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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이 필요한 때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영문학 교수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문화 평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주요 저서로는 《오리엔탈리즘》(교보문고), 《문화와 제국주의》(창), 《전쟁이 끝난 후에》(이후)가 있다.

이 글은 전쟁 직전에 씌어졌다.

미국인 이슬람교도 7백만 명(그 중 아랍인은 2백만 명에 불과하다)에게 지난 9월 11일 참사 이후의 나날들은 견디기 힘들 뿐 아니라 매우 불쾌한 시간이었다. 국내에서 무고한 아랍인과 이슬람교도 몇 명이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 외에도 아랍인과 무슬림 모두에 대한 증오의 분위기가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조지 W 부시는 신이 미국 편인 것처럼 말하면서 그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놈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고는 생사 불문하고 현상수배했다. 그래서 대다수 미국인에게 이슬람을 대표하는 신출귀몰한 광신도 오사마 빈 라덴이 무대의 전면에 등장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TV와 라디오는 팔레스타인의 여성과 어린이 들이 미국의 참사에 “환호”하는 장면을 보도하는 것과 아울러 빈 라덴의 사진과 천박한 소문(옛날에 플레이보이였다는 얘기)들을 쉴새없이 내보냈다.

전문가와 TV 프로 진행자 들은 이슬람과 “우리의” 전쟁 얘기를 끊임없이 해댔고, “지하드”나 “테러”같은 단어들이 이미 전국을 휩쓸고 있는 이해할 만한 두려움과 분노를 가중시켰다. 이미 두 명(그 중 한 명은 시크교도)이 악에 받친 시민들에게 살해당했는데, 살인자들은 아마도 국방부 부장관 폴 울포위츠가 “[이슬람] 나라들을 끝장내”고 적들을 핵무기로 공격하자고 말한 것에 자극받은 것 같다. 수백 명의 무슬림 및 아랍인 가게 주인, 학생, 히잡을 쓴 여성, 그리고 평범한 시민 들이 욕설을 들었고, 금방이라도 이들을 죽여 버리겠다는 낙서와 포스터가 도처에 나붙었다. 미국의 주요 아랍계 미국인 조직의 회장은 한 시간에 평균 열 번의 욕설, 협박, 소름끼치는 언어폭력을 경험한다고 오늘 아침 나에게 털어놓았다. 어제 발표된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랍인들(미국 시민권자라도)이 특별 신분증을 소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국인의 49퍼센트가 찬성했다(49퍼센트는 반대했다). 미국인의 58퍼센트는 아랍인들은 미국 시민권자라도 더 강화된 특별 보안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41퍼센트는 반대했다).

그런데 조지 W 부시가 우방국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감지하면서 정부의 호전적 태도가 점차 누그러지고 있다. 부시의 측근 가운데 그나마 분별력이 있는 듯한 콜린 파월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것이 텍사스 민병대를 보내는 것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라고 조언한다. 파월과 그의 참모들에게 강요된 극도로 혼란스런 현실은 부시가 국민의 이름으로 표방한 마니교 같은 선과 악의 단순한 대결 구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경찰과 연방수사국(FBI)이 아랍계 미국인과 무슬림 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소식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지만 긴장은 눈에 띄게 완화됐다. 부시는 워싱턴에 있는 이슬람 사원도 방문했고, 지역 사회 지도자들과 의회에 증오를 부추기는 말을 자제하라고 부탁했다. 이제 부시는 적어도 말로는 “우리 편” 아랍 및 이슬람 친구들(요르단,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과 아직 밝혀지지 않은 테러범들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부시는 미국이 이슬람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무슬림과 아랍인, 그리고 겉모습이 중동인 같은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폭행과 폭언 사례가 전국에서 증가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파월이 현재의 위기를 틈타 팔레스타인인들을 더욱 억압하는 이스라엘과 아리엘 샤론에 대해 여기저기에서 불만을 표시했지만, 전반적으로는 미국의 대외정책은 예전과 동일선상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거대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공적인 영역에서 아랍과 이슬람에 대해 현재 나돌고 있는 극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완화시켜 줄 만한 긍정적인 인식은 거의 없다. 음탕하고 복수심이 강하고 난폭하며 비이성적인 데다가 광신적인 아랍인이라는 고정 관념이 잔존하고 있다. 미국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대의를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더반 회의 이후에는 특히 더 그렇다. 학생 및 교수진의 지적·인종적 다양성으로 유명한 우리 대학[컬럼비아 대학교]에서조차 꾸란에 관한 강의는 좀처럼 개설되지 않는다. 영어로 쓰인 단행본 중에서 단연 백미라 할 수 있는 필립 히티의 《아랍의 역사》는 절판됐다. 구할 수 있는 책 중 대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적대적이다. 그런 책에서 아랍과 이슬람이라는 주제는 문화적·종교적 연구 주제가 아니라 논란의 대상일 뿐이다. TV나 영화에는 끔찍하리만치 혐오스럽고 피에 굶주린 아랍인 테러리스트들로 가득 차 있다. 유감스럽게도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를 공격한 테러리스트들이 비행기를 납치해 대량 살상 무기로 이용하기 전에도 이런 편견은 존재했다. 그런 테러 공격은 종교가 아니라 범죄병리학적인 문제다.

출판업계에서는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에 대한 공격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살 폭탄 테러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그래서 “이제는 우리 모두가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처지”라는 생각을 주입시키려는 시도가 있는 듯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가해진 박탈과 억압은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동시에 나를 포함한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살 폭탄 테러를 비난한다는 사실도 잊혀진다. 그 때문에 9월 11일의 참사를 미국의 행태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일체의 시도는 테러 공격을 두둔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비난받거나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이해하는 것과 두둔하는 것은 완전히 다를 뿐 아니라 진실과도 거리가 멀기에, 이러한 태도는 지적·도덕적·정치적으로 재앙적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믿기 어려운 것은 중동에서 미국 정부가 저지른 일들 ―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인 후원, 사담 후세인을 구원해 주고 수십만 명의 무고한 이라크인들을 죽음과 질병과 영양 실조의 나락으로 빠뜨린 경제 제재, 수단 폭격, 이스라엘의 1982년 레바논 침공(당시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학살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2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을 “승인”한 것,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지역을 마치 미국의 봉토(封土)처럼 이용하는 것, 억압적인 아랍 및 이슬람 정권에 대한 지원 등이 사무치는 원한을 사고 있으며, 당연하게도 그런 일들이 미국인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것으로 비춰진다는 사실이다. 평범한 미국인이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이 의식하든 안 하든 해외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냉혹하고 부당한 정책과 사뭇 다르다.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과 민간인 학살을 비난하는 UN 안보리의 성명에 대해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때마다 아이오와나 네브라스카의 주민들은 그것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지나칠지 모르지만 이집트, 팔레스타인 또는 레바논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큰 상처를 받으며, 또렷이 기억한다. 다시 말해 미국의 특별한 행동과 미국에 대한 태도 사이에는 상호연관이 존재한다. 미국에 대한 이런 태도는 미국의 부와 자유, 또는 국제 사회에서 미국이 거둔 전반적인 성공에 대한 질투나 증오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와 반대로, 내가 얘기해 본 거의 모든 아랍인 또는 무슬림은 미국처럼 엄청나게 부유하고 훌륭한 나라가(그리고 미국인들처럼 좋은 사람들이) 왜 약소국 사람들을 그토록 냉혹하게 무시할 수 있는지 의아해 했다. 더구나 많은 아랍인과 무슬림은 친 이스라엘 로비스트들이 미국 대외정책에 입김을 넣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뉴 리퍼블릭〉이나 〈코멘터리〉 등의 친이스라엘 잡지들의 그 무시무시한 인종차별주의적 광기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며, 찰스 크로서머, 윌리엄 새파이어, 조지 윌, 노먼 포더레츠, A M 로젠탈 등의 피에 굶주린 칼럼니스트들이 주기적으로 아랍인과 무슬림에 대한 증오를 부추긴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한 주장은 판매 부수가 적은 출판물의 뒷면에 묻히는 게 아니라 주요 매체(예컨대 〈워싱턴 포스트〉의 사설)를 통해 누구나 접할 수 있다.

우리는 혼란스럽고 불안하며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분위기에서 살고 있다. 더 많은 폭력과 테러가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9월 11일의 끔찍한 만행이 아직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뉴욕과 워싱턴에서는 더욱 그렇다. 나 또한 내 주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느낀다.

대중매체의 역겨운 보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평화적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서서히 등장할 뿐 아니라, 아직까지는 매우 소수일지라도, 더 커다란 폭격과 파괴와는 다른 대안을 요구하는 작은 목소리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와 같은 사려 깊은 행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전화를 도청하고 중동계 사람들을 테러 혐의만으로 체포하여 수감할 뿐 아니라 매카시즘을 방불케 하는 경계와 의심과 비상 동원의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시민적 자유와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도처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미국인들의 습관은 보기에 따라서는 애국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으나, 애국심은 또한 편협함, 증오 범죄[소수인종이나 소수민족, 동성애자, 장애인, 노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증오심이나 인종적 편견을 갖고 가하는 범죄 행위] 그리고 갖가지 불쾌한 집단적 발작을 유발하기도 한다. 수많은 논평가들이 이를 경고했으며, 내가 위에서 밝혔듯이, 대통령 자신도 연설에서 “우리”는 이슬람 또는 무슬림과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러한 위험은 상존하고 있다. 다행히도 다른 논평가들이 이에 대해 언급했다.

둘째로, 최근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92퍼센트가 찬성한다던 군사 작전의 전반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모임들이 많이 열렸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이번 전쟁의 목표(“테러 근절”이라는 말은 매우 추상적이다)·방법·계획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군사적 지향이 무엇인지는 상당히 불분명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종말론적이거나 종교적인 언사는 줄어든 반면 ― 십자군 전쟁이라는 말은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 이제 “희생” 또는 “전례 없이 긴 전쟁”과 같은 막연한 표현이 아니라 무엇이 필요한지에 더 비중을 두는 분위기다.

대학교, 교회, 회의장 등에서는 미국의 대응 방안을 두고 수많은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무고한 희생자의 가족들이 군사 보복은 올바른 대응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취할 행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중동 및 이슬람 세계에 대한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적으로 조명해 볼 시기는 무르익지 않은 것 같다. 언젠가 그 때가 오기를 바랄 뿐이다.

헌법상의 기본권을 방어하는 차원이든, 이라크인들과 같은 미국 열강의 무고한 희생자들에게 손길을 건네는 차원이든, 동정과 합리적 분석에 의존하는 차원이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양심과 공감의 공동체가 인류의 미래에 가장 큰 희망이라는 점을 더 많은 미국인과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지금껏 해온 것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당장 팔레스타인 정책이 바뀌거나 국방 예산이 줄어들거나 환경 및 에너지 정책이 합리적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침착하게 되돌아보는 방식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서 희망을 찾겠는가? 어쩌면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미국에서 많아질 수도 있다. 나는 팔레스타인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사람들이 아랍 및 이슬람 세계에서도 많아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시온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된 빈곤과 무지, 높은 문맹률, 억압, 커져가고 있는 악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들 가운데 비종교적인 세속 정치를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옹호할 수 있고, 이스라엘과 서방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이용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만큼 열의를 갖고 아랍에서 이슬람교를 정치에 이용하는 현실을 호되게 비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우리들 중에서 식민지 정착민들의 만행과 비인간적인 집단 응징을 뼈저리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살 테러를 부도덕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우리에게 가해진 불의를 더 이상 참고 넘어가서는 안 되듯이, 우리가 싫어하는 지도자들을 미국이 후원한다고 한숨만 쉬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무차별 살인 행위를 단호히 반대하는 새롭고 세속적인 아랍의 정치가 등장해야 한다. 그 점에 관해서 더 이상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는 말자.

나는 오늘날 아랍인의 주요 무기는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라고 여러 해 동안 주장해 왔다. 나는 또한 자결권을 요구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이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처럼 세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목표와 수단을 명확히 하지 않은 데다가 우리의 목표가 배타주의나 목가적이고 신비적인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공존과 포용임을 충분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제 우리는 많은 미국인과 유럽인 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당장 우리 자신의 과거를 재평가하여 앞으로의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만큼 우리 자신에게도 요구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 지도자들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왜 그런지 살펴봐야 할 때다. 의심과 재평가는 사치가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