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예멘 난민 한국어 교육 봉사 경험:
난민을 향한 날 선 두려움을 거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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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난민 이슈가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나는 서울에 있었다. 논쟁의 중심인 제주도가 내 고향이라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닷새만에 청와대 청원 인원이 20만 명을 돌파하고,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 악의적인 비방과 가짜뉴스를 목격하면서부터였다. 70~80여 년 전만 해도 정치적 박해와 전쟁으로 수많은 난민을 낳았던 이 땅에서 500여 명 남짓한 예멘 난민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나 일자리 도둑, 혹은 잠재적 성폭행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우익 포퓰리스트들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들의 ‘위험한 난민’ 프레임에 맞서면서 내 속에서는 한 가지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언론 보도나 편견에 가려진 난민들의 진짜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 제 나름의 속셈을 갖고 입국한 ‘가짜’ 난민이든 마땅히 동정받아야 하는 참혹한 전쟁의 희생자이든 간에, 매체를 통해 비춰지는 모습은 이면의 그것과 다르진 않을까? 그런 고민을 하던 차에 방학을 맞았고, 제주도로 내려가게 된 나는 이참에 확실한 답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어 교육 봉사를 시작하다
맑시즘2018 행사 준비, 캠프 등으로 정신없던 7월의 막바지 무렵, 드디어 처음으로 예멘인들과 마주할 기회가 찾아 왔다. 8월 중순부터 고기잡이배를 탈 예멘인이 셋 있는데, 작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출항하기 전까지 한국어를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예멘 난민들을 가까이서 만나볼 기회라고 생각한 나는 망설임 없이 봉사자로 이름을 올렸다.
덜컥 지원하긴 했지만, 막상 한국어를 외국인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예멘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도 잘 알지 못했던 나로선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조차 잡기 어려웠다. 해외봉사를 통해 아랍 문화에 익숙하신 베테랑 선생님이 요령 따위를 이것저것 일러주셨지만, 온갖 걱정이 눈앞을 가리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느새 시간은 지나 수업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수업은 동네 천주교 성당에 딸린 건물을 빌려서 하기로 했다. 그런대로 구색은 갖춘 작은 교실에서 우리는 첫 만남을 가졌다.
내가 가르치게 된 사람들은 20대 청년 둘,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이었다. 교재는 아랍어권 학습자를 위한 것이었지만 수업은 영어로 진행했다. 내가 영어로 교재 내용을 설명하면 그들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청년이 그걸 아랍어로 통역해 주는 식이었다. 때문에 속도는 더뎠지만, 모두 열의를 갖고 임했기 때문에 수업 자체는 굉장히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어느덧 끝날 시간이 되어 밖은 어둑해져 있었다. 함께 교실을 나와 이만 헤어지려고 발걸음을 떼려는데 수업 내내 통역을 자청했던 청년이 자기네 숙소를 들렀다 가 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을 꺼냈다.
그날 처음 본 사람을 스스럼없이 초대한다는 게 의아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후 일정은 비어 있었던지라 그러자고 하고 따라나섰다. 숙소는 포구 근처에 있었다.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로 2층을 선원들 숙소로 제법 깔끔하게 꾸민 모양이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나를 초대한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성당에서 함께 왔던 나머지 둘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나를 대접하기 위해 얼마 안 되는 돈을 모아 과자와 음료수를 사러 나갔다 온 것이었다. 정말이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기껏해야 한두 시간 전에 만난 나를 위해 이렇게 친절을 베풀 줄이야! 그들은 숙소에서 함께 지내는 선원들에게도 이 작은 성의를 나누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두 시간 정도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예멘이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지, 어떤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 내게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세 명 모두 가족을 고국에 둔 채 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리움을 견디는 게 가장 힘들어 보였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이들이 왜 나를 초대했는지 깨달았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땅에서 자기들 말을 들어줄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예멘인들도 안다. 자신들이 이 나라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행여 장이라도 보려고 외출하면 따가운 시선에 시달려야 한다. 일터에서는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인데도 서투르다고 구박받는다. 살고자 도망쳐 온 것이 곧 죄가 될 따름이다. 그들이 얼마나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있을지 나로서는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그날 이후 2주가량의 수업은 내게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가끔 수업이 없는 날 연락해서 같이 요리해 먹자고 권하기도 했고, 일터에서 들었다는 표현을 물어보면서(가장 많이 들었다는 말은 ‘빨리빨리’였다) 함께 깔깔대기도 했다. 대화 이외에도 우린 많은 것을 주고받았다. 특히나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게 베풀어 준 것은 단순한 인정 이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 번째 봉사
내 첫 봉사 기간이 끝날 때쯤 한국어 교육에 대해 내가 가졌던 막연한 걱정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 자리는 나름의 자신감과 여유가 메꾸고 있었다. 아직 방학이 남아 아쉬워하던 나는 다행히 곧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교회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지내던 6명의 청년들이었다. 아직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직장을 구하는 것이었고 더욱 열성적으로 수업에 임했다.
적어도 교실이라 부를 만한 것은 갖추었던 성당에 비해 이곳 환경은 열악했다. 예멘 난민들이 지나가던 여중생을 대상으로 음담패설을 지껄였다는 루머가 퍼진 적이 있을 정도로 인식이 좋지 않아 따로 수업을 위한 장소로 이동할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이 지내던 숙소에서 수업을 진행했는데, 책상이나 의자조차 없어 바닥에 앉아야 했다. 그나마 있는 것이라고는 근처 문방구(사실은 그마저도 차로 30분 떨어진 거리에 있는)에서 공수해 온 칠판뿐이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조차도 6명의 난민 청년들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내 첫 학생들보다도 빠른 속도로 가르치는 내용을 습득해 나갔다. 두 번째 봉사는 다른 선생님이 수업을 할 수 없는 날에 내가 대신 들어갔던 식이라 첫 번째만큼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보인 열의는 인상적이었다.
특히나 한 청년이 기억에 남는다. 이번에도 내 수업은 영어로 된 내 설명을 아랍어로 중역하는 방식이었는데, 그 역할을 맡았던 청년은 다른 난민들에 견줘 영어가 꽤 유창한 편이었다. 알고 보니 말레이시아에서 토목공학과 2학년까지 마치고 넘어온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직장을 구하고 싶어했지만, 제주에서는 밭일을 거들거나 식당에서 일하는 것 외에는 적당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아까울 노릇이었다. 난민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주는 일자리를 무조건 감지덕지하고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물론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지만 직업 선택의 자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가 아닌가? 난민은 노예가 아니다. 그들도 마땅히 자신의 경력, 기술 따위를 살려서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이조차 난민들에게 보장해 주지 못하는 지금의 현실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뒤틀린 위선을 보여 줄 뿐이다.
제주에서 예멘 난민들의 삶
한 번은 다른 봉사자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좀 [봉사를] 덜 하면 정부가 나서려나?”
아닌 게 아니라 그만큼 정부가 제공하는 실질적인 지원이 미비했다. 한 달여 간 한국어 교육 봉사를 진행하면서 지켜본 결과, 난민들을 위한 지원은 대부분 민간에 떠맡겨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예멘 난민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숙식을 해결하는 것이다. 난민들은 대개 교회나 연대체 측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머문다. 하지만 모두를 수용할 여력이 되지 않기에 호텔 등 숙박업소의 배려를 받아 싼 가격에 방을 얻기도 한다. 일자리를 구한 사람들은 그쪽에서 제공해 주는 숙소로 옮기기도 한다. 주거 면에서 도나 중앙정부의 지원은 사실상 전무한 셈이다.
몇 가구 되지 않지만 어린 아이가 딸린 가족이 함께 넘어온 경우도 있었다. 특히 초등교육의 대상이 되는 아이들에게는 국제난민협약 22조에 의거해 자국민과 동등한 수준의 대우를 해야 한다. 1993년부터 난민협약을 시행해 온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도교육청은 대책 마련에 ‘나몰라라’ 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때문에 이 아이들을 맡아 가르치는 것도 온전히 자원봉사자들의 몫이 되었다. 전교조 사무실을 빌려 한국인 자원봉사자들이 예체능, 놀이치료를 포함한 교육을 제공한다. 하지만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인력이 없다시피 해 모든 수업은 한국어로 진행된다. 교사들과 아이들의 소통에도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서울 이슬람 커뮤니티에 있는 아랍어 학교에 다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교육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을뿐더러, 지속적으로 학교에 다니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출도제한 조처가 풀리지 않는 이상, 이들에게는 마땅한 수가 없다.
난민 차별에 반대한다
9월이면 예멘인들에 대한 난민 심사가 완료된다. 8월 초 법무부가 심사를 더욱 엄격히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듯이 우익과 타협한 문재인 정부 하에서 당장 의미 있는 성과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 누구보다 이 심사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예멘 난민들은 어떤 심정일까. 한 난민은 인터뷰에서 난민 인정이 거부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되면 바다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사실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누구보다 절박한 것은 예멘 난민 당사자들이다. 그들에게 한국 이외에 남아 있는 선택지라곤 폭탄이 빗발치는 고국 땅 아니면 바다에 몸을 던지는 길뿐이다.
내가 만난 예멘 난민들은 저마다의 아픔을 끌어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다만 살기 위해서, 혹은 죽이지 않기 위해서 한국으로 온 것뿐이다. 그런 사람들을 범죄자로 몰거나 질이 안 좋은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안감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피할 수만 있었다면 그 누구보다도 이 상황을 피하려 했을 사람들은 바로 그들 난민이다. 아무도 난민이 되고 싶지 않았고 고향을 떠나오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들을 겨냥한 날 선 두려움을 거두고 반(反)난민 주장에 맞서 싸워야 한다.
최근 이집트에서 온 정치 난민 자이드 씨를 비롯해 여러 난민 동지들이 단식 투쟁을 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근 몇 년간 한국 정부는 엉터리 난민 심사로 이들을 기만하고, 갖은 핑계를 대며 난민 인정을 지연해 왔다. 결국 이들을 길바닥으로 내몬 것은 우익의 난민혐오 주장에 굴복한 문재인 정부다.
난민들은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우익과 문재인 정부의 난민혐오에 대항해 그 권리를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번 주 일요일 난민혐오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린다. 한국에 온 모든 난민들에게 지지와 연대를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