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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성폭력 개념의 확장과 성폭력 사건의 운동적 해결에 관하여

지난번에 내가 기고한 독자편지에 대한 몇 가지 의견들을 잘 들었다. 서로 간에 토론을 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하여 무척 반갑게 생각하며 재답변의 글을 보낸다. 어떤 분은 내가 “성폭력 개념 확장을 지지”한다고 표현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더 정확하게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더불어 소위 ‘성폭력 사건의 운동적 해결’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주장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1. 성폭력 개념의 확장

먼저 나는 여성주의와 반성폭력 운동에 있어 성폭력 개념의 확장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왜곡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성폭력 개념의 확장이 진행되면서 봉착한 문제점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 한 사람이다.

성폭력 개념의 확장은 여성운동의 확장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성폭력 개념의 확장을 마치 동심원이 점점 더 넓어지는 과정과 같이 생각해 본다면 그 중심에는 강간이라는 범죄가 있다는 것에 거의 이견이 없을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도 강간은 사회적으로 매우 흉악한 범죄로 취급되는 중대한 성폭력이었다. 물론 근대와는 달라서 여성의 인권이라거나 성적 자기결정권 같은 개념은 전혀 없었고 아버지나 남편의 여성에 대한 소유권에 대한 침해로 여겨졌으며 젊은 여성을 강간해 놓고 그녀와 혼인을 하면 그것이 그 여성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졌으니 지금과의 격차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강간에서 출발하여 성과 연관된 범죄로까지 성폭력에 대한 개념 확장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하나의 계기는 양차 세계대전 그리고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과 전쟁 등과 같은 극단적인 비극적 상황에서 여성에게 가해진 성적 폭력에 대한 인식과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군인의 여성에 대한 강간 뿐 아니라, 특정 인종이나 종족에 대한 혐오, 그리고 그 인종을 ‘청소’해 버린다는 구실로 더 이상 임신을 하지 못하도록 여성의 성기를 훼손하는 행위 그리고 성매매 강요, 인신매매 또 우리나라도 역사적으로 경험한 군 위안부 형태의 강제적 성노예 등 전쟁 상황에서 벌어진 여성에 대한 잔악한 성적 폭력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반대운동은 강간이 아니라 할지라도 국제적으로 그것을 인류에 대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로서의 성폭력으로 규정하도록 이끌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근대로 이행되면서 여성이 대규모로 노동시장에 편입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전형적인 성폭력은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남성 상급자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여성 부하 직원에게 신체접촉이나 성관계를 요구하는 행위이었고 이러한 유형의 성희롱과 성폭력은 지금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여성주의자들은 이러한 성폭력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에 맞서 투쟁을 벌여왔고, 직장, 학교, 군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을 매개로 여성에게 행해지는 다양한 유형의 인권침해를 성폭력이라는 강력한 언어로 규정하여 그것을 비판하고 그러한 행위가 여성에게 벌어지지 않도록 싸워왔다.

여성주의자에게는 지금 현재 무엇이 성폭력이고 무엇이 아닌지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지금 당장은 대중에 의해 성폭력이라고 인식되지 않고 있지만, 지속적이고 강력한 운동을 통해 성을 매개로 한 가해행위들을 성폭력으로 인식하게끔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해 온 것이고 이것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왔다.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내용이 바로 과거의 성폭력 개념과 지금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남자 아이의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이놈 고추가 얼마나 여물었는지 보자.”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는 아무런 문제될 것 없는 행동이었다. 필자도 중학교 때 직접 경험한바, 나이든 남자 음악 교사가 수업시간 마다 걸핏하면 학생들의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이놈 고추는 잘 여물었군.” “니 고추는 좀 더 여물어야겠다.”는 따위의 말을 하곤 했지만, 당시에는 그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학교에서 교사가 그런 일을 했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다. 또 성희롱을 저지른 나이든 남성들이 늘어놓는 변명 중 단골메뉴는 바로 “손녀같이 귀여워서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것이 면피를 위한 해괴한 변명이라기보다는 그런 행동이 문제될 것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들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권위가 있는 남성이 여성 하급자를 귀여워서 ‘좀 쓰다듬는 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행위를 이해해주고 옹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이며, 여성운동의 성과로서, 불과 한 두 세대 만에, 정상적인 행위로 인식되던 것을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범죄적 행위로 인식되게 사회를 변화시킬 만큼 인권의식을 크게 고양시켜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여성운동은 “그것이 어떻게 성폭력이냐?”라던가 나아가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뭐가 문제이냐?”라는 반박을 수십 년 동안 들으면서 성폭력에 대해 맞서 싸워왔다. 여성주의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 즉 극단적이고 트집을 잡으며 별것도 아닌 것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어댄다는 인식은 아마도 이런 측면에서 비롯된 부분이 클 것이다. 즉, 지금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하여 그것이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이 근절되는 사회로 변화시키려는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폭력 개념의 확장은 여성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고 이것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2. 문제점

그런데 성폭력 개념의 확장에 대해 나는 그것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한 가지 우려 또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매우 명확하고 단순한 의문인데 즉 “도대체 이것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맑시즘 포럼의 한 세션에 참가하여 “계속 이런 식으로 성폭력 개념이 확장되면 언젠가 사단이 날 것 같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맥락이다.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사단이 난 경우를 살펴보자. 먼저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속칭 서울대 담배녀 사건이다. 나는 이 문제를 제기한 여성이 세간의 비웃음 사고, ‘담배녀’로 불리게 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보기에 그 여성은 성폭력 개념의 외연 확장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게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그녀는 성폭력 개념의 확장이 지금까지 여성운동의 발전에 기여해 온 역사를 생각해 볼 때, 그렇다면 그 확장의 영역을 최대한으로 있는 힘껏 넓혀서 ‘남성이 남성성을 표현하여 여성을 불쾌하게 하는 모든 행위’로까지 확대한다면 가장 강력하게 성폭력을 반대하는 운동이 되고 여성운동이 도약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하라는 판단을 했다고 본다. 또한 그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절대다수 대중은 그것이 어떻게 성폭력이냐고 반박할 것이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지금까지 여성운동은 항상 그런 말을 들으며 싸워왔고 대중의 인식을 변화시키며 여성운동의 지평을 넓혀오지 않았는가?” 이것은 성폭력 개념의 확장에 있어 그 한계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식으로의 지속적인 개념 확장 자체가 옳다고 볼 수는 없다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두 번째 사건은 바로 노동자연대 동영상 사건이다. 이 사건에 있어 하나의 논쟁은 여성에게 포르노를 보여주거나 그러한 행위를 방조한 것이 성폭력에 포함되는지 여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논쟁은 그 성격상 도저히 결론이 날 수가 없는 종류의 논쟁이다. 왜냐하면 성폭력 개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책위측은 자신들이 여성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그러한 행위가 성폭력 개념에 포함되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설령 우리 사회의 인식에 있어 현재 그것이 성폭력에 포함되지 않는다하더라도 앞으로라도 포함되는 사회를 만들고 그러한 방향으로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운동을 전개한다고 믿고 있을 것이며 노동자연대 회원들이 “그것이 어떻게 성폭력이냐?”라고 반박하는 것에 대해서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보고 귓등으로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다시피 여성운동은 수십 년 동안 그런 주장을 들으며 발전해 왔으니 또 그런 상투적인 반발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무슨 이상한 심리적 성적 욕망에서인지 여성에게 포르노를 보여주고 쾌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비단 이 사건에서 뿐 아니라 포르노가 합법인 나라들에서는 특히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고 그래서 원치 않는 사람에게 포르노를 보여주는 것이 범죄라는 경고 문구는 모든 포르노물에 명기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포르노가 불법이지만 일명 야동이라 불리며 인터넷 상에서 널리 유통되고 있다. (나는 ‘야한 동영상’을 줄여서 ‘야동’이라는 부르는 10대적 조어법에 의해 만들어진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매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외설물이라는 우리말 표현이 있으나 성적인 내용이 담겼다 하여 외설이라고 부정적로 치부하는 경향에도 반대하기 때문에 포르노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도 남성들에게 포르노물이 무차별적으로 퍼져있기 때문에 많은 남성에게는 일상적인 일에 불과하고 오히려 쾌감을 느끼면 느꼈지 불쾌함을 느끼지는 않는 포르노 시청이 여성에게는 그렇게 성적인 불쾌감을 주는 인격권 침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책위가 이러한 문제를 들고 사회적인 문제로 삼으려 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 사건을 통해 원치 않는 여성에게 포르노를 보여주는 것이 심각한 인권침해라는 인식이 확산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하여 성폭력 개념 논쟁을 바라보며 나로서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억울함’이다. 남성 가해자의 억울함 따위를 대체 왜 고려해야 하는가라고 어떤 여성주의자들은 반문할 수도 있다. 단언컨대,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서구의 수많은 여성주의자들이 법률과 사법 영역에 진출하여 성과 관련된 범죄에 있어서 그것들을 유형별로 분류하고 그 경중을 판단하는 기법과 개념들을 개발하여 그에 비례하는 처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화한 이유이다. 정의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느 정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하여 그것이 타인의 건강을 해치고 나아가 암을 유발할 수도 있는 살인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금연 캠페인을 할 때는 할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런데 그 행위자를 처벌할 때도 정말 살인행위에 준하여 처벌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사람을 살인자라는 명칭을 부여하여 사회적으로 규탄할 수 있겠는가? 도저히 없다. 왜냐하면, 생각해 보라. 너무나 억울하지 않겠는가? 성폭력 개념의 확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나 비난의 수위에 있어서 가장 광범위하게 정의된 일종의 선언적 범주를 가지고 개별 사건을 그 범주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가해자에게 억울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억울함을 고려하는 것을 남성 가해자의 입장을 헤아리는 일종의 남성 중심적 행태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개별 사건에 대해 그것에 일치하는 침해행위의 개념을 제시하고 그에 비례하는 처벌과 비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일 뿐 아니라 전체 여성운동에도 이로운 일이다. 그렇지 못하면 남자의 줄담배를 성폭력이라고 분류하는 것에 대한 대중의 조소와 마찬가지로 여성운동의 주장이 일반 대중의 인식과의 괴리로 인해 설득력도 가지지 못할 것이고 운동의 성과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성폭력 개념의 확장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점들을 생각하다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 본적이 있다. 나 개인의 부족한 의견이지만 설득력이 있는지 논의해 주기를 바라며 제안하는 것은 ‘하위 범주 우선 원칙’이다. 즉, 이미 성폭력 개념이 확장된 것이 역진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 개념은 일반적인 통칭으로서 놓아두고, 구체적인 개별 사건에 대한 담론에 있어서는 최대한 구체적인 하위 범주의 표현을 사용하여 표현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렇게 해야 그 사건의 실체를 표현하는데 있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또한 노동자 연대 측에서 이 사건을 계기로 성폭력의 새로운 개념을 정의하고 성추행, 성희롱 등 관련된 개념을 정립하는 작업을 하는 것도 나는 매우 유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개념 정립이 소수의 견해라 하여 무시될 이유는 전혀 없으며 사회주의자로서 우리사회의 여성 인권과 성폭력에 대한 반대 있어서 매우 뜻 깊은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

3. 성폭력 사건의 운동적 해결에 대하여

나는 노동자 연대 사건을 통해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소위 ‘성폭력 사건의 운동적 해결’이라는 전술 또는 운동 방식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내가 말하는 ‘성폭력 사건의 운동적 해결’이라 함은 간단히 말해 다음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먼저 중범죄라고는 할 수 없는 성희롱 내지 성폭력 사건이 어느 운동 단체나 조직의 일반 구성원들 사이에 의해 발생한다. (그것이 중범죄라면 운동적 해결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상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강간 등의 중범죄라면 검찰이나 경찰에 고발할 일이지 운동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 이후 피해자와 피해자를 지지하는 조력자는 가해자가 속한 단체에게 찾아가 요구하기를 해당 사건을 법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하지 않고 대승적 차원에서 ‘운동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하는데 그 단체의 구성원에 의해 이런 사건이 벌어졌으니 해당 단체도 응당 그에 대해 책임을 지고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사건을 조사하고 또한 앞으로 이러한 종류의 사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규약을 만들거나 대책을 마련하거나 회원들에게 성폭력 교육을 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해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해결은 다음과 같은 가정 내지 명분 위에 있다. 사건을 개인 간의 사건이 아니라 운동 조직의 차원에서 바라봄으로써 단순히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직 문화 개선을 위한 계기로 활용하여 그 조직 내에서 성폭력을 뿌리 뽑고 전체 구성원들이 성폭력 문제에 대해 인식을 고양할 기회를 만든다. 피해자는 운동 사회 내의 구성원이자 활동가이므로 운동 사회가 그 피해자의 도덕성과 정직성을 의심하는 것은 옳지 못하므로 그 피해 호소의 내용은 모두 진실한 것으로 신뢰하여야 한다. 지배자들과 권력자들은 권력 기관 내지 단체 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이를 은폐하고 축소하기에 급급한 반면, 운동 단체는 적극적으로 사건에 대한 사과를 하고 이를 근절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함으로써 차별성을 드러내고 도덕성을 고양시킬 수 있을 것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그리고 피해자 측에서 조직에 이런 요구를 하면 그 조직이 정상적인 조직이라면 당연히 난색을 표할 것이다. 단체의 주요 인사가 부적절한 행위를 한 것이 명백하다면 직위 해제나 제명 등의 징계를 하고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사과문 정도는 발표할 수 있겠지만, 일반 회원 간의 문제에 대해서 조직 전체 차원에서 그러한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첫째, 피해자의 요구에 의해 반성폭력 규약을 만든다거나 회원들에게 성폭력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은 민주적인 조직이라면 할 수 없는 내용이다. 즉, 회원들의 자발적 요청이나 문제제기에 의해 조직 내에서 충분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회원들 다수가 찬성을 하는 경우, 즉, 그 조직이 가지고 있는 조직 내의 민주적인 의사결정 방식에 의해서 가결이 되는 것이면 몰라도 피해자가 요구하여 조직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들어주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다.

둘째, 대체 어느 조직이 대승적인 운동적 해결이라는 명분을 앞세운다 하더라도 조직의 일개 회원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그것도 ‘성폭력’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오명을 조직 전체가 스스로 떠안고 공개적인 사죄를 할 수 있겠으며 수많은 구성원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굴욕감과 모욕감은 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피해자 측이 아무리 선하고 정의로운 명분을 내세우며, 이러저러한 요구사항은 성폭력 재발방지를 위해 마땅히 필요한 내용이고 조직 내에 성폭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과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더 도덕적이며 옳은 일이라고 말을 해도, 그것이 민주적인 대화나 절차에 의해 조직이 설득되어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정치적 압박에 의해 그러한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굴복일 수밖에 없고 그 조직은 그러한 압박 (그 조직이 느끼기에는 협박)에 굴욕적으로 항복하지 않기 위해 결사적으로 싸울 것이다. 대체 그러지 않을 조직이 어디에 있겠는가?

셋째, 이렇게 소위 운동적 해결을 주장하는 측은 단체가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음에 따라 이를 달성하기 위해 해당 단체를 압박하여 정치적으로 굴복시키려고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갈등은 더욱더 폭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에 따라 더더욱 그 요구들이 수용될 가능성은 희박해질 것이고 그러한 방식으로 해결을 추구하는 활동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넷째, 피해자가 운동 단체의 구성원이라 하여 피해자의 말을 모두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거짓말을 한다고 몰아세우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은 아무리 정직하게 말하려고 해도 자신의 입장에서 기억과 경험을 재구성하여 설명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은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또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즉, 입장의 차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직의 입장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조직의 구성원이라면 그 중 누구의 입장도 지지하기가 난감하다. 피해자 중심주의에 따라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측의 주장을 신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조직에게 판단에 있어서의 객관성조차 없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인데, 어느 조직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법적인 개념을 운동 단체가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운동 단체가 법률을 그토록 좋아하는 것이냐고 비판하는 것은 대단히 조야한 비판이다. 새로운 사회를 달성하려고 운동을 하는 것은 기존의 지배질서 속에서 이루어진 모든 성과나 제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섯째, 운동 단체는 범죄 사실을 수사하고 진상 조사를 하여 사건을 판단하는 전문 기관이 아니며 그러한 전문성을 가지기도 힘들다. 만약 단체가 사건을 조사해서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하였다고 해 보자. 운동 단체가 할 수 있는 처벌이라고 해 봐야 경고 아니면 최대한의 처벌은 제명이다. 즉, 피해자가 원하는 수준의 처벌은 하기가 힘들며, 어느 정도 처벌을 해 봐야, 피해자 측은 틀림없이 조직 보위를 위해 가해자를 감싼다는 비판을 하며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단체가 가해자를 강력하게 처벌했다고 해 보자. 강력하게 처벌한다고 해 봐야 제명이겠지만, 공식적으로 성폭력범으로 선언하고 공개 사과문 게시를 요구하는 등의 처벌을 했다고 해 보자. 내가 그 가해자라면, 억울해서라도 법원에 갈 것이다. 차라리 법적으로 판단을 받아서 벌금을 내면 될 일이지 (위에서 말한 바대로 벌금형 이상의 중범죄라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갈 일이지 운동적 해결이라는 부분에서 논의될 사항이 아니다), 우리 사회 내에서 성폭력범이라는 낙인은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즉, 단체 내의 위원회에서는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있는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구조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성폭력 문제의 운동적 해결’이라는 방식이 가지는 문제점의 목록은 여기서 끝이 아닐 것이다. 요컨대, 대책위와 노동자 연대는 모두 이 동영상 사건의 진행 과정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대책위 측이 아무리 진정성을 가지고 성폭력 반대 운동을 했다 하더라도 지금 그러한 운동의 성과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노동자 연대라는 단체의 회원들이 성폭력에 대해 교육을 이수한다면 좋은 일일 것이다. 또 반성폭력 규약이 제정되어 성폭력이 근절된 단체를 만드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런데, 노동자 연대가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성폭력을 옹호하는 단체라고 규정하고, 노동자 연대와 연대하는 단체도 성폭력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네트워크를 통하여 강력하게 압박하는 방식으로 이것을 달성하려 하는 것은 성과가 없을 뿐 아니라 방식 자체도 정의롭지 못하다. 나는 이것이 이 사건에서와 같은 ‘성폭력 사건의 운동적 해결’이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여도 이러한 방식으로는 결코 해결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만약 진정으로 ‘운동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있다면 어느 단체에게 ‘성폭력 단체’라는 굴레를 씌워 마치 국가 권력과 투쟁하듯이 강력하게 압박하여 단체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것이 어렵고 인내심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민주적인 대화와 토론 그리고 설득으로 합의에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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