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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의 모호한 김대중 퇴진론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의 저자이자 〈민〉지 편집인인 박세길 씨는 전국연합 기관지 〈민〉지 5월 호에 실린 ‘김대중 정권에 대한 민족민주진영의 대응’이라는 글에서 김대중 퇴진 투쟁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박세길 씨는 정권 퇴진 투쟁이 전개되면서 "일정한 혼란"과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는 통일 운동가들에게, "노동현장과 투쟁현장에서 김대중 정권 퇴진 구호를 드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다."고 조언했다. 또, 사회변혁운동과 통일운동을 대립시킬 수 없듯이 "6·15남북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사업과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을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모순

박세길 씨는 "김대중 정권을 포함해서 친미예속정권을 반대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전략적 요구"라고 말한다. 동시에, "친미예속정권과의 협력의 여지를 완전하게 배제하는 것은 전술적 오류"라는 모순적인 주장도 편다. 김대중 퇴진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면서, 그와 동시에 김대중 정부와의 일시적 협력을 부정하는 것은 "좌경적 오류"라니 도대체 김대중 정부를 퇴진시키자는 것인지, 정부와 "협력을 모색"하자는 것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박세길 씨의 지적대로 "정권과의 협력을 과대평가함으로써 일상적이고 전략적인 것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정권과의 협력을 추구하는 것은 올바른 것일까?

전술적 유연함?

박세길 씨는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이 옳은 주장을 한다. "김대중 정권과 민중의 적대적 모순은 매우 명확하며 서로 화해하고 협력할 여지는 별로 없[다.]"

“노사정위의 경험이 말해 주듯이 정권과의 협력은 ‘포섭과 배제’라는 기만적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총이 정부와의 "일시적 협력을 모색"하지 않기 때문에 "전술적 유연함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김대중을 "활용"한다는 ‘전술’은 운동의 전진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발목을 잡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정책이다.

실제로, 지난 1년 간 진보진영의 상당 부분은 김대중을 전술적으로 활용한다는 비현실적인 생각 때문에 투쟁의 표적에서 김대중을 면제시켜 왔다. 김대중이 우리 운동을 탄압하는 당사자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지난 1년 간 일부 운동세력이 김대중에 맞선 투쟁을 자제해서 김대중이 우리 운동에게 유리하게 활용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김대중은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후에도 여전히 민족의 대다수인 노동자들의 삶을 파탄으로 내몰고 있고, 저항하는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고, 노조 활동가들을 구속하고 있다. 또, 김대중은 미군 주둔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고,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부시의 MD(미사일 방어) 계획도 반대하고 있지 않다. 이런 자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유연한 전술"이 아니라 자기 기만일 뿐이다.

대치전선

물론 김대중과 한나라당 사이에, 또는 김대중과 미국 정부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이나 마찰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대북 정책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제국주의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

그래서 박세길 씨가 김대중 정부를 ‘민족의 화해’를 추구하는 편으로 여겨 "일시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김대중은 자신의 계급적 기반 때문에 미국의 제국주의적 질서에 근본적으로 도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친미 이중대 구실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의 화해냐 대결이냐를 둘러싸고 대치전선이 확연"해졌다고 주장하는 것도 일면적이다.

화해 정책을 추구하다가도 국제 정세나 국내 정치의 영향 때문에 얼마든지 대결 정책으로 돌변할 수 있고, 그 반대로 대결 정책을 추구하다가도 특정 시기에는 화해 정책을 지지할 수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는 김영삼이고 후자의 예는 클린턴이라 할 수 있다.

김대중 퇴진 투쟁의 조건

박세길 씨는 현재 전개되고 있는 김대중 퇴진 투쟁이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에도 "1987년 6월 항쟁과 같은 광범위한 국민 대중의 지지와 동참"이 없기 때문에 실질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1987년 6월과 2001년 6월을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그 동안의 역사 발전을 무시하는 것이다.

1987년 6월 이전까지만 해도 중간계급 상층과 심지어 일부 자본가들까지도 군부독재에 의해 정치적으로 억압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오늘날 그들은 민주주의에 관심이 있기는커녕 노동자 운동을 억압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다.

한편, 노동자들은 1987년 7∼9월 대중파업 이후 지금까지 지속돼 온 운동을 통해서 계급적으로 각성됐고 민주노조로 조직됐다.

그래서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는 "광범위한 국민적 저항"은 더 분명해진 계급 투쟁으로 대체돼 왔다.

1997년 1월 민주노총이 지도한 대중 파업은 노동 계급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진일보시키는 주된 동력이자, 다른 피억압 민중을 주위에 결집시킬 수 있는 사회 세력이라는 점을 입증했다.

박세길 씨는 민주노총의 퇴진 투쟁이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며 폄하하고 있지만, 김대중 퇴진 투쟁을 벌이고 있는 민주노총이 이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한때 김대중 정권의 지지 기반이었던 시민단체들마저 "김대중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하는 셈이다.

박세길 씨는 "퇴진 이후에 뚜렷한 정치적 대안"이 없고 "확고한 전략이 제출되지 않"아 김대중 퇴진 투쟁이 "광범한 국민 대중의 동참을 이끌어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국민 대중은 정치적 대안이 뚜렷하고 투쟁 전략이 분명할 때 정권 퇴진 투쟁에 나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독재자 수하르토를 몰아냈던 1998년 5월 인도네시아 민중의 용맹스러웠던 항쟁이나 지난해 에콰도르의 하밀 마우아드와 유고의 밀로셰비치와 페루의 후지모리를 내쫓았던 경험은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확고한 투쟁 전략"이 노동 대중 속에 뿌리내리기 전에도 정권 퇴진 투쟁이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진정한 문제는 민주노총이 김대중을 퇴진시킬 수 있는 진정한 힘 ― 사장들의 이윤과 체제의 작동을 중단시킬 수 있는 노동자들의 대중 파업 ― 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이다.

지금처럼 김대중에 대한 지지율이 10퍼센트대로 떨어지고 갈수록 대중적 반감과 분노가 깊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민주노총이 대중 파업을 효과적으로 조직해 김대중 퇴진이 비현실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면 훨씬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일관성

박세길 씨는 진보진영의 일각이 김대중 퇴진 투쟁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잘못됐고 김대중 퇴진 투쟁에 지지를 보내야 한다고 올바른 태도를 취했다. 이것은 김대중 퇴진 투쟁에 대한 진일보한 태도다.

그러나 박세길 씨는 김대중 정부와 일시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는 포퓰리즘 정치 때문에 퇴진 투쟁을 일관되게 주장할 수 없다.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위해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정권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정권 퇴진 투쟁에 진지하게 임할 수 있겠는가.

박세길 씨가 퇴진 투쟁에 부정적인 "우편향"을 보이는 진보진영의 일각에 대해서 비판하면서도 정부와의 협력을 부정하는 민주노총을 "좌편향"이라고 비판한다면 어떻게 민주노총의 퇴진 투쟁에 대해 일관된 지지를 보낼 수 있겠는가.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의 대다수인 노동자·민중의 삶이 개선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민주노총의 김대중 퇴진 투쟁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또, 김대중에 대한 어떠한 미련이나 환상도 버려야 한다.

김대중 퇴진 투쟁이 가져올 진정한 성과

최일붕

적지 않은 사람들이 김대중 퇴진 투쟁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김대중 퇴진 이후의 대안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투쟁을 열심히 해도 성과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 더 이상 김대중에 기댈 것은 없지만 김대중 퇴진 투쟁이 자칫 한나라당 좋은 일만 시키는 게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지적대로 현재 김대중 퇴진 이후의 정치적 대안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김대중이 권좌에서 쫓겨나면 지배계급 내에서 더 개혁적인 것처럼 보이는 분파가 권력을 잡을 수도 있지만, 어부지리로 한나라당이 권력을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대중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한나라당이 재집권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김대중 퇴진 투쟁에 성공해 큰 자신감과 조직력을 갖춘 노동자들 앞에서 한나라당의 운신의 폭은 매우 좁을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은 과거처럼 권위주의적 방식에 의존해 노동자들을 제압하기를 희망할 테지만, 상대적 계급 세력이 여의치 않아 쉽사리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나라당은 노동자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곧 전임자의 운명처럼 퇴진 압력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사회 변화를 갈망하는 상당수 노동자들은 한나라당과 같은 퇴물들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에 이끌릴 수도 있다.

민주노동당이 내년 대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김대중 퇴진 투쟁에 적극 참여해 진정한 변화와 개혁의 열망을 대변해 싸운다면 민주노동당은 새로운 정치적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다. 비록 민주노동당이 곧바로 집권에 성공하지는 못할지라도 대중 투쟁의 물결 속에서 수만 당원을 보유하고 지금의 몇 갑절 득표하는 대중 정당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즉각적인 집권 가능성을 별문제로 하면, 지금과 같은 급진화 물결 속에서 김대중 퇴진 투쟁의 최대 수혜자는 민주노동당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한나라당 밑에서 갖은 억압과 수모를 당해 온 노동자들이 한나라당을 자신의 대안으로 여기겠는가? 또, 지난 3년 간 변화의 열망을 철저히 배신한 민주당을 대안으로 삼겠는가?

퇴진 투쟁이 가져올 진정한 성과

김대중 퇴진 이후에 곧바로 더 나은 대안적 정부가 세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퇴진 투쟁의 의미가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투쟁의 성과는 지배 계급의 즉각적 대응으로 측정할 수 없다.

퇴진 투쟁으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진정한 성과는 투쟁을 주도한 민주노총의 사회적 위상 강화와 조직력 증대, 그리고 무엇보다 투쟁 경험에 의해 발전하고 성장한 노동자들의 정치 의식과 조직일 것이다. 특히, 노동자들이 집단적 투쟁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과 투지를 높이게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성과가 될 것이다.

진정한 대중 파업을 통해 김대중을 퇴진시키는 것이 비현실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되면, 적지 않은 노동자와 학생 들은 운동이 더한층 성장하는 데에 필요한 수많은 정치적 쟁점에 대해서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사회 변혁 운동가들이 격렬한 계급 투쟁의 한복판에 효과적으로 개입해 의미 있는 역할을 한다면 사회 변혁 운동가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선진적인 노동자·학생 속에서 크게 확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