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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이 보여 준 여성해방의 가능성

1백 년 전 1917년 3월 8일(러시아 구력으로는 2월 23일), 세계 여성의 날에 러시아 페트로그라드 여성 노동자들이 2월 혁명을 촉발했다. 그들은 “빵을 달라”, “차르를 타도하자”, “전쟁을 중단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대표자를 선출해 지지 호소문을 들고 이웃 공장을 돌면서 파업에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여성들은 자신들을 진압하러 온 사병들에게, 상관의 명령에 불복해 발포를 멈추라고 설득했다. 수십만 명이 총파업에 들어갔고 많은 부대들이 노동자 편에 서기 시작했다. 결국 차르는 폐위됐다.

러시아 혁명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그는 여성의 정치 활동을 고무하고자 혁명 정부가 창설한 제노텔(여성부)의 의장으로 활동했다. 당시에는 남성 혁명가들도 회의 참석을 비롯해 제노텔의 과업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시됐다.

당시 러시아 여성들은 지위가 매우 낮았다.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매일 13~14시간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해고당하지 않으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임신 사실을 숨겼고 아이를 낳은 바로 다음 날에도 일을 나가곤 했다.

여성은 공공연히 남편과 아버지의 소유물로 취급됐다. 농촌 지역에서는 결혼식 날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에게 아내를 다스릴 채찍을 넘겨주는 것이 관습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온갖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1890년대 대파업과 1905년 혁명기, 1913∼14년 대규모 파업 등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1905년 혁명기에 여성 노동자들은 산전후 휴가와 수유시간 보장, 작업장 내 성희롱 금지 같은 요구들을 내세우며 투쟁했다.

제1차세계대전은 여성 노동자의 수를 빠르게 증가시켜 1917년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노동력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2월 혁명으로 차르가 폐위되고 자본가들의 임시정부와 노동자·농민들의 소비에트 체제가 공존하는 이원권력 상태가 지속됐다.

임시정부는 여성들의 삶과 고통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계속되는 전쟁과 경제 침체, 물가인상, 식량 부족 등으로 상황은 날로 악화했다. 식량을 구하려고 날마다 가게 앞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불만은 높아졌고 고용주들에 맞선 투쟁은 여성 노동자들을 급진화시켰다.

스스로를 조직하고 투쟁하면서 여성들은 천성적으로 수동적이고 후진적이라는 뿌리 깊은 편견에 맞서 저항했다. 볼셰비키는 이런 여성들의 투쟁을 지지·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지긋지긋한 전쟁을 지속하고 7월 노동자들의 시위와 폭동을 진압한 임시정부에 일관되게 맞서 싸웠다. 또 8월에 우익 장군 코르닐로프가 임시정부를 전복하려고 일으킨 쿠데타를 앞장서서 막았다. 자본가들에게 비타협적으로 반대하며 노동자들의 권력 장악을 이끈 볼셰비키의 활동은 수많은 노동자·농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마침내 10월에 소비에트는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여성 해방을 위한 급진적 조처들

10월 혁명으로 탄생한 노동자 국가는 급진적인 여성 해방 법령을 선포했다. 노동계급 혁명은 당시 어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성취한 적이 없는 여성 해방 조처들을 추진했다. 고용 평등과 동일임금, 여성들의 완전한 투표권을 보장했다. 당시 참정권이 모든 여성들에게 도입된 나라는 노르웨이와 핀란드밖에 없었다. 유급 출산휴가를 전면 도입하고, 작업장에서 모유 수유를 허용하고 3시간마다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혼을 간소화하고 세계 최초로 낙태를 합법화했다. 간통, 근친상간, 동성애 처벌 같은 억압적 법률을 폐지했다.

이런 법적 개혁은 여성 해방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실질적인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전통적 가족의 경제적 토대를 공격해야 했다. 상속권을 폐지하고 양육과 가사를 사회화했다. 1919∼20년에 페트로그라드 인구의 90퍼센트가 공공식당을 이용했고, 모스크바 인구의 40퍼센트가 공공주택에서 생활했다. 러시아 38개 지역에 공동탁아소가 세워졌다.

1917년~1920년 사이에 성에 관한 토론과 실험이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볼셰비키의 기관지 〈프라우다〉는 성에 관한 많은 기사와 편지를 싣었다. 성매매는 비범죄화되었고 거리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서 수 세대에 걸쳐 남녀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 주입된 여성 차별적 편견이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처럼 살아 있는 사람의 머리를 짓누른다.”

볼셰비키는 새로운 법률들을 현실화하고 여성들을 정치 활동에 참여시키기 위해 제노텔(여성부)를 만들었다. 레닌은 “여성의 적극적 참여가 없다면 혁명은 승리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제노텔 창설과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제노텔의 초대 의장은 이네사 아르망이었고, 그녀가 죽은 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이어받았다. 하지만 남성 혁명가들도 회의 참석을 비롯해 이 과업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시됐다.

제노텔은 낙후한 농촌을 포함해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의 새로운 권리를 알렸다. 여성 클럽을 만들고 정치 토론, 워크숍을 진행했다. 12만 5천 개가 넘는 문맹 퇴치 학교가 만들어졌다. 여성 독자를 겨냥한 간행물도 많이 발행했다.

이런 노력은 노동계급 여성들의 삶과 의식을 광범하게 변화시켰다. 1923년 후반에는 5만 8천 명의 여성들이 ‘여성 노동자·농민 대표자대회’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공공시설 건설을 조직하고 2∼3개월 동안 교육 과정에 참여한 뒤 민중법원에서 판사직도 수행했다.

혁명의 후퇴

안타깝게도 여성 해방을 향한 꿈은 지속되지 못했다.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에 의한 내전과 경제 붕괴로 여성 해방의 과제는 벽에 부딪혔다. 1918년 말~1920년 말에 돌림병과 굶주림, 추위로 9백만 명의 러시아인이 죽었다.(제1차세계대전으로 전 세계에서 죽은 사람이 4백만 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가피한 조처로 시장 경제를 일부 도입한 신경제정책(1921~1928년)을 폈다. 대부분 미숙련 노동자들이던 여성들이 실업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공공세탁소와 공공시설을 제공할 물질적 자원이 부족해졌다. 유럽, 특히 독일 혁명이 성공해 도움을 얻어야만 노동자 국가는 지속될 수 있었다.

많은 선진 노동계급이 내전에서 목숨을 잃었고 관료 세력을 대변하는 스탈린이 부상했다. 결정적으로 선진 자본주의 유럽 나라들에서 혁명이 실패하자 스탈린은 1928년 반혁명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혁명의 성과를 모조리 분쇄했다. 스탈린은 선진 자본주의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대대적인 산업화와 농업의 강제 집산화를 추진하면서 러시아를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바꿔 놓았다. 경쟁과 축적을 위한 목적에 여성의 필요도 종속됐다.

동일임금 대신 성과급 제도가 추진됐다. 가족의 신성함을 떠벌리면서 순결과 모성을 찬양했다. 아이를 많이 낳은 여성에게 메달을 수여하기도 했다. 낙태와 동성애는 불법화됐다. ‘성적 방종’, ‘성급하고 쉽게 하는 결혼’, ‘간통’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강력하게 벌어졌다. 제노텔은 1930년에 폐지됐고 수십 년 동안 성 평등 쟁점은 공식 논의에서 자취를 감췄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해방의 좌절이 남성 혁명가들의 무관심과 저항 때문이라고 말한다. 1928년 반혁명이 일어나기 전과 후의 성과 가족 정책을 연속선상에서 비판한다.

그러나 1917년 혁명 당시 볼셰비키는 당원의 90퍼센트가 남성이었지만 내전과 봉쇄의 엄혹한 상황에서도 급진적인 여성 해방 조처를 취했다. 1920년대의 성과 가족 정책이 혁명 직후 몇 년간의 정책보다 다소 후퇴하긴 했지만, 이는 당시 경제적 상황이 강요하는 불가피한 후퇴의 성격이 강했지 1930년대의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억압과는 차원이 달랐다.

러시아 혁명은 짧은 기간이지만 여성 해방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 그러나 선진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자 혁명이 실패해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면서 노동자 권력이 쇠퇴하고 무너지면서 여성 해방의 꿈도 좌절됐다.

오늘날 착취와 억압을 무너뜨릴 여성들의 잠재력은 더욱 커졌다. 1백 년 전 러시아보다 더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남성들과 함께 일하며 이 사회의 부를 창조하고 있다. 이들이 정부와 사장들에 맞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다면, 진정한 변화를 성취할 힘을 발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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