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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사람, 장소, 환대》 서평:
노동자의 자리와 환대에 대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 칸트는 인간에 대한 질문에 앞서 우리는 무엇을 인식하고, 무엇을 행해야하고, 무엇을 희망하는가에 대해 질문했다. 결론적으로 칸트는 인간을 ‘이성’을 가진 존재로 본다. 이성적 인간은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자신만의 목적이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또 인간의 이성은 도덕 가치를 시행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이성이 인간을 도덕적 인간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게 함을 의미한다.

칸트의 인간에 대한 설명이 인간의 ‘존재’에 대한 것이라면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에서는 인간과 사람을 구분하여 좀 더 사회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다. 김현경은 인간이 한 도덕적 공동체에서 성원권을 가지면 비로소 사람이 된다고 한다. 결국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어떤 인간에게 공동체 안에 ‘자리’가 마련되고, 또 공동체의 성원들로부터 ‘환대’를 받아 공동체에서 성원권을 인정받으면 그때서야 인간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인간도 공동체를 벗어나 성원권이 박탈당한 상태에서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책에서는 그 예를 태아와 군인, 노예 통해 보여 주었다.

인간과 구분된 사람은 무엇이고 또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저자의 인류학적 고찰은 매우 흥미롭다. 사람이란 단순 존재로만 정의될 수 없으며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고 인정받는 존재라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와 이어져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사회 속에 있지만 사회 속에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앞서 이야기한 태아, 군인, 사형수, 노예와 같이 인간일 수 있지만 사람이 아닌 것들은 결국 사회의 외부에 있는 존재와 같다. 출생 이전의 태아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이고, 군인은 전쟁터에서 사람이라기보단 하나의 전쟁 수단이다. 인간이지만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가장 명확한 예는 노예이다. 노예는 인간이지만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사회에서 배제됐고, 자유는 억압당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종의 생각하는 물건정도의 취급을 당했다. 군인도, 노예도 생각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고 도덕 가치를 시행할 수 있는 인간일 수는 있지만 공동체에서 자리를 부여받지 못하고 환대받지 못해 소모되는 존재이다.

저자는 사람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와 환대, 또 그 각각이 가지고 있는 하위요소들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이슈들을 끌어온다. 억압돼 왔던 여성의 권리나 난민을 포함한 외국인의 문제, 사형수에 대한 사형이 정당한지, 낙인 찍힌 장애인들이 그것이다. 특히 저자는 신분과 배제, 모욕에 대해 설명하며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필자는 본 서평을 통해 사람으로서 충분히 환대받지 못하는 이들 중 노동자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환대라는 것이 인간이 사람이 될 수 있는 필수적인 요소이고, 환대는 조건 없이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충분한 환대를 받지는 못했다. 계급 사회에서는 하층민들과 노예가 그랬고, 흑인들이 그랬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즘 아래에서 고통받았던 유태인들은 정해진 시간에만 나올 수 있었고, 유태인이라는 표식(노란 별)을 해야 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제 치하에 우리 국민들은 우리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어느 곳에서도 충분한 환대를 받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희생당해야 했고 그들은 사실 사람으로서의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 우리 사회는 사회에 속한 인간들이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한 수많은 인정투쟁을 통해 점차 넓어졌다. 인정투쟁은 때론 혁명의 이름으로, 때론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됐다.

계급 제도가 폐지되고 노예가 해방되고 또 수많은 나라들이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면서 많은 이들이 사회 속으로 들어왔다. 공식적으로는 우린 차별 없이 자유로운 사회 속에서 모두가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구조가 만들어 낸 계층은 여전히 누군가를 사회 밖으로 밀어내고 충분히 환대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 시대의 노동자가 그렇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들은 늘 계급 아래 있었고 자본 아래 이용되고 소모됐다.

1차 산업혁명과 2차 산업혁명을 거치며 인류는 거대한 발전을 거듭한다. 증기기관의 발전으로 공장은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됐고, 전기의 발명은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며 철도, 통신, 화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발전과 시장과 기업 규모의 증가를 불러왔다. 산업의 발전은 인류의 발전을 불러왔지만 시장에서의 노동자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기계와 같은 도구에 불과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바로 테일러리즘(Taylorism), 포디즘(Fodism), 그리고 과학적 관리이론이다. 이들 개념에서 노동자는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사람 이전에 인간이라는 존재조차도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경영자들은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생산을 위해 장소와 사람을 통제하고자 했다. 노동자들은 철저히 계산된 장소에서 계산된 일들을 해야 했다. 과학적 관리의 미명 아래 일을 하던 노동자의 모습은 영화 모던타임즈(Modern Times)의 찰리 채플린의 연기로 희화화됐다. 영화 속 찰리 채플린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단순 반복 작업을 하는데 무언가를 조이는 작업이 습관이 된 그는 생활의 어려움을 겪는다. 공장의 톱니에서 도는 그의 모습은 통해 찰리 채플린은 노동자들이 기계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노동자는 사회의 성원이라기보단 공장의 기계와 같았고, 여느 부품처럼 소모되었다. 노동자의 모습은 전쟁터에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죽여지는 군인과 같았다.

저자가 김준(2004, 2006)의 연구를 인용하여 제시한 한국의 사례를 보면 노동자에 대한 신분적 차별은 더욱 분명하다. 앞선 테일러리즘과 포디즘에서는 비인간적 노동처우에 대한 불합리가 나타났다면, 1974년 현대조선노동자 투쟁에는 또 다른 노동자의 문제를 확인하게 한다. 1970년대 일어난 최대 규모의 폭동이라는 1974년 현대조선노동자 투쟁당시 노동자들이 분노한 것은 단순 열악한 작업 환경과 저임금뿐만 아니라 사원과 기능공 간의 신분적 차이에도 집중됐다. 안전모와 복장, 명찰 등에서 그들은 차별을 경험했고, 밥을 먹고 머리를 자를 때도 차별을 당했다.

앞선 20세기 산업현장에서 비인격적 처우는 현대에 들어서는 다시 노동자 간의 신분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저자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1987년 현대중공업 파업에서 ‘두발자유화’와 ‘복장자율화’가 제창됐음을 서술하며 이들의 모욕에 대해 설명했다. 1974년과 1987년까지 가지 앉아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수많은 노동자 간 차별과 노동신분, 계급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해도 대학의 교수들은 학생들의 존경과 때론 의전을 받으며 일하지만 대학 한 켠의 청소 노동자, 경비원들은 인원 감축에 부담을 느껴야 하고 좁고 열악한 공간에서 휴식을 해야 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이 교육의 수준과 노동의 형태와는 별개로 무조건적 공동체에서의 무조건적 환대로 이루어져야함이 상식 같지만 현실은 모든 노동자가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환대를 받고 있지는 않으며 신분 차별과 굴욕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과거부터 이어온 노동자에 대한 모욕이 왜 사람이 되는 것에서 중요한가를 알기 위해서는 책의 3장 사람의 개념에서의 ‘수행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고프먼의 인용에 의하면 사람은 어떤 역할이나 성격을 연기함으로써 완성된다고 한다. 사람은 주체성이라는 얼굴 위에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가면을 쓰고 있다. 가면 뒤에 얼굴은 신성하고 명예로운 것이다. 고프먼은 서로간의 얼굴을 인정하고 서로의 얼굴을 잃지 않기 위해 인정하는 상호작용 의례를 행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자본의 적고 많음에 관계 없이 모든 구성원들이 평등하게 실시돼야 한다. 그 사람의 가면이 무엇이든 상관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모욕은 명예에 대한 공격이다. 그에 반해 상호작용 의례는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며 이는 공동체에서 그의 성원권을 인정하는 의미이다. 누군가를 낙인시키고 판단하고 하대하는 것은 그 사람의 얼굴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은 사회 속에서 서로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상호작용 의례를 행해야 하지만 계급과 구조는 그것을 방해한다.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는 사람이 되려는 사람을 지지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갖지만 때로는 그것은 부정당한다.

저자는 모욕의 역설에 대해서 설명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 속에서 모욕을 당하는 이의 동의까지 요구한다. 이 속에는 신분적 차별이 있다. 신분적 차별 속에서 모욕을 당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모욕과 차별을 인정해야 한다. 그 모욕을 받아들인다는 조건으로 사회 안에 머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욕이 이들이 성원권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고 이들은 계속해서 불평등 속에 살아가게 된다. 상호의례를 통해 인격을 존중받아 성원권을 인정받는 것과 신분적 차별에서 모욕을 강요받으며 인정받는 성원권은 큰 차이다. 최근 한국 웹하드 사이트 1위에 빛나는 위디스크의 회장 양진호가 부하직원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동영상이 퍼지며 화제가 됐다. 부하직원은 무릎을 꿇었고 양진호는 직원에게 욕을 하고 뺨을 때렸다. 주위에는 다른 직원들이 있었지만 말리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 순간 폭행을 당하던 직원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인격은 무참히 밟혔다.

각종 계급 제도와 인종차별이 인정투쟁을 통해 투쟁의 주인공들을 사회 속으로 포함시키며 점차 사라질 때 모욕과 굴욕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자본주의는 엄청난 호황을 맞이했다. 그러나 1970년대의 석유파동은 자본주의의 쇠퇴를 이끌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속에서 미국에서는 레이건 정부가, 영국에서는 대처 정부가 정권을 잡았고 자유로운 시장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됐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안정적이지 못한 노동시장이 형성되고 비정규직들이 쏟아졌다. 노동의 힘은 약화됐고, 기업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많은 이들이 문자 한 통으로 해고를 통보받았다. 저자의 서술대로 신자유주의는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들의 교섭력을 약화시키며 신분주의를 확산시켰다. 노조가 없는 비정규직자가 해고 시 갈 데가 없다면 상사가 부당한 요구를 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모욕의 역설이다.

신자유주의의 도래가 이전에 있어 왔던 노동자들의 신분주의를 확산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노동시장을 이원화시키기까지 했다. 이원화된 노동시장 속에서 열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시장 이행에 어려움을 겪고 계속해서 열악한 노동시장에 머물게 된다. 이렇게 차별은 고착화되고 신분은 더욱 굳어진다.

신자유주의의 파동과 한국 조선업 및 제조업 시장의 쇠퇴는 마침내 재난적 상황을 불러왔다. 이랜드 대량해고부터, 쌍용차 사태, 조선소 대량해고, GM 대우 대량해고까지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가 언제든 모욕당하고 굴욕당할 수 있게 만들었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 희생양이 됐다. 기업의 생존을 위해 노동자들은 잉여부품처럼 버려졌고,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하며 투쟁했다. 구조가 낳은 신분과 차별, 그리고 그 속에서 ‘처분’된 사람들은 자살을 하기도 했고, PTSD로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사람이 되기 위해선 공동체가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환대해야 한다면, 노동자들에게는 일자리도 없었고 사람으로서 제공받아야 할 자리도 없었다. 그들은 구조 속에서 모욕을 당했고 내버려졌다. 해고 노동자들이 일하던 기업이나 국가나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하고 자리를 제공해 주지 못했다.

노예는 해방됐고, 일제의 지배에서도 독립을 했다. 또 과거 신분제도 역시 폐지됐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계급이 존재한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일을 한다는 이유로 노동자의 처우는 달라진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해도 정규직이 있고 비정규직이 있다. 같은 사람이라도 먼저 해고당하는 사람이 있고, 폭력에 굴복하고 맞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쫓겨나지 않으려면 굴욕을 참아야 하고 자신의 인격이 모독돼도 견뎌야 한다. 노동시장에서의 신분주의와 차별, 신자유주의 등 우리 사회의 구조는 모든 이들이 보장받아야 할 성원권에 조건을 달아 두었다. 그리고 때론 재난을 불러오기도 했다.

공동체가 구성원들을 사람으로 충분히 환대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그 공동체의 유지 가능성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인구절벽을 목도하는 한국의 상황은 결국 노동시장과 신분의 양극화, 공동체에서 충분히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불안과 좌절은 아닐까? 안정적인 직장과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돼 있다면, ‘내 아이에게 이런 사회를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구조를 내버려두고 시행하는 저출산 정책은 사실상 계급 사회의 저변에 깔릴 인력을 위한 것은 아닌가? 중요한 것은 사실 아동수당 얼마 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변화가 아닐까? 계급 이동이 지금보다 자유롭고, 아니 계급과 상관 없이 모든 국민이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장소가 제공되고 무조건적 환대가 이루어진다면, 즉 출산이라는 것이 단순 노동 재생산의 개념의 넘어서 사람이 사람을 낳는 것의 의미가 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부모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칸트나 데카르트의 생각으로도 충분하다. 이제는 인간은 어떻게 사람이 되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투쟁을 통해 성원권을 부여받았고, 지금의 사회는 도덕적 공동체로서 모든 이들을 사람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명명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구조는 누군가를 충분히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를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라고 했다. 모든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사람이 되고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또 자신에 대한 정의는 자신만 내릴 수 있다. 환대는 복수를 하지도, 보답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 신성한 인격을 타고났으며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또한 저자는 절대적 자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절대적 환대가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알고 인정하는 것,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에서 뺏길 수 없는 자리와 장소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런 환대와 그런 장소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

저자는 절대적 환대와 절대적 장소는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공공의 노력을 통해 실현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으로 인해 여전히 계급과 신분에서 모욕당하는 노동자들에게 자리와 환대를 통해 온전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도 공공의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노동자에게 그들의 노동 가치를 따져 묻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복수하지 않으며 그들의 얼굴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 그리고 노동자에게 절대적 환대와 절대적 장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 모두가 완전한 사람으로 기능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