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 위기 - 세계 경제를 침몰시킬 뇌관?

이정구

일본 발 세계공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다시 언론에서 제기되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 는 지난 9월 2일 “일본 은행들이 다른 나라 대부자들의 예금도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부실 채권을 해결하지 못해 붕괴될 경우 다른 나라들로 전염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경제 상황은 사상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지난 199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지만, ‘잃어버린 20년’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일본 지배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경제는 침체를 거듭해 오다 1998년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그런데 올해 다시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이 확실하며 내년에도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서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인 일본은 국제수지 흑자국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난 14개월 연속으로 무역수지가 줄어들고 있으며, 2001년 1분기에는 무역수지가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 10월 30일 발표된 9월중 실업률이 5.3퍼센트(357만 명)로, 이는 실업률을 측정한 50년 이래 가장 높은 수치다.

투자와 소비가 위축돼 있어 당분간은 경기회복이 어렵다는 점이 재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일본은 지금 심각한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을 경험하고 있다. 생산 규모 자체도 축소되고 있다. 지난 17년 이래 최저 수준인 주가가 지금의 일본 경제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낸다.

디플레이션

일본 경제가 위기에 빠진 직접적인 이유는 금융 위기이다. 일본 금융기관이 보유한 부실 채권은 일본 금융감독청 추산으로 31조 엔에 달한다. 하지만 위험 채권까지 포함하면 일본 국내총생산의 25퍼센트에 달하는 140조 엔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기업의 부실 채권 규모가 이처럼 눈덩이처럼 쌓인 이유는 지난 1990년대 초 “거품 경제”가 붕괴하면서 생긴 부실에다 1990년대 내내 이윤율 하락으로 기업들이 부실해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1990년대 초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전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소니, 히타치, 마쓰시다 등 일본이 자랑하는 7대 전자회사들이 올해 생산 규모를 축소하고 노동자 7만 명을 정리 해고하겠다고 밝혔다. 이 기업들의 올해 적자액은 1조 엔을 넘어설 것이 거의 확실하다. 반도체 시장의 불황으로 도시바, 히타치 등 디램 업체들이 이미 감산에 들어갔다. 이들 업체들도 4만 8천 명을 정리 해고했다. 일본 지배자들은 총리를 여러 명 교체했지만 금융 부실을 말끔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총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등장할 때도 금융 구조조정을 단행하겠다는 공약으로 기업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높은 인기는 지금 시들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전의 무기력한 총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지금 세계 경제가 더 심각한 위기로 치닫고 있고 미국 경제도 회복되지 못한 상황은 일본이 불황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환경이다. 더욱이, 일본이 차지하고 있던 시장을 중국 같은 신흥 공업국들이 빼앗아가고 있다.

정치 위기

고이즈미는 경제 개혁을 내세우면서 경영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총리가 됐다. 하지만 경제 개혁은 시작조차 못 하고 있다. 경제 개혁은 지배계급 내의 갈등을 촉발시키기 때문이다. 고이즈미는 도로공단 등 특수법인에 대한 재정지원을 1조 엔 삭감하고 공공기업 사유화 방안을 내놓았지만, 제대로 진행될지는 미지수다.

당장 고이즈미의 시장개혁에 대해 자민당 내부에서 반발하고 있다. 우정사업과 건설업 관련 단체의 지원을 받는 의원들은 우정사업 사기업화나 건설업의 부실채권 정리에 반대하고 나섰다. 심지어 가메이 시즈카 전 정조회장은 “일본이 멋모르는 학자들의 실험장이 돼서는 안 된다.”며 급진 개혁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은행들도 한꺼번에 부실 채권을 정리하면 주가 폭락 등의 부작용이 생길 것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부실채권 처리를 서두를 경우 더 많은 부실 기업들이 도산한다는 점이 지배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이미 부실채권 처리 때문에 마이카루와 같은 대형 유통업체가 도산했다. 고이즈미가 경제 개혁을 추진한다 할지라도 그 속도와 폭을 두고서 지배계급 내에서 이해 당사자들이 갈등을 빚을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 지배계급 내에서는 침체해 있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경기부양책을 써야 한다는 편과 구조개혁을 시작해야 한다는 편 사이의 대립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고이즈미의 시장개혁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 준다.

지금 일본은 시장개혁을 추구하지 않은 채로 고질적인 침체를 겪을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지배계급 내의 갈등을 동반한 험난한 시장개혁을 시작할지 갈림길에 서 있다. 일본 지배자들은 세계 경제 위기 속에서 경쟁이 격렬해지자 군사력 증강의 필요를 더 절실히 느끼고 있다. 고이즈미는 숙원이던 자위대 해외 파병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통과시켰다. 우익사관을 담은 역사 교과서 파동과 평화 헌법 개정 등의 보수화 분위기와 함께 자위대 파병은 동북아를 더욱 긴장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지배자들의 보수 우경화 추세와는 반대되는 조짐도 존재한다. 일본 시민단체들이 우익 사관을 담은 역사 교과서가 중고등학교에서 채택되지 않도록 하는 캠페인을 벌여 성공을 거두었다. 또, 미약한 숫자지만 반전 운동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등장하고 있다. 경제 위기, 기성 정치권에 대한 환멸과 실망, 시장개혁을 둘러싼 지배계급의 내분 등은 이시하라 같은 보수 우익이 세를 획득할 기회이기도 하지만 좌파가 다시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본을 예의주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