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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고전에서 배운다:
중간주의는 무엇인가?

〈노동자 연대〉 편집자: 무릇 노동자 운동 안에서 활동하는 좌파는 크게 개혁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중간주의, 종파주의가 있다. 중간주의는 개혁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사이에서 이리저리 유동적으로 옮겨 다니는 불안정성과 동요, 표리부동, 망설임이 특징인 조류를 가리키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용어이다. 이 글이 씌어지던 1930년에는 스탈린의 지령으로 코민테른과 각국 공산당이 중간주의적이면서도 종파적인 경항을 띠던 때였다. 한편, 일부 신디컬리스트들도 중간주의적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트로츠키는 이들의 우경화에 견제구를 날리고자 예리한 비판을 가하기로 했다. 이 글은 민주노총 내 일부 좌파가 최근 2년 새 우경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 시사점을 던져 준다. 번역은 나와 차승일 기자가 함께 했다.

[급진적 노동조합 운동(신디컬리즘)을 지지하는] 신문 〈인민의 외침〉에서 샹벨랑[모리스 샹벨랑은 급진적 노동조합 운동가로, 1929년 9월 열린 통합노동조합총연맹 CGTU 제5차 대의원대회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인 다수파에 맞서 소수인 신디컬리스트들의 논쟁을 주도했다]은 교원노조의 “중간주의”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나는 그 편지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혁명적 사상이 전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한 가지 논점만이 관심을 끈다. 샹벨랑은 공산주의자들을 “중간주의자”라고 묘사한다. 그의 생각은 십중팔구 이런 것이다: 현재 정치 전선의 한쪽 끝에는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나트[등의 신디컬리스트] 등이 그들이다. 다른 쪽 끝에는 노동조합이 정당에 종속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통합노동조합총연맹(CGTU)의 공식적인 지도자들이 그들이다. 이 둘 사이에 공산당 좌파(좌익반대파)가 있다는 것이다. [좌익반대파는]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주뼛주뼛 옹호하지만 공산당과 결별할 위험은 감수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좌익반대파가 중간주의자인 건 중간의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 좌익반대파가 중간주의[이 문맥에선 스탈린 일파를 가리킴]에 맞선 투쟁에서 등장했으므로 샹벨랑은 [좌익반대파의] 내부 모순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샹벨랑은 손도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 듯하다.

자율성

자연주의자에게는 자연 세계의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정치 세계와 관계된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샹벨랑의 분류법은 피상적이지만, 덕분에 몇몇 혁명적 개념들을 정확하게 정의할 기회를 제공한다. […]

의회 내 구도를 묘사하는 것인 양 ‘중간주의’를 평면기하학이나 위상기하학적으로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틀렸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정치적 개념들은 형식적 특징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방법론적 관점에서 고찰한 그 계급적 내용에 따라 규정된다. 현재의 노동자 운동 안에는 세 가지 경향이 있다. 개혁주의, 공산주의, 중간주의가 그것이다. 이 세 경향은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적 체제 하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객관적 조건에서 면부득 비롯한다.

스페인 혁명 당시 중간주의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 준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

개혁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특권적 최상층에서 비롯해 그 계층의 이익을 반영한다. 특히 몇몇 나라 노동계의 귀족적 관료층은 특정 사고방식을 지닌 매우 중요하고 강력한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존재 조건과 사고방식이 프티부르주아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적응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지지로 성장한 계층이기 때문이다. 이 계층의 최상층 인사들은 부르주아 의회를 통해 고위 권력과 안락한 삶을 누린다.

[그들의] 개성은 프티부르주아적 사고방식이 일부 남아 있는 보수적 대부르주아지와 비슷한데, 그 프티부르주아적 사고방식은 흔히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기반에 대한 위선적인 세계관의 모습을 취한다. 달리 말해, 그들은 세 가지 계급의 인격적 침전물이 퇴적된 타입이다. 세 계급의 관계는 이렇다: 대부르주아지가 프티부르주아지에게 명령을 내리면 프티부르주아지는 노동자들에게 욕을 한다. 대부르주아지가 [개혁주의자를] 직원용 출입구를 통해 자신의 자택이나 은행장실이나 장관 집무실에서 만나 줬느냐 아니면 [개혁주의자에게] 자신의 부와 사상을 사용할 수 있도록 내놓았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이지만 하찮은 것은 아니다. 모순이 점점 더 심화하는 [자본주의] 진화의 제국주의적 단계에서 부르주아지는 개혁주의의 지도층을 자신의 기업과 정부 기관을 위해 일하는 진정한 일꾼으로 변모시켜야 한다. 이런 상황의 특징들은 개혁주의가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에 새로, 훨씬 더 의존하게 되고, 개혁주의의 심리와 정치에 훨씬 더 독특한 각인이 남고, 개혁주의가 부르주아 국가의 국정을 직접 처리하기 적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최상층 ‘개혁주의자들’과 관련해, “그들이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다” 하는 말은 결코 할 수 없다. 오히려 이들 총리, 장관, 시장, 국회의원, 노조 지도자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은 그들의 특권적 지위를 빼앗는 일일 것이다. 이들 자본의 감시인들은 소유 일반을 지킬 뿐 아니라 주로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한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해방 혁명을 철천지원수로 대한다.

개혁주의에 반대해 혁명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 강령(마르크스주의적 공산주의)에 근거한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이고 방법론적으로, 부르주아 국가의 혁명적 전복을 목표로 하는 체계적인 투쟁을 전망한다. 그 방법은 우선 프롤레타리아트를 단결시켜, 특히 권력 장악으로 나아가, 결국 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재편하는 것이다.

가장 선진적인 소수, 즉 노동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 대담한 소수만이 이 과업에 착수할 수 있다. 이 소수는 명확하게 규정되고 과학적으로 세워진 강령에 근거해 활동해야 하고, 노동자 투쟁 경험이 많아야 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다수를 더 많이 자기 주위에 집중시켜야 한다.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프롤레타리아는 몹쓸 사상의 영향을 받으므로 당(이데올로기적 선택에 따라 건설된다)과 계급(생산 과정에 의해 자동으로 형성된다)의 구분은 사라질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한 뒤에야 비로소 ― 계급이 일소돼, 특히 대중이 경제적·문화적으로 부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 당은 노동 대중 속으로 조금씩 용해돼 마침내는 국가처럼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혁명적 미사여구나 늘어놓으며 허세를 부리는 불모의 종파들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말하면서도 공산주의자 전위의 구실을 부정할 수 있다.

닭과 오리

이와 같이, 세계 노동계급 속에 존재하는 두 가지 기본적 경향은 사회적 제국주의[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진보파’]와 혁명적 공산주의이다. 이 두 극 사이에는 끊임없이 모습이 바뀌고 항상 변모와 자리 이동을 하는 여러 과도적 단체들과 경향들이 있다. 이들은 때로 개혁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때로 공산주의에서 개혁주의로 변모하고 이동한다. 이들 중간주의 경향들은 사회적 기반이 명확하지 않고 원래 명확할 수도 없다. 개혁주의가 노동계급의 특권적 최상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공산주의가 프롤레타리아의 기수 자체를 나타내는 반면, 중간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내에서 일어나는 과도적 과정, 프롤레타리아 내 상이한 계층 내에서 일어나는 상이한 물결, 혁명적인 최종 입장을 향한 전진의 어려움을 나타낸다.

바로 이 때문에 중간주의 성향의 대규모 조직은 안정적이지도 못하고 성공하지도 못한다.

사실, 노동계급 안에는 개혁주의에 전면적으로 동의하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기본적으로 혁명가가 될 수도 없는 변함없는 중간주의자들의 층이 항상 존재한다. [ … ] 대중으로 말하면 그들은 그런 과도적 단계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중간주의자들 주위에 결집했다가 오래잖아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개혁주의자로 되돌아간다. 물론 일시적으로 정치적 무관심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루이 알튀세르(1918~1990).

바로 이런 식으로 프랑스 사회당 좌파가 공산당으로 변모했다. 그 과정에서 그 당의 중간주의적 지도자들은 버림받았다. 또한 이런 식으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이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당원들은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으로 갔다. 또 이런 식으로 ‘2.5 인터내셔널’이 세계에서 사라졌다.1

이와 마찬가지 현상을 노동조합 운동 영역에서도 볼 수 있다. 바로 영국의 중간주의적인 ‘독자적’ 노동조합들이다. 이 노동조합들은 국제노동조합연합(IFTU) 소속을 고수하다가 결국 총파업 때 배신을 자행한 IFTU의 비할 데 없는 ‘황색’ 정책 지지로 입장을 바꿨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조직들이 사라졌다고 해서 중간주의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공산당 관료들이 그렇게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중간주의에 매우 가깝다. 제1차세계대전 개전 직후 유럽 노동운동이 가라앉자, 명확한 대규모 조직과 조류들은 거품처럼 사라졌다. 세계의 위기가 현재 악화하고 있고 대중이 새로 급진화하고 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정당, 노동조합, 미조직 대중 속에서 새로 중간주의 경향들이 나타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렇게 새로 등장한 중간주의 경향들 덕분에 옛 중간주의 지도자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현상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노동운동 내 중간주의 정치인들은 오리알을 품어 부화시킨 뒤에 [오리가 떠나자] 물가에 가서 땅을 치며 통곡하는 닭과 매우 비슷하다. 그 새끼들이 뻔뻔하게도 ‘자율적’ [어미] 닭을 떠나 개혁주의나 공산주의의 물에 들어가 헤엄치니 말이다. 샹벨랑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주위를 돌아본다면, 지금 바쁘게 개혁주의적 알을 품고 있는 점잖은 닭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노동계 관료는 언제 어디서나 ‘자율성’이나 ‘독자성’ 등의 원칙으로 몸을 가리며 사실은 노동자들로부터 자신의 독자성을 보장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이러저러한 원칙을 기치로 내세우는 관료들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 알다시피, 독일과 영국의 노동조합들은 오랫동안 모든 정당으로부터의 독자성을 주장했다. 오늘날 미국 노동조합들이 바로 이 점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개혁주의는 결국 제국주의 편으로 붙었고, 이제부터는 개혁주의자들이 ‘자율성’이라는 표지를 예전처럼 쉽게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그 표지를 고수하는 중간주의자들이 득을 볼 수 있다. 사실, 개혁주의나 공산주의와 비교해 우유부단이나 표리부동의 ‘자율성’을 소중하게 지키는 것이 중간주의자들의 본질 아닌가.2

바로 이런 식으로, 세계 노동운동 안에서 주로는 개혁주의의 속성이었던 자율 사상이 오늘날에는 중간주의의 표지가 됐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중간주의인가?

위에서 필자는 중간주의가 항상 위치를 바꾼다고 했다. 즉, 좌경화해 공산주의 쪽으로 올 수도 있고 우경화해 개혁주의 쪽으로 갈 수도 있다.

샹벨랑이 그다지 오래지 않은 제1차세계대전 개전 직후의 자기 단체 역사에 눈을 돌리기만 해도 그는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자율적’ 노동조합들은 분명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즉 공산주의 쪽에서 개혁주의 쪽으로 가고 있다. 그 노동조합들은 심지어 공산주의라는 딱지도 거부했다. 바로 그 때문에, 그 노동조합들은 좀 더 무질서하게 변모하는 다른 중간주의자들과 똑같은 진화 과정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좌) 1919년 당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선거 포스터. (우) 사민당과 USPD의 지도자 칼 카우츠키(1854~1938).

중간주의가 왼쪽으로 움직이며 대중을 개혁주의에서 떼어놓는다면 진보적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중간주의의 이중성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 진보적인 닭도 조만간 자기 새끼들에게 버림받고 물가에서 통곡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중간주의가 자율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노동자들을 공산주의적 목표로부터 떼어놓아 개혁주의로 향하게 하려 한다면 더는 진보적이지 않고 오히려 반동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다. 현재 ‘노동조합독자성위원회’가 바로 그러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거의 다 바로 스탈린주의자들의 말이다” 하고 샹벨랑은 말할 것이고, 전에 그렇게 쓴 적도 있다. 스탈린주의의 거짓말 정책에 맞서 샹벨랑의 단체와 국제공산주의좌익반대파 가운데 누가 더 실질적이고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지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의 투쟁은 ‘자율주의자’들의 ‘투쟁’과 180도 정반대 방향을 향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고수하지만 샹벨랑과 그의 동지들은 개혁주의 노선을 취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의식적으로 개혁주의 노선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일반으로 말해 중간주의는 의식적인 정책이 없다. 의식적인 닭이라면 오리알을 품어 부화시키겠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어떻게 당신은 샹벨랑과 몽무소[트로츠키의 이 글이 발표되던 당시 가스똥 몽무소는 프랑스 공산당 중앙위원이자 통합노동조합총연맹 사무총장으로, 스탈린주의자였다] 같은 정반대 인물들을 중간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는가?’ 하지만 중간주의의 본질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샹벨랑과 몽무소를 모두 중간주의로 규정하는 것이 모순적이라고 느낄 것이다. 중간주의는 항상 바뀌고, 심지어는 거울을 코앞에 놓아 줘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지난 2년 새 공산당 공식 기구의 중간주의자들은 심하게 좌충우돌하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왔고, 모나트[1926년 신디컬리스트동맹을 창립한 신디컬리스트]와 그의 동지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갔다.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과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풀어놓은 물결을 막으려고 맹목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급작스런 모험주의에 식겁한 샹벨랑 류의 중간주의자들은 수평선에 나타나고 있는 새 물결을 거스르고자 허둥지둥 몸을 굽혔다. 그런 전환기에 두 흐름 가운데 먼저 물가로 쓸려오는 것은 중간주의 진영으로, 그 진영 안에서는 매우 이질적이고 상이한 방향을 향하는 운동들이 생겨난다. 샹벨랑(이나 호되게 몰아세운다면 모나트)과 몽무소가 동전의 양면일 뿐이라는 것은 과연 참말이다.

여기서 나는 통합노동조합총연맹 CGTU와 공산당의 현 지도자들이 약 6년 전에 노동조합 문제를 어떻게 봤는지를 상기시켜야 한다고 본다. 사실상 이미 그때 그들은 공산당의 공식 지도부였고, 소위 ‘트로츠키주의’에 맞선 투쟁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1924년 1월에 열린 불쾌한 피투성이 노동조합대회 후에 CGTU 지도자들은 공산당의 행동에 대한 책임 일체와 관련을 끊을 뿐 아니라 공산당 자체와도 관계를 끊으라는 압력을 받아 근엄한 어조로 ‘CGTU 선언’을 작성했다:

“통합노동조합총연맹의 자율성 문제와 마찬가지로 정당과 정파의 조직적·행정적 자율성 문제와 관련해, CGTU의 책임 있는 기구가 센강 지부와 공산당 청년단체가 독자적으로 주최한 집회에 대해 논의할 필요는 없었다. 외부 정당 정파 단체가 주최한 집회나 수행한 활동의 성격이 무엇이든지 간에 총연맹의 집행위원회와 사무국은 그 누구의 권한이라도 빼앗을 의도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외부로부터의 공격 일체에 맞서 총연맹의 활동에 대한 통제력을 어떻게 지키는지를 그들은 알 것이다. …

“CGTU는 외부 단체, 그들의 강령, 그들의 목표를 검열할 권리도 권한도 없다. 그들 가운데 누구라도 막으려 든다면 CGTU는 경쟁하는 정당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편파적으로 지지하기 위해 자신의 필수적 중립성을 위반하는 셈이 될 것이다.

“몽무소, 세마르, 라카몽, 뒤딜리외, 베라르.”

이는 공산주의적 명확성과 혁명적 용기의 기념비에 영원히 남을 정말로 비할 데 없는 문서이다! 그리고 이 문서의 하단 부분에서 우리는 몽무소, 세마르, 라카몽, 뒤딜리외, 베라르의 서명을 볼 수 있다.

내 생각에 프랑스의 좌익반대파는 이 ‘선언’을 고스란히 출판할 뿐 아니라 마땅히 받을 만한 세간의 관심을 받도록 해 주는 게 좋겠다. 미래에 무엇이 우리를 놀라게 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영·소 노조위원회

몽무소와 세마르 등이 공산당 등 각종 정파에 대한 자신들의 절대적인 중립성을 공표한 이 ‘선언’에 서명하고 지난 몇 년 사이에 이 공산당계 지도자들은 용감하지만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꽤 많이 벌였다. 특히, 그들은 ‘영·소 노조위원회’의 정책을 영리하게 수행했다. 그 정책은 철저히 자율성이라는 허구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램지 맥도날드와 제임스 H 토머스의 정당[영국 노동당]을 토머스와 앨버트 A 퍼슬의 노동조합[영국 노총 TUC]과 완전 별개로 취급하라고 가르쳤다. 퍼슬[영국 노총과 영·소 노조위원회 내의 대표적 좌파 인사]의 도움을 받아 토머스가 공산당 중간주의자들을 당나귀로 만들어 버리자, 그 당나귀들은 창피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게 됐다.

바로 얼마 전에만 해도 몽무소는 노동조합이 모든 정당과 정파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었다. 지금은 노동조합이 그저 정당의 그림자여야 한다며 노동조합을 종파로 만들고 싶어 한다! 현재의 몽무소, 즉 똥눈 몽무소는 누구인가? 바로 과거에는 오줌 눈 몽무소이다. 그는 창피해 몸 둘 바를 몰라 마치 장갑 안팎 뒤집듯이 홱 돌아누워 버렸다. 샹벨랑은 누구지? 그는 똥눈 몽무소에게 식겁하고 있지만 한때 오줌 눈 몽무소의 품에 안겨 있던 공산주의자였다.

이것이 한 종(種)의 두 변종 또는 한 혼동의 두 단계라는 점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가? 몽무소는 샹벨랑이라는 허깨비를 이용해 노동자들에게 겁주려 한다. 다른 한편, 샹벨랑은 몽무소라는 허깨비를 이용해 노동자들에게 겁주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둘은 각각 거울을 보며 주먹을 뻗고 있는 것일 뿐이다.

[ … ]

허깨비

공산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의 강령에 따라 단결한 노동계급의 전위이다. 그런 조직은 프랑스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의 일부 인자들과 파편들이 있을 뿐이다. 누군가 노동자들에게 그런 조직이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노동계급만으로 충분하다고, 노동계급이 이제 성숙해서 계급의 전위가 이끌지 않아도 된다고 감히 단언한다면, 그는 혁명가가 아니라 저급한 아첨꾼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품위를 지배자들에게 팔아넘기는 자이고, 감정적인 거짓 선동가이다. 현실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은 매우 심각하게 잘못된 짓이다. 노동자는 진실을 알아야 하고 진실을 사랑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만약 샹벨랑이 공산주의자들은 ‘중간’에 있다고, 즉 몽무소와 자신 사이에 있다고 본다면 그는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은 그 둘 모두의 위에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온갖 중간주의들의 위에 있고, 중간주의가 범하는 모든 오류의 위에 있다. 노동조합은 대중의 기관으로 변모될 수 있고, 진정으로 혁명적인 리더십을 제공받을 수 있다. 단, 이 문제들을 각각 철저히 살펴보는 노동계급 내 한 조류가 그런 리더십을 제공할 때만 그럴 수 있다. 그 조류는 계급과 계급의 혁명적 전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해가 뼛속 깊이 스며들어 있는 조류이다. 이 근본적 문제에서는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고, 짚고 넘어갈 여지도 전혀 없다.

그 어느 문제보다 바로 이 문제[당과 계급의 관계 문제]에서 명확성이 필요하다.

각주

1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는 사회민주당에서 이탈한 중간주의 인사들이 1917년 창당했다. 당원의 다수는 1920년 독일 공산당에 가입했다. 소수는 2.5인터내셔널에 가맹한 독자 단체로 있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 1922년 사회민주당에 재가입했다. 2.5인터내셔널(사회주의 정당 인터내셔널 협회)은 혁명적 대중의 압력에 떠밀려 제2인터내셔널에서 이탈한 중간주의 정당과 단체들이 1921년 2월 창립했다. 2.5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은 제2인터내셔널을 비판했지만 정치적 지향이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았다. 1923년 그들은 제2인터내셔널과 통합했다. [본문으로]

2 1906~14년 프랑스 신디컬리즘 운동에서 ‘독자성’은 의회주의적 기회주의와 단절하는 것을 뜻했다. 이런 이유로, 즉 선천적으로 프랑스의 혁명적 신디컬리즘은 정당을 설립했어도 온전히 발전하지 못했고, 결국 제1차세계대전 개전도 전에 쇠퇴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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