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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에 평화는 오는가?

팔레스타인에 평화는 오는가?

이정구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학살 만행은 날이 갈수록 정도를 더해 가고 있다. 지난해 9월 말 아리엘 샤론이 알 악사 사원을 방문한 뒤로 6백여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죽었고, 2만 5천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은 맨손과 돌멩이로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아파치 헬기와 미사일과 F16 전투기를 동원해 공격하고 있다.

 중동 사태가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 상황으로 치닫자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게 된 아랍 국가 지도자들은 이스라엘과의 정치 접촉 전면 중단을 선언했다.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이만 히조라는 넉 달바기 영아가 죽고 아랍인 어린이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는 등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일자 미국은 중립적인 체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렇게 해서 미국이 내놓은 안이 미첼 위원회 보고서다.

 미첼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폭력 중단과 신뢰 회복 그리고 평화 협상 재개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휴지 조각이 돼 가고 있다.

 지난 4월 말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휴전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군 당국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발표는 일종의 실수"라며 휴전 합의를 정면 부인했다.

 미첼 보고서는 신뢰 회복의 첫 단계로 정착촌 건설 중단을 이스라엘에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 권고조차 이스라엘은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샤론은 "오늘날 국민들은 이스라엘의 국토를 조금씩 넓혀 가는 데 별로 관심이 없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신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샤론은 정착촌 건설을 강행하기 위해 정착촌 건설 예산을 3억 8천만 달러로 증액하는 안을 각료회의에 상정하려 한다.

 지난 1993년 오슬로 협정 후에도 이스라엘은 정착촌 건설을 강행해 왔다. 그래서 1993∼2000년에 유대인 정착민들의 수는 27만 5천 명에서 4십만 명으로 늘어났다.

 미국의 후원을 받아 건국한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를 지키는 경비견 노릇을 해 왔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의 중동 정책은 차이가 거의 없었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보이는 과도함을 말로만 비난할 뿐 행동에서는 철저하게 이스라엘 편이었다. 1982년 레바논 침공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액은 오히려 늘어났다. 최근의 사태에 대해서도 미국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인 하마스의 테러 행위와 이를 단속하지 못하는 아라파트를 비난하고 있다.

 지난 5월 1일 이스라엘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는 중동 평화협상이 재개되기만 하면 이스라엘은 양보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몬 페레스는 1996년에 총리로 있을 당시 제2의 레바논 폭격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당시 그는 국제적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스라엘은 베이루트를 공격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시몬 페레스나 미국이 추진하려는 평화협상은 중동에 어떠한 평화도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협상과 회담이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민중의 삶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오슬로 협정

 유엔의 분할안에 기초하여 1948년 건국할 당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5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잔혹한 학살과 추방을 통해 팔레스타인들을 거주 지역에서 몰아내고는 자신의 영토를 넓혀 나갔다.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가자지구와 서안까지 장악해 점령했다. 이 때 이후로 점령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자치국가(또는 소국가) 방안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93년 오슬로에서 있었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협상과 그 이후의 '평화 과정' 때였다. 이스라엘이 오슬로 협정에 참여하게 됐던 이유 중 하나는 1987년의 인티파다(봉기)였다.

 이 봉기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무장 게릴라 투쟁을 통해 변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PLO를 완전히 절멸시키기 위해 1982년에는 PLO의 본부가 있는 베이루트를 폭격했다. 이 폭격으로 PLO는 본부를 튀니지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말이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967년 이래로 점령지로 변한 가자지구와 서안의 젊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체계적인 억압, 점령지에서 만연된 빈곤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다. 팔레스타인 청년들은 돌멩이와 화염병을 들고 탱크와 맞서 싸웠다.

 1987년의 인티파다로 인해 중동의 정치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시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고, PLO 지도부는 1988년 알제리에서 열린 팔레스타인민족회의에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인티파다는 이스라엘 사회에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비록 소수이긴 했지만 봉기에 대한 잔혹한 진압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대다수 자유주의자들과 좌파는 평화 운동과 인권 운동에 이끌렸다.

 이스라엘이 협상장에 나오도록 만든 주된 이유는 중동 지역의 세력 균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몰락하면서 중동 지역에서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 행세를 했다. 미국은 1991년 1∼2월 제2차 걸프전을 통해 아랍 국가들을 미국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조지 W 부시의 아버지)는 '신세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이집트와 시리아를 끌어들여 팔레스타인 문제를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다.

 협상의 다른 요인은 PLO가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해 줬다는 점이었다.

 1993년 9월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측 협상 참여자들은 '평화 과정'의 세부 항목들을 발표했다. 이 때부터 시작된 협상 기간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게 국가라는 상징적 의미만 양보했을 뿐 실제로는 점령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다.

 이스라엘 정부의 전략은 분명했다. 1993년 이래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에 정착촌을 만들려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이스라엘은 점령 지역을 완전히 분리시켜 하나의 고립된 지역으로 만들려 했다. 이스라엘 군대가 경호하는 정착촌과 도로를 통해 그 지역을 비옥한 땅과 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전략을 추구했다.

 이스라엘은 평화 협상 결과로 점령 지역을 A, B, C 지역으로 나누고, 팔레스타인 당국에는 A 지역(서안의 5퍼센트 미만의 지역과 가자지구의 60퍼센트)에 대한 통제만을 허용했다. B 지역이라 불리는 곳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동으로 통제하고 있으며, C 지역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의 자치가 이루어지는 두 지역조차 그 경계선을 이스라엘 병사들이 통제하고 있어 외부 세계와도 단절돼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 국가의 상황

 팔레스타인 자치 당국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엄청나다. 팔레스타인 자치 당국은 치솟는 실업과 만연한 빈곤 그리고 30년 동안 이스라엘 지배가 끼친 영향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경제를 물려받았다. 팔레스타인 자치 당국은 정치적 독립의 초석이 될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지만 현실은 이스라엘 경제에 종속돼 있는 상황이다.

 팔레스타인 중앙 통계국에 따르면, 자치 국가의 실업률은 21.5퍼센트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자치 국가와 이스라엘 사이의 실업률 격차는 크게 벌어져 있다. 1995년 유엔이 발표한 수치를 보면, 팔레스타인 자치 국가의 1인당 GDP는 1천6백92달러인 데 반해 이스라엘은 1만 5천6백 달러다. 평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빈곤 상황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국경 봉쇄를 이용하여 체계적으로 팔레스타인 경제를 허물어뜨리고 있다. 1967∼1993년에 자치 지구를 출입하는 것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하지만 1993년 3월부터 이스라엘이나 동예루살렘에 들어가려는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통행 허가증을 요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1993년 이래로 더욱 빈번하게 점령 지구를 봉쇄했다. 이러한 봉쇄가 팔레스타인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었다.

 평화 협상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점령자로서의 지위가 보장됐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전반적인 안전 책임과 함께 외부의 위협에 대한 방어 책임을 지니는 것이 보장됐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대는 점령 지역을 둘러싸고 있을 뿐 아니라 정착촌에 있는 이스라엘인들의 안전을 위해 서안 지역 어디에든 들어갈 수 있었다. 1997년 미국 국무부의 한 보고서는 점령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인권을 침해하는 많은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 이스라엘 병사들은 테러리스트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평범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괴롭힘, 고문, 심지어 초법적인 처벌까지 행하고 있다.

진정한 대안

 기만적인 1993년 오슬로 평화 협상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는 팔레스타인 자치 당국으로 향했다. 사실, 1967년에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서안을 완전히 점령한 일은 그 뒤 팔레스타인인들의 봉기를 촉발하는 계기가 돼, 이득보다는 손실이 더 컸다.

 평화 협상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게 자치 국가라는 명분만을 제공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평화 협상 동안 점령 지역에 대한 외부 통제, 서안의 수자원과 여타 천연 자원의 무제한적 이용, 팔레스타인 경제와 노동력을 이스라엘의 필요에 종속시키는 것 등을 추구했다. 이것은 '평화'라는 말이 전쟁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냉혹하게 보여 주었다.

 PLO 의장인 아라파트는 오슬로 협상 이후 계속하여 지도력의 위기를 겪고 있다. 사실, 현재 아라파트가 겪고 있는 위기는 1960년대 이래로 아라파트가 추구해 온 전략의 위기다. PLO는 애당초 민족해방을 위해 무장 게릴라 투쟁을 추구했다. 하지만 1967년 '6일 전쟁'에서의 군사적 패배와 1970년 9월 요르단에서 벌어진 팔레스타인인들의 봉기 실패로 무장 게릴라 전략은 폐기되고 미국과 타협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1970년대부터 PLO가 추구한 타협의 길은 자체의 논리적 결과였다. PLO는 게릴라 투쟁과 아랍 국가 지도자에 대한 의존을 통해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런 전략은 제국주의 강대국에 대한 의존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팔레스타인 자치 국가 방안을 제안하자 PLO 지도자들이 그 방안을 받아들인 것은 놀라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PLO가 미국과의 협상에 의존하면서 민족 해방에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랍의 다른 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와 마찬가지다. 지난해 10월 카이로의 대중 시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구호 중 하나는 '군인은 도대체 뭘 하나? 우리는 전쟁을 원한다'였다.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항하여 투쟁 의지를 보이고 있는 아랍 민중은 제국주의에 타협적인 무바라크와 아랍 지도자들에 대한 불만이 많다. 아랍 지도자들은 제국주의와 타협하면서 부유해졌지만, 평범한 아랍인의 삶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압도 다수 아랍 민중은 낮은 임금, 높은 물가, 실업, 민영화, 그리고 보건 및 교육 기회의 결여로 고통받고 있다.

 아랍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민족 해방의 과제가 해결되지 못하면서 헤즈볼라나 지하드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지지를 얻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에서도 이슬람 운동인 하마스가 PLO에 대한 급진적 대안으로 비쳐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알제리 이슬람 정부가 보여 온 모습은 이슬람 세력이 팔레스타인 대다수 민중에게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이들 나라 모두에서 이슬람 정부는 '이슬람의 번영과 협력의 새 시대'를 열기보다는 복지 삭감, 일자리 감소, 경기침체를 겪게 했다. 하지만 평범한 이스라엘인들을 아무나 테러하는 하마스의 자살 테러 방식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대안은 될 수 없다.

 아라파트는 경찰(특히 보안 경찰)의 강화, 관료주의 그리고 거리 곳곳마다 자신의 사진을 걸어 놓는 등 중동의 다른 지도자들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IMF의 기금과 맥도날드를 들이고,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민영화를 추진했다. 아라파트는 이츠하크 라빈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에 평화는 오지 않았다. 또, 아라파트는 자치 지구에 대한 자치권을 획득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아랍 지역 전체에서 변화의 희망은 제국주의 세력과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아랍의 부패한 모든 정권들도 뒤흔들 수 있는, 수백만의 평범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다른 종류의 운동을 건설하는 데 있다. 2000년 10월부터 시작된 인티파다에서 보인 가장 희망적인 징조 중의 하나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연대를 보내는 항의와 시위들이 아랍 지역에서 등장했다는 점이다.

 평화 협상 과정은 제국주의에 저항하지 않고 양보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잘 보여 주었다.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고, 민주적이고 세속(비종교)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일은 가자나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자치 국가의 민중들만의 투쟁이 아니라 이집트와 이라크와 레바논 등 아랍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 투쟁은 팔레스타인 자치 당국과 하마스의 자살 테러가 아닌 진정한 대안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미국에 반대하는 아랍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 나아가 아랍 전역의 부패한 정권들을 무너뜨리고 사회의 근본적 변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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