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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의 의의와 과제

세월호 참사는 배 침몰뿐 아니라 구조 실패, 진실 은폐, 여야의 무책임한 합의 등으로 대중적 공분이 컸다. 참사와 그 후속 조처를 보면 이윤 체제의 비극, 한국 자본주의의 관성, 부패한 정부 등의 문제를 보여 준다.

자판기에 깔린 친구를 차마 구하지 못하고 빠져나온 한 단원고 학생은 그 친구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도 평생 남을 상흔이다.

“구조 실패·진실 탄압 주범 박근혜보다 더 질기게 싸우자”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 범국민대회. ⓒ조승진

지난해 10월 검찰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세월호를 무리하게 증·개축했고, 과적을 했고, 평형수에 문제가 있었고, 경험 없는 조타수의 실수가 원인이었다’고만 밝혔다. 정확한 사고 발생 시간과 장소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당시 기상 악화 때문에 다른 배들은 출항하지 않았는데 왜 세월호만 출항했는가? 왜 세월호만 국정원에 의무 보고를 했는가? 국정원이 실소유주이고 경영자인가? 이런 의혹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또, 사람들이 알고 싶은 건 박근혜의 사생활이 아니라 구조를 위한 골든 타임 동안 박근혜가 왜 아무것도 안 했는지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바뀐 것이 없다. 판교 환풍구 사고, 오룡호 침몰 사고가 벌어졌고 최근 현대제철에서 노동자가 쇳물에 빠져 숨진 일도 있었다. 그리고 사후 대책도 여전히 미흡하다.

지난해 11월 여야 야합으로 결국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반쪽짜리 특별법이 통과됐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으면 제대로 사건을 조사·수사해서 책임자를 처벌할 수 없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이런 반쪽짜리 특별법으로 생겨난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권한조차 가로막고 있다. 유가족들을 모욕하는 글을 퍼나르거나 막말을 하던 자들을 여당 몫 특조위원으로 앉히고, 특조위의 조사권(수사권이 아니라)마저 침해하는 “쓰레기 시행령”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을 한사코 막으려는 정부가 이른바 ‘안전’ 대책들을 쏟아 냈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안전대진단과 안전산업 발전 방안’은 오히려 안전 규제를 없애거나 완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전관리 기술자들이 직접 교육받던 것을 원격 교육으로 전환하거나, 유해화학 물질 설치와 지급 기준을 완화하고, 이명박 정부 하에서도 안전 문제로 반려됐던 수직 증축 리모델링을 허용했다.

3월 30일 제출한 ‘안전혁신마스터플랜’은 더 황당하다. 안보와 안전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특수기동구조대를 설치해 테러시 테러로부터 구조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안전산업 활성화 대책’은 안전 관련 업무를 시장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산업자원부는 ‘안전 펀드’를 구성해서 민간보험을 활성화하겠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는 구조를 민간업체 ‘언딘’에게 넘겨버렸는데, 이런 방식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안전사고를 막기는커녕 제2의 세월호 참사를 일으킬 수 있는 조처들이다. 2014년 4월 16일을 과거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참사는 과거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의 성과와 쟁점들

처음에는 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둘러싸고 진보진영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추모에 머물러야 하는가, 투쟁을 해야 하는가. 박근혜에게 항의의 초점을 맞춰야 하는가 아닌가 등을 둘러싸고 그랬다. 당시 개혁주의 리더들은 박근혜를 정조준해 투쟁하면 운동이 ‘정치화된다’며 반대했다. 3백 명이 넘는 유가족들의 생각을 정확히 알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지난해 어버이날, KBS 보도국장이 “세월호는 교통사고와 다를 바 없다”는 막말을 하자 유가족들이 분노해 KBS 항의 방문을 했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되니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로 향했다. 그날 노숙 농성을 시작한 것이 항의 운동의 시작이었다. 오히려 유가족들이 운동을 ‘정치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5월 10일 안산에 2만 명이 모였고 이후 8월까지 매주 수천~수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집회에 참가했다. 전교조 교사들은 해고를 각오하고 박근혜 퇴진 성명을 발표했다. 노동자 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도 이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항의 과정에서 유가족이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조중동과 새누리당은 위선적이게도 ‘순수성’ 운운하며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을 비난했지만, 이 운동이 정치적으로 발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부에 항의하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정치 행위이다.

왜 정치적 투쟁이 필요한가

지난해 운동의 성과와 쟁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첫째,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진 못했지만 세월호 참사는 사고 원인과 수습 과정 모두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우선순위가 노동계급 대중의 생명과 안전에 있지 않고 이윤에 있음을 명백히 보여 줬다. 세월호 같은 ‘시한폭탄’이 버젓이 바다를 떠다닐 수 있었던 것은 기업들의 이윤을 위해 정부가 규제를 완화하고, 그 과정에서 정부 관료와 기업이 여전히 밀접하게 서로 유착돼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급변침의 원인, 국정원 실소유주 의혹, 유병언 로비 등이 밝혀져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참사의 진정한 책임을 져야 할 핵심 관료들은 요리조리 다 빠지고 ‘피라미’라고 할 수 있는 선원들 ― 물론 이들도 처벌받아야 한다 ― 만 뭇매를 맞았다.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은 이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염원의 상징이 됐다. 이런 뜻을 모은 것이 커다란 성과다. 기소권과 수사권을 포함하는 특별법은 이런 염원의 한 상징이었다. 현재도 이런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지난해 특별법 투쟁에 참가했던 학생들뿐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이 시행령 폐기 싸움에 나왔다.

둘째, 박근혜 정부의 총체적 무능, 무책임, 부패가 여실히 드러났다. 사고 당일 오전 청와대는 승객들이 잔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후에도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가족대책위가 ‘성역 없는 조사에 대통령도 포함된다’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세월호국민대책회의’ 안에서 대통령도 조사 대상에 포함시킬 것인지가 논쟁이 됐다. 실현 불가능한 요구를 내놓으면 실망만 할 수 있다는 것이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리였다.

하지만 박근혜는 정부 책임자로, 세월호 항의 운동에서 대중적 분노의 상징이고, 무엇보다 박근혜를 조사하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렵다. “쓰레기 시행령” 추진을 보면 정부가 어떻게 해서든 진실 규명을 막으려 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지난해도 마찬가지였다. 구조 첫날부터 해경 인력의 5분의 4가 구조가 아니라 유가족들을 감시하는 데 배치됐다. 세월호 참사 항의 시위를 진압하려고 2008년 촛불 투쟁보다 8배나 많은 경찰 병력을 투입했다. 결국 진실 규명 싸움은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이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광주 학살은 1980년에 일어났다. 학살 책임자인 전두환은 15년이 지난 1995년에야 처벌받았다. 정부에 줄기차게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운동을 벌인 덕분에 특별법이 제정됐고 1988년에는 청문회를 열 수 있었다. 운동이 전진하려면 정치화돼야 한다. 운동이 정치화되려면 대중 운동이 건설돼야 하고, 시스템에 실질적인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사회세력인 노동계급이 실제로 움직여야 한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은 박근혜에 대한 증폭된 반감과 불만을 모아내는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투쟁의 전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셋째,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은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박근혜를 실질적으로 물러서게 할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노동자 투쟁의 뒷받침을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당시 대책회의 내 일부 개혁주의 리더들은 대중 운동을 확대하기보다는 지방선거에서 ‘투표로 심판하기’를 바랐다. 서울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새정치연합 박영선이 ‘수사권·기소권이 보장된 특별법은 가능하지 않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했는데도 ‘세월호국민대책회의’가 이에 대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못 하게 해서 논쟁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선거에서 새누리당에 항의 투표를 했지만, 대안 부재 때문에 새누리당은 참패를 모면했다. 이에 실망한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수사권·기소권을 포함한 특별법 제정은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며 유가족들에게 수사권·기소권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한편, 일부 좌파들은 박근혜 퇴진을 물신화했다. 이는 굳이 전체 행진 대열에서 소수가 이탈해 청와대로 가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운동이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항의의 몸짓을 더 극적으로 하고자 굳이 소수의 행동을 벌인 것이다.

하지만 항의 운동이 전진하기 위한 고리는 다른 데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로 투쟁을 벌이면서도 세월호 항의 운동도 뒷받침해 준다면 후자도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파업이 항의 운동에 결합됐다면 박근혜는 상당한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는 조직적 참가를 제안하지 않고 소극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참가하라’, ‘노동자들이 조끼 입고 집회 참석하면 안 된다’ 는 식이었다.

올해 시행령 폐기 운동은 민주노총의 4·24총파업과 맞물려 벌어진 것은 지난해에 견줘 조금 전진한 부분이다. 지난해 유가족 일부는 민주노총을 부담스러워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난해부터 투쟁을 거치며 유가족들과 많은 사람들의 의식에 변화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넷째,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은 박근혜의 다른 악행을 뒤로 미루는 효과가 있었다. 지난해 유가족들의 KBS항의 방문은 KBS 노동자들을 자극했다. KBS 노동자들은 박근혜의 낙하산 사장 길환영 사퇴를 요구하며 파업해 승리를 거뒀다.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박근혜가 추진하는 의료 민영화가 ‘제 2의 세월호 참사’라면서 생명과 안전을 위한 파업을 했고, 의료 민영화 정책들을 부분적으로 늦췄다. 일부 노동운동가들은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으로 자신들의 투쟁이 묻힌다는 협소한 부문주의적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고 동반 상승 작용을 하기도 한다.

정부의 분열 시도에 맞서야

마지막으로 유가족, 실종자, 생존자 가족들 사이의 단결이 강해졌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5백2명이 사망했다. 사고 당일 옥상이 무너져 내리고 기둥에 금이 가서 물이 새기 시작했는데도 사측은 영업을 계속 하기로 했다. 백화점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대피 안내 방송을 하지 않고 자신들만 먼저 대피했다. 그 당시에도 정경유착이 여실히 드러났지만 백화점 사주 1명만 구속되고, 진상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유가족들의 친인척까지 불러내서 ‘빨리 돈 받고 처리하자’, ‘지금 못 받으면 앞으로 못 받는다’며 회유하고, 유가족들을 분열시켰다. 결국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또 한 사례는 2003년에 일어난 대구지하철 참사다. 지하철 1인승무제와 인력 감축으로 역사 안에 사고에 대처할 노동자들이 없었다는 점이 피해가 확대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사고 이후 노동조합과 시민대책위, 유가족들이 안전을 위한 행동에 나섰다. 지하철노조는 파업까지 벌이며 안전 대책을 요구했다. 좌석을 인화성이 적은 물질로 바꾸는 등 성과가 있었지만 더 철저한 진상 규명은 이뤄지지 못했다. 유가족들이 배보상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한 것이 한 요인이었다. 정부가 계속 분열을 획책하는 이유다.

다행히도 세월호 유가족들은 놀라운 단결력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정부는 끊임없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분열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과거 경험에서 배워 훨씬 더 뭉쳐 있다. 또, 유가족들은 ‘우리끼리 하기는 어려운 싸움’이라며 ‘4·16연대’라는 진상 규명 기구를 설립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4·16 연대’는 유가족과 사회단체가 장기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상설 기구이다.

이 싸움은 단지 1~2년의 싸움이 아니다. 아직 진실 규명을 향해 한 발자국도 안 나아갔다. 앞으로 정부 기관들이 특조위에 자료를 제출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계속 투쟁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행령 통과 이후의 과제

시행령 폐기 투쟁으로 4월 한 달을 달궜는데 결국 시행령이 국무회의에서 통과됐다. 핵심 쟁점의 하나인 기획조정실장의 업무를 “기획 및 조정”에서 “협의 및 조정”으로 문구만 바꿨는데, 조사의 실권을 박근혜 정부가 가지는 건 바뀌지 않았다. 특조위 재정, 사업비 문제도 여당 추천 위원이 틀어쥐고 있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독립적 조사를 할 수 없다.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들에게 조사 권한을 준 것으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시행령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시행령 폐기 투쟁은 정세의 초점이었다. 민주노총의 파업, 성완종 게이트와 맞물리면서 정부는 시행령 발표를 3번이나 미뤘다.

이번 시행령 폐기 투쟁은 지난해 운동의 퇴적물 위에서 출발했다고 강조하고 싶다. 처음부터 정부에 항의의 초점이 맞춰졌다. 노동자 투쟁과의 결합도 조금 이뤄졌다. 반갑게도 민주노총 새 집행부는 세월호 진상 규명과 시행령 폐기를 4·24파업과 메이데이의 주요 요구에 포함시키고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연대했다. 물론 노동자 투쟁이 충분히 크고 강력하게 벌어지지는 않았다.

한편, 새정치연합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됐다. 지난해는 이 운동에 개입해서 뒤통수쳤다면 올해는 무위도식이었다. 새정치연합 안에 세월호특위가 구성됐지만 투쟁하는 유가족들을 한 차례도 방문하지 않았다. 물론 4·29 재보선에서 새정치연합이 참패하자 박근혜는 지금이 적기라고 보고 시행령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러나 다 끝난 것은 아니다. 현재 특조위 위원들이 시행령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개정안을 내놓기로 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한쪽에선 현실을 인정하고 특조위를 활용하자는 쪽과 다른 한쪽에선 이제 특조위로는 진상 규명이 불가능하니 민간 조사위를 꾸리자는 주장이 있다.

‘악마의 시행령’이라고들 했는데, 이제 와서 그 시행령 하의 특조위를 진상 규명에 활용할 수 있다는 건 논리적 모순이다.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럼에도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려면 국가의 강제력이 필요하다. 특조위가 어떤 방식으로든 활동하면 이를 통해서는 진상 조사가 제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 폭로될 것이다.

따라서 양 편향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국가를 상대로 한 진상 규명 요구를 계속하면서, 그와 더불어 특조위 조사 과정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제대로 된 특별법 재개정까지 제기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리고 이 싸움이 안전 사회에 대한 열망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이 사회를 새롭게 재편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 투쟁이 중요하다. 대구지하철 참사에서 부분적이나마 과거보다 전진이 있었던 것은 지하철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1968년 탄광이 무너지면서 탄광안전법이 신설됐다. 당시 탄광 노동자들이 파업하고 지역의 다른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연대했다. 그 이후로 사망률이 훨씬 줄어들었다.

시행령이 통과돼 한 국면이 일단락됐다. 지난해 특별법 통과 뒤에도 집회의 규모는 줄었다. 관심이 줄어서라기보다 ‘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개입이 아직 모자란 것은 분명하다. 노동자들 안에서도 반응이 같지는 않다. 이 운동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정치적으로 선진적인 소수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 특정한 계기로 사람들이 바뀔 수도 있다.

규제 완화, 인력 감축, 비정규직 차별 반대 투쟁도 세월호 투쟁과 떨어져 있지 않다. 한 예로 ‘작업중지권’은 안전 문제이고 1987년 노동자 투쟁의 성과인데 지금 정부가 되돌리려고 한다. ‘과적 금지’도 화물노동자 자신들의 요구다. 세월호도 선원의 70퍼센트가 계약직이었다.

최근에 철도에서도 계약직이 늘어났다고 한다. 정비 업무가 외주화되면서 사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인력 충원이 중요하다. 병원도 그런 사례다. 따라서 노동자 자신의 요구로 싸우는 것도 세월호 운동과 연결될 수 있다.

과거에 비해 세월호 유가족들과 진보적 세력들이 훨씬 더 유기적 관계를 맺으려 한다. 그리고 십대 학생들이 희생됐기 때문에 관심이 훨씬 높다. 희생된 아이의 부모들은 대부분 노동자이기도 하다.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이 사회 전반의 안전 문제와 세월호 진실 규명을 결합시킨다면 더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말 〈노동자 연대〉 신문이 이 싸움이 끝난 게 아니라고 강조했듯이, 앞으로도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유가족들이 계속 진실을 위해 싸울 것이고, 노동자들도 안전을 위해 계속 싸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