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지속적으로 이런 종류의 계급투쟁을 부추긴다.
착취
경쟁의 압력 때문에 사장들은 착취 수준을 올리고 노동자들을 더 많이 쥐어짜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더 성공적으로 착취 수준을 올리고 노동자들을 쥐어짠 경쟁자들에 밀려 업계에서 내몰릴 수 있다.
동시에 노동자들이 그들의 조건을 방어·개선하기 위해 투쟁하게 함으로써 반복적 대립을 낳는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공장과 사무실에 한데 모은다. 그곳에서 그들은 똑같은 조건에 처하고 똑같은 고충에 시달린다.
사장들에게 무엇이든 따내려면, 노동자들은 뭉쳐서 싸워야만 한다.
이런 집단적 투쟁으로 노동자들은 그들을 분열시킬 수도 있는 사상을 물리칠 수 있다. 노동자들은 투쟁 속에서 자신들이 집단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사상으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려 한다. 지배자들은 그런 차별적 사상들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고, 일부 노동자들은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예컨대, 몇몇 건설 노동자들은 일자리 손실이 사장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들 탓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연대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
2009년에 건설노조 경기중서부지부는 건설사가 이주노동자 조합원들만 골라서 해고하는 것에 맞서 싸웠다. 한국인과 이주노동자가 함께 싸운 결과 해고된 이주노동자가 모두 복직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이 이간질을 넘어서 단결했던 것이다.
이 말이 곧 노동자들만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1960년대 미국의 흑인 공민권 운동이나 20세기 초 영국에서 있었던 여성 참정권 운동을 보라.
이런 것들은 진정한 변화를 이뤄냈고, 오늘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길이길이 감동을 준다. 그리고 사회운동과 노동계급 사이에 무슨 만리장성이 있는 게 아니다. 노동자들도 이런 운동의 일부다.
보통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 세상을 굴릴 전문가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나 노동자들한테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전문성, 지식, 경험이 있다.
자동차공장을 생각해 보라. 현대차 노동자들이 일손을 멈추면 회장 정몽구는 자동차 문짝 하나도 칠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희 역시 핸드폰 액정 하나 조립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 경영자들이 사라져도 공장은 계속 굴러갈 것이다.
공장뿐 아니라 철도, 공공기관, 학교, 은행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이 더 나은 세상을 쟁취할 수 있다면, 왜 그들은 많은 경우 세상을 바꾸는 데 관심이 없어 보이는가?
분명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작은 것 하나도 바꾸기에는 자신이 너무 무력하다고 느낀다.
혁명가 칼 마르크스는 노동을 해서 주변 환경을 자의식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동물과 다르게 만드는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할 능력이 없다고 느낀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소수 지배자들이 우리의 능력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배자들은 우리가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함으로써 이런 무력감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투쟁이 일어나면 순식간에 날아갈 수 있다.
이집트에서는 2011년에 혁명이 일어나서, 사람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아 온 독재자 무바라크가 날아갔다. 이전 30년 동안 사람들은 무바라크의 잔혹함에 고통받아 왔고,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그의 정권에 맞설 수 없을 듯 보였다.
그러나 반란이 시작되고 대중적 거리 시위가 일어나자,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여기에 동참할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파업이 무바라크를 최종적으로 쫓아내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집단적으로 행동에 나설 때 계급으로서 자신들이 가진 힘을 자각할 수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데 사장이나 관리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에서는, 몇몇 파업이 긴축에 반대할 뿐 아니라 사장의 통제력에 도전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파업 언론인들은 방송국을 접수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리는 뉴스를 내보냈다.
파업에 참가한 기자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저들이 건물의 전기를 끊어 버렸어요. 하지만 전력 노동자들이 오더니 다시 전기를 연결해 줬어요.”
그러나 노동자들이 거대하게 투쟁에 나선다고 해서 승리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노동자 일부는 사회의 지배적 사상을 받아들인다. 다른 일부는 자본주의를 끝장내고자 하는 혁명가가 된다. 대부분은 둘 다 아니다. 혁명적 시기에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혁명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둘러싸고 거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멘셰비키라고 불린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이 의회 민주주의에서 멈추기를 바랐다. 그들과 달리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7년 여름을 거치면서, 노동자들의 생각이 급진화했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하게 됐다.
10월혁명에서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이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볼셰비키와 같은 혁명적 정당이 혁명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투쟁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 있다.
또 중요한 점은, 투쟁의 승리가 노동자들이 지배자들을 넘어서도록 하는 씨앗이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혁명은 지배계급을 다른 방식으로는 타도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하기도 하지만, 혁명을 성사시키는 과정 속에서만 지배계급을 타도하는 바로 그 계급[노동계급]이 이전 시대의 오물을 제거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걸맞도록 거듭날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