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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당의 위기 - 대안은 무엇인가?

집권당의 위기 - 대안은 무엇인가?

김어진

지금 집권당의 모습은 마치 김영삼 정권 말기의 필름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대선 주자들 사이의 대권 경쟁도 김영삼 정권 때보다 훨씬 더 빨리 시작됐다. 김대중은 노동법 날치기 통과·한보 비리로 만신창이가 된 김영삼보다 1년이나 더 서둘러 여당 총재에서 물러나는 치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박지원 사퇴와 김대중의 총재직 사퇴 이후에도 여전히 여권 내의 쇄신 파동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최근에 김근태, 정동영 등은 “전면적 제도적 쇄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권 실세의 비리 실체가 드러날수록 쇄신 파동은 더 확대될 것이다. 쇄신파들의 항명 파동은 5월 정풍 파동 때보다 파장이 더 컸다. 5월에는 동교동계 전체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권노갑을 두둔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권파들조차 노골적으로 권노갑과 박지원을 두둔하지 못했다. 동교동계의 정책·홍보 담당이었던 “리틀 디제이” 한화갑 자신이 ‘쇄신 연대’의 주동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동교동계한테서 지원 사격을 받고 있는 이인제조차 두 “김대중 분신” 제거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 김대중과 거리를 두려 했다. 검찰이 황급히 덮어 버린 판도라 상자, 즉 김대중 정권의 3대 비리(진승현·정현준·이용호 게이트)도 가뜩이나 휘청거리는 여권을 산산조각낼 뇌관이 되고 있다. 검찰총장과 국정원장 퇴진으로 마무리되기 힘들 수도 있다. 국정원은 비리 연루로 국가 기구에 대한 신뢰 실추를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다. 십중팔구 국정원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적당한 마녀사냥감을 좌익 가운데서 고르고 있을 것이다. 벤처 투기 회사의 돈이 김대중 아들과 여권 실세의 비자금으로 흘러갔다는 의혹이 커질수록 김대중은 엄청난 퇴진 압력을 받을 것이다. 이미 권노갑, 김옥두 등 동교동계는 3대 게이트의 ‘몸통’으로 거론돼 왔다. 권노갑의 비리 연루가 확인되면 “김대중의 분신”(권노갑)은 김현철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집권당의 총체적 위기와 내분 때문에 민주당이 쪼개질 가능성이 여기저기에서 거론되고 있다. 이것은 여러 방향일 수 있다. 현재 동교동계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이인제가 경선에서 탈락한다면 그는 1997년 때와 마찬가지로 딴 살림을 차리려 할 것이다. 쇄신파의 일부가 민주당에서 떨어져 나와 신당을 만들 가능성도 있다. ‘화해와 전진을 위한 포럼’(김근태와 이부영이 중심인)도 모종의 ‘개혁신당’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김대중과 동떨어져 보일수록 정치적 생존율을 높일 수 있다는 압력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동교동계의 영향력 하에 있는 중도개혁포럼을 중심으로 한 신당설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김대중이 아무리 “비김대중”으로 변장한다 해도 몸통(김대중)이 그대로라면, “뉴DJ당” 같은 변신은 성공할 리 없다. 그 이유는 김대중 집권 4년에 있다.

위기의 진원

김대중은 집권 4년 동안 대중의 지지를 완전히 잃었다. 10·25 재보선 참패와 쇄신 파동을 낳은 직접적 계기는 선거 직전에 불거진 조폭 게이트·백궁 게이트였다. 김홍일 휴가 향응 의혹도 결정타였다. 그러나 김대중의 위기는 단지 일련의 부패 추문 때문만은 아니다. 집권당의 위기는 좀더 근본적인 데에 있다. 민주당의 실패는 애초에 그 당이 설정한 과제에 깃들어 있다. 김근태는 “개혁 방법이 문제였다.”고 말했지만 과정과 방법이 아니라 ‘개혁’ 그 자체가 위기의 근원이다. 예컨대 구조조정이 “말로만”(〈파이낸셜 타임스〉 11월 11일치) 된 건 정치개혁이 안 돼서였다. 김대중이 퇴출 대상 기업의 뒤를 봐 주는 정치인들을 제거했는가? 그러기는커녕 김대중은 매번 부패에 연루된 측근들의 방패막이가 되기를 자처했다. 김대중은 한빛은행 부정대출 비리로 물러난 박지원을 몇 달 만에 정책기획수석으로 다시 불러들이지 않았던가.

집권당이 내건 목표들은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재벌개혁은 변죽만 요란한 채 재벌들의 비위만 거스르는 것으로 끝났다. ‘IMF 위기 극복’이라고 떠들었지만 실물 경제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실업률은 다시 급격히 오르고 있다. 청년 실업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시장 개혁’이 효율을 늘렸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시장 개혁은 경제를 살리지도 경쟁력을 강화하지도 못했다. 최근 발표에 따르면, 일종의 수익성 지표인 국내 제조업 영업이익 증가율은 10년 동안 가장 낮다. 김대중의 ‘개혁’은 민중이 바라는 정치적 자유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언론개혁도 변죽만 요란한 채 끝났다. 구속 노동자 숫자는 김영삼 정권 때보다 훨씬 많았으며 경찰력을 투입한 작업장은 열 손가락을 꼽아도 모자란다. 수십억 원의 탈세를 저지른 김병관, 방상훈 같은 언론 사주들은 풀려 났지만 단병호 위원장은 여전히 수감중이다. 그의 신앙인 ‘시장 개혁’은 어느 계급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되레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은 더 쪼들리고 빈부격차는 늘어나 평범한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쓰라린 심정들만 차곡차곡 쌓여 왔다. 교육을 시장에 내맡긴 결과 수많은 청소년들이 절망과 소외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당에서 물러나 민생 안정에 힘쓰겠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여전히 “개혁”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집권 기간 내내 민생을 위협했다. 의료보험료와 각종 공공요금 인상, 대학 등록금 인상, 전월세 가격 폭등, 사기업화 등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김대중은 한반도 평화를 말했지만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미국 제국주의에 의존해 왔다. 자신의 치적이라 으스댄 ‘6·15 남북공동선언’은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되레 그는 무기와 분단 비용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 얼마 전 정부는 주한미군 주둔 비용으로 내년부터 6천억 원을 더 내기로 전쟁광 럼즈펠드와 합의했다.

김대중이 남은 임기 동안 “돌아선 민심”을 되돌릴 가능성은 없다. 북한 지도층은 이제 김대중을 더 이상 실질적인 협상 파트너로도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한국 경제 회복을 기대하기에는 세계 경제가 너무 불안정하다. 내년까지 그 무엇도 집권당을 위기에서 구출해 줄 수는 없다.

쇄신파

쇄신파의 일부가 김대중과 자신을 분리시킨다면 개혁적 이미지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도 있을 것이다. 노무현이 상대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것도 안티 조선 운동이나 반지역주의 같은 개혁적 이미지 때문이다.

그러나 쇄신파들은 권노갑 제거 문제에서도 일관되지 않았다. 정동영은 권노갑 퇴진을 외치다가도 얼마 전 “그 분(박지원과 권노갑)들도 오해와 편견의 희생자다.”며 꼬리를 내렸다. 그러다 지금은 “제도적 쇄신”을 말한다. 한화갑은 동교동 구파를 당장 응징할 태세더니 갑자기 “동교동계의 단합”을 주창하며 권노갑한테 추파를 던졌다. 노무현은 동교동계도 개혁 진영이라며 애써 그들을 변호했다. 그는 진정한 민주 개혁 요구에도 한참 못 미치는 인적 청산 문제에서조차 보수적이다. 무엇보다, 김대중과 거리를 두고 개혁적 이미지를 내세우려는 자들 역시 김대중 개혁을 자신의 소신으로 내세워 왔다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를 갖고 있다.

노무현은 자신을 “김대중 개혁의 전도사”로 불러 달라고 주문하기까지 했다. 김근태는 비교적 단호하게 “동교동계 해체”를 주장해 왔지만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 개혁은 중단 없이 계속돼야 한다.” 김근태는 김대중의 철저한 계승자임을 자처한다. 그는 “민주적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 모두 다 계승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김근태의 우상은 시장 맹신자 토니 블레어다. 다른 대선 주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한화갑은 ‘쇄신 연대’의 일부였지만 “리틀 디제이”라는 별명답게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 노선이 바로 내 노선”이라고 말했다. 김영삼을 정치적 스승으로 모셨던 이인제도 별반 다를 바 없다. 김대중의 실패한 집권 4년을 자신의 미래로 삼는 자들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까?

전망과 과제

여권이 사분오열돼 있고 부패 추문과 무능력으로 김대중 정권이 궁지에 몰려 있는 때는 또한 싸우기에 아주 좋은 때다. 이럴 때일수록 김대중을 밀어붙여야 한다.

김대중이 임기를 다 채우도록 놔 둬야 하는 이유는 없다.

김대중 정권의 권력형 비리와 온갖 실정을 규탄하는 대중 운동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김대중과 그의 당은 벼랑 끝으로 내몰릴 것이다. 그리 되면 김대중은 “명예로운 퇴임”을 위해서라도 놀랄 만한 양보책을 꺼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 때 우익은 “선거용 선심 정책”이라고 비난할 테고 그 압력에 밀려 우왕좌왕하는 김대중은 더 큰 대중적 반감에 직면할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김대중 퇴진 운동은 조직 노동자들과 학생들에게 정치적 자신감을 북돋워 줄 것이다. 대선 주자들은 자신들을 친개혁, 친노동으로 포장하기 위해 수많은 거짓말을 늘어 놓겠지만 계급 세력 관계는 노동자들에게 더욱 유리해질 것이다. 사실, 건강보험 재정 파탄 등으로 온 나라가 현 정권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을 때 민주노총은 김대중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는 바람에 양보를 얻어 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 이런 실수에서 교훈을 이끌어 내야 한다. 김대중이 정치적 식물 인간이 돼 가는 상황에서 그에게 미련을 갖거나 그를 방어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 연민은 근본적 개혁을 바라는, 김대중을 지긋지긋해 하는 대중의 심정과 바람을 거스르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김대중 퇴진은 시기상조고 이회창 좋은 일만 시킨다는 민중주의자들의 주장은 김대중을 돕는 결과만을 낳았다.

지금 이 순간, 한나라당이 차기 정권을 잡을 가능성은 물론 높다. 국가 기구의 관료나 재벌 들은 차기 정권 맞이를 준비할 태세다. 그러나 이회창이 권좌에 오른다면 그건 순전히 반사이익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설사 정권을 잡는다 해도 어떤 조건에서 정권을 잡느냐가 중요하다. 김대중이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휘청거리는 것을 보면 한나라당은 몇 년 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미래를 떠올리며 공포에 떨 것이다. 지난 봄 민주노총이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걸었을 때 한나라당은 김대중 퇴진을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민주노총이 2차 파업을 접고 난 뒤에야 김대중 퇴진을 주장했다. ‘개혁파’를 공격하면 ‘수구파’도 괴로운 법이다. 김대중이 물러나고 한나라당이 집권한다 해도 김대중을 물러나게 한 노동자들 앞에서 한나라당의 운신의 폭은 아주 좁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집권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공수표’를 남발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자들인가? 반민주와 반노동자의 원조 아닌가. 한나라당은 평범한 사람들의 요구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채 몇 년도 안 가 퇴진 압력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당 정권에 대한 반감은 항쟁과 저항을 낳을 것이다. 김대중 퇴진 운동이 거대하게 벌어진다면 또 한 세대가 거대하게 급진화될 것이다. 이것은 좌파가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김대중이 임기 전에 아래로부터의 힘에 밀려 물러난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사회 변혁 운동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수혜자가 될 수 있다.

김영삼과 이회창에 신물이 나서 김대중에게 표를 찍은, 진정한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이 권위주의 본당 한나라당을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민주노동당을 선택하겠는가?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이 냉전 우익을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민주노동당을 선택하겠는가? 공공복지를 바라는 사람들이 예산안 삭감을 밥먹듯 부르짖는 한나라당을 선택하겠는가 민주노동당을 택하겠는가? 민주노동당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십분 활용한다면 집권에는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대안적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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