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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인종차별철폐회의 - 인종차별주의를 말하는 것조차 거부한 미국

유엔 인종차별철폐회의

인종차별주의를 말하는 것조차 거부한 미국

  이정구

 지난 8월 31일에서 9월 7일까지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유엔 인종차별 철폐회의는 미국 대표의 회의장 철수로 파행을 거듭했다.

 미국은 이 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노예 무역과 시온주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반대해 회의에 불참하겠다고 위협해 왔다. 국제적 압력 때문에 마지못해 참여하긴 했지만 미국은 대회 선언문 초안에 시온주의가 인종차별에 바탕한다는 내용이 들어가자 회의를 보이코트했다.

 선언문 초안에 이스라엘의 점령 지역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대우를 "새로운 형태의 인종차별"이며 "반인륜적 범죄 행위"라고 표현하는 구절이 들어가자 미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미국 대표단을 철수시켰다.

 미국은 1978년과 1983년 회의 때도 시온주의가 의제로 오르자 회의에 불참한 전력이 있다.

 미국이 시온주의 문제가 거론되는 것에 강력 반발한 것은, 중동의 석유를 지키는 미국의 경비견 이스라엘이 비난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에 대한 히스테리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지난 해 9월 팔레스타인인들의 인티파다(봉기) 이래로 6백50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였다. 이스라엘은 오슬로 평화협정을 제멋대로 무시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인물들을 암살하는 것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을 아직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은 이스라엘에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아낌없이 보내고 있다.

자본주의 과거 청산

 노예 무역에 대한 공식 사과와 보상 문제가 쟁점이 되자 미국은 노예 무역을 다루는 것조차 거부했다. 미국의 거부 때문에 아프리카 국가들은 서방 열강에 대한 보상 요구를 철회하고 "노예 무역에 대한 공식 사과" 선으로 요구 수준을 낮췄다.

 그렇지만 미국은 이 양보조차 외면했다. 노예 무역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면 회의를 철수하겠다고 협박했다. 미국 지배자들은 노예제 문제가 논의되면 5백년 동안 식민지로 지배해 온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가한 끔찍한 억압의 역사가 불거져 나올까 봐 두려워 했다.

 물론 노예제를 비난하는 성명서가 통과되긴 했지만 이 성명서는 실제 효력이 없다. 1975년 유엔 총회는 시온주의가 인종차별이라고 규정했지만 그 뒤 팔레스타인인들의 처지가 나아지지도 이스라엘의 잔혹한 행동들이 줄어들지도 않았다.

 자본주의 초기 노예 무역을 통해 부를 끌어 모았던 서방 열강은 노예 무역이 유감스런 일이라고 말하지만 노예의 후손들에 대한 공식 사과나 보상에는 반대했다. 가장 전향적 표현을 한 독일의 외무장관 요슈카 피셔조차 법적인 책임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지닌 '사죄'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지배 열강은 노예제를 인정할 때 뒤따를 막대한 보상 요구와 감추고 싶은 추악한 제국주의 과거사의 폭로를 두려워했다.

 인종차별주의와 자본주의 탄생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 1천2백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들이 카리브해와 미국의 플랜테이션으로 강제로 끌려 왔다. 그들은 가축처럼 매매되고 납치되며 분실되고 카드놀이에서 판돈으로 걸리기도 했다. 노예 무역 덕분에 유럽 자본가들은 수중에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예컨대 영국 최대의 시중 은행인 바클레이스 콘체른은 노예 무역과 플랜테이션에서 뽑은 이윤으로 자본금의 기초를 마련했다.

 아프리카 전 대륙은 건장한 성인들이 유럽 열강에게 잡혀간 뒤로 잔혹한 식민 지배를 받아 왔다.

 노예제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1960년대 이래 도입된 이른바 경제 발전 정책들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 참혹한 빈곤과 거대한 부채만을 아프리카에 남겨 주었다.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은 세계은행과 IMF의 부추김을 받아 1980년대에 자유시장 정책들을 추진했지만 재앙으로 끝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 시장 개혁은 소수 흑인 특권층만 배불려 주었을 뿐 대다수 아프리카인들의 삶은 지난 40년 이래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래서 많은 활동가들은 북반구의 부국과 남반구의 빈국 사이에 깊이 파인 골을 두고 "세계적 아파르트헤이트"라고 말한다.

 미국은 이미 40년 전에 인종차별 정책을 폐지했지만 지금도 초착취 노동과 흑인 죄수 노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가 온존하고 있다. 지금 미국의 흑인들 가운데 대학에 들어가는 숫자보다 교도소에 가는 숫자가 훨씬 더 많다.

 오늘날 아프리카에서 계속되는 빈곤과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의 후손이 직면하고 있는 빈곤은 바로 인종차별주의 역사가 빚어낸 결과다.

인종차별주의를 끝장내기 위한 투쟁

 유엔 회의에서 보상 요구가 성명서에 반영되더라도 인종차별주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대중 행동과 근본적 변화만이 인종차별주의를 끝장낼 수 있다.

 이번 유엔 회의가 열렸던 더반에서는 더반사회포럼이 조직한 2만 명의 시위대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탄압을 중단하라', '노예제를 보상하라',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는 민영화 반대 캠페인을 전개하는 각종 그룹들과 토지 없는 농민들의 운동 단체들이 참여했다. 시위자들은 토지 개혁, 수도와 전기 서비스의 민영화 중단 등을 남아공민족회의(ANC) 정부에게 요구했다. 이 시위는 코사투(COSATU : 남아공 노동조합회의)가 호소한 이틀간의 총파업과 함께 벌어졌다.

 코사투는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된 뒤 처음으로 민영화 반대를 외치며 총파업을 호소했다. 유엔 회의가 전 세계 지배자들의 위선을 드러냈다면 거리에서 벌어진 시위와 총파업은 인종차별주의를 종식시키는 진정한 투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