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와의 대화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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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가 박노자와 얘기를 나눴다. 그는 인터뷰어를 “동지”라고 부르며 반갑게 맞이하면서 언제나 그렇듯이 명료하고 해박하게 자기 견해를 밝혔다. 지난 71호 신문에서 지면 제약상 다루지 못했던 러시아, 한국 민중사학, 구한말 개화파 그리고 불교에 대해 그가 얘기한 것을 3월 18일에 있을 그의 강연을 맞이해 이번 호 신문에 싣는다. [ ] 속의 말은 편집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말이다.
《하얀가면의 제국》에서 러시아의 체첸 침공을 비판하셨는데, 러시아의 제국주의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러시아 자본의 주력 부대는 자원 수출을 하는 자본가들입니다. 지금 러시아 제1호 재벌은 가스프롬이라는 재벌인데, 세계 가스 시장의 20퍼센트 정도를 점하고 있는 굴지의 재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뉴욕 주식시장에도 상장돼 있고 외국자본을 상당 부분 끌어들이고 있지만, [지분의] 절반은 국가가 가지고 있는 국가관료자본의 상징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가스프롬 같은 러시아 굴지의 자원 재벌들이 주로 자원을 개발하는 곳은 러시아인들이 살고 있는 러시아 본토가 아니고 시베리아나 극동 쪽의 야쿠트족, 에벤키족, 코미족 같은 소수민족들이 사는 소위 소수민족 자치공화국들입니다. 만에 하나 야쿠트 자치공화국이나 코미 자치공화국 같은 소수민족 자치공화국들이 독립을 요구한다면 러시아 자원 재벌들이 바닥나죠. 왜냐하면 저쪽에다 자원 이용에 대한 대가를 엄청 지급해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러시아 자원 재벌 처지에서는 러시아 소수민족들의 정치적 움직임을 봉쇄해야 합니다. 만약 소수민족들의 독립 운동이나 더 높은 수준의 자치 운동이 일어나면 자본 수출의 이윤 마진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체첸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체첸은 석유가 나오는 지역이었구요. 자원을 갖고 있는 소수민족이 독립하는 전례가 생긴다면 그것은 연쇄적인 독립 요구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체첸에 대한 아주 잔혹한 진압은 결국 자원 수출 재벌들의 요구였던 것이고 러시아 군부의 요구 사항이기도 했습니다. 군부는 그걸로 군수기업들을 먹여 살렸고 체첸을 새로운 무기의 시험장으로 많이 이용했습니다. 거기에 아주 잔혹한 무기를 많이 시험했죠. 예컨대 불을 뿜는 무기들, 화염방사기, 소이탄들을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독립 운동가들을 불로 태워버리는 그런 만행을 많이 저질렀죠.
재벌과 군부의 요구는 체첸 독립 운동을 탄압하는 것이고 지금 그 요구가 거의 1백 퍼센트 관철됐지만, [저항은] 북부 카프카스[코카서스] 지역에서 이슬람주의라는 형태를 취한 하층민들의 새로운 반러시아 운동으로 번지기도 하죠. 그러니까 탄압을 받은 만큼 북부 카프카스 지역 전체가 러시아 지배에 대해 커다란 불만을 품게 된 것이고 러시아 지배의 동의 기반이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체첸뿐 아니라 북부 카프카스 지역 전체 주민들의 상당수가 더는 러시아의 지배에 동의하지 않게 됐고, 동의하지 않는 만큼 이슬람주의에 많이 기울게 된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침략의 경우에도 자원 착취, 자원 이용하고도 관계가 깊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은 자원의 보고입니다. 소련이 침략했을 때 자원 이용권을 따내고 주요 자원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 일부 자원을 굴착·개발했는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저항세력의 저항 속에서는 [그게]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죠. 지금 미국이 이라크에서 똑같은 문제에 봉착했죠. 저항이 거센 만큼 실제 자원 약탈에 따르는 이득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적자죠. 아프가니스탄 침략도 엄청난 적자였지만 최근 이라크 침략도 미국 제국의 수지타산으로 봤을 때 대단한 적자입니다.
선생께서는 소위 민중사학의 약점에 대해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최근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민중사학’의 약점을 파고들기도 하고요. 아울러 동학농민 운동 등을 스탈린주의의 ‘5단계설’에 끼워 맞춰 동학 운동을 마치 근대 부르주아 혁명인 것처럼 규정하는 것도 비판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한국 민중사학의 일부는 일본 민중사학의 한 갈래이기도 한데, 바로 스탈린주의적인 5단계론을 한국 역사에 무비판적으로 적용해서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발전했다고 사실을 조작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사회주의의 정당성을 찾아내려는 태도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물론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아주 거시적으로는 세계사의 법칙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전환이 모든 나라에서 일률적으로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죠. 많은 경우에는 예컨대 조선처럼 농업관료체제가 강했던 곳, 그러니까 국가의 수탈 능력이 강하고 국가가 상당 부분 시장을 대체했기 때문에 유통 경제의 발전 역시 다른 루트로 조금 늦은 시기에 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런 뉘앙스를 민중사학이 많이 무시했고 서구중심주의적인 방법으로 서구와 똑같은 시기나 조금 늦은 시기에 조선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자본 축적이 시작됐다는, 사실이 뒷받침되지 않는 그런 주장을 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지금 극우 세력한테 공격받는 데 아주 무력한 것이죠.
극우 세력들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조선에 자생적인 자본주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조선에서] 서구와 같은 방식의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상인자본들이 강화돼 가고 있었지만 역시 그것은 국가에 예속된 상인자본이었죠. 그리고 그것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민중사학은 그런 걸 무시해 왔습니다.
민중사학의 그런 약점을 극우파들, 이영훈 씨와 같은 사람들이 이용해서 ‘일제 덕분에 우리가 자본주의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의 성공적인 자본주의 기초였다’고 일본 제국주의를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해외와 직접 연결돼 있는 한국의 대자본들에게 유리한 주장입니다. 그러면 해외 자본이 삼성전자의 지분을 60퍼센트 소유한다든가 한국의 금융시장을 장악한다든가 하는 부분이 역사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죠. 해외 자본이 우리 나라의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면 해외 자본이 악이 아닌 선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대자본에게 아주 유리한 역사 해석이죠. 우리가 거기에 반론을 하려면 민중사학의 도식적인 끼워 맞추기 식 해석을 극복하고 조선 후기 상인자본의 발전에 대해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구요.
동학농민운동 같은 경우에는 너무나 많은 층위들이 중첩적으로 얽히고설킨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피억압층·피지배민들의 수탈 기구에 대한 전반적인 반발, 전반적인 항쟁 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와해돼 가고 있는 수탈 체제에 대한 종교적 외피를 쓴 항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지도부는 봉건 세력들과 연결돼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동학농민항쟁의 지도부를 보면, 전봉준의 경우에는 대원군과 깊은 관계가 있던 인물이었고, 주로 투쟁을 국가기구 자체에 맞춘 것이 아니고 봉건 지배세력의 일부인 민씨를 타겟으로 삼았습니다. 그 대신 대원군을 옹립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 운동의 민중적인 의미는 그런 면에서 많이 훼손됐죠. 결국 그 운동이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아마도 지배계급 중 일파가 그 이득을 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동학 항쟁에서는 피지배계급이 아직은 지배계급을 완전히 탈피해서 지배계급의 영도 없이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 것입니다.
구한말 〈독립신문〉 등 개화파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하셨는데, 이들이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게 되면서 보이는 모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독립신문〉은 한국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효시로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산업자본이나 자율성을 가진 자본가가 아니었고 새로운 유산계급, 특히 일본에 쌀을 수출하는 지주계급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었는데, 핵심적으로는 외세에 절대적으로 예속돼 있는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세계관은 거의 외세의 사상적인 영향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또 외세와는 아주 가까운 유착 관계에 있었죠. 대다수는 개신교 개종자들이었고, 서재필은 아예 미국 시민이었습니다. 이들은 결국 조선도 기독교 열강과 똑같은 열강이 돼서 예컨대 만주에서 중국의 세력을 밀어내고 조선의 이권을 확립하는 등 아류제국주의 세력이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민족국가는 바로 일본이나 서구의 제국주의적인 국민국가였고, 다만 현실적으로 조선이 당장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이 그들이 절실히 느끼는 한계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조선이 합방이라는 식민화가 됐을 때, 제국주의적인 사고 방식대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 것이 법칙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 중 상당 부분은 민족패배주의에 빠졌습니다. 조선이 어차피 운명적인 약자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결국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되어 중국 등을 약탈하는 것이 조선 유산 세력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해 소위 친일파가 된 거죠. 이광수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일부 무장독립운동을 하는 세력 같은 경우에는 사회진화론에서 상당 부분 벗어나서 또 다른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찾아나섰는데, 그 중에 일부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이동휘 같은 사람이죠. 이동휘는 개화기에 대표적인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자였는데, 그 사람이 결국에는 1917∼18년부터 볼셰비즘을 조선 해방운동의 방법론으로 채택하기에 이른 거죠. 왜냐하면 사회진화론으로 더는 독립운동을 할 만한 그런 부분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약자의 처지에서 보면 사회진화론이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죠. 그러니까 별 다른 쓸모가 없죠.
선생께서는 불교에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노 기로의 신흥불교청년동맹 등의 사례를 통해 불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접점에 대해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좀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불교라고 외길화해서 이야기하지만 불교 안에도 수많은 의미들의 층위가 포함돼 있습니다. 초기 불교의 경우 당시 인도 중간계층이 왕권과 브라만 그러니까 제사장 카스트 권력에 일종의 도피적인 저항을 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왕권과 브라만 권력을 부정했고, 왕을 다만 갈등의 조절자나 단순한 폭력자라고 생각하고 카스트제도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그런데 왕권과 브라만의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보다는 그 사회를 피해 일종의 수행공동체를 만들어서 그 사회의 경계를 넘으려 했던 것이 초기 불교 공동체입니다.
초기 불교 공동체의 실천 방법이 꼭 이상적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 그 때 상황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는 별도의 문제지만 ― 어쨌든 카스트제도에 대한 비판의식이라든가 평등주의라든가 철저한 무신론이라든가 초자연적 힘에 대한 무관심이라든가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이 하나의 비판 세력, 체제에 대한 비판 세력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불교의 이와 같은 성격이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서 희미해져 갔습니다. 이미 기원전 2세기 아소카 대왕이 인도의 상당 부분을 통일했을 때 체제에 완전히 편입된 것이 불교였습니다. 아소카 대왕의 일종의 국교가 됐었던 거죠. ‘왕권을 벗어나야 한다’, ‘권력을 벗어나야 한다’는 초기 불교의 탈권력적 의식에 대한 전면적인 배신이었습니다.
그 후 불교는 왕권과 계속 유착을 누리고 있었지만 불교 안에는 그래도 국가와 지배계급의 폭력, 폭력이 충만한 계급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어느 정도 내포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뒤 동아시아에서 불교의 역할을 보면 불교의 일부 교파가 민중 저항의 이데올로기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5∼6세기, 세 가지 계단의 가르침인 삼계도가 민중 세력의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되는 경우가 있었고, 그 후에도 미륵신앙, 백련도, 그리고 정토신앙의 일부 계파가 민중 세력의 이데올로기적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경우에도 17세기 후반에 미륵신앙을 믿는 공동체들이 국가에 반란을 시도하는 등 불교의 일부인 민중불교가 체제에 대한 저항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는 상층부가 왕권, 그리고 체제와 깊이 유착을 해도 저항적 가능성을 적어도 전근대 시기에는 완전히 잃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죠.
일본의 경우 특히 지방 농촌 사찰 중에는 부자 사찰들도 있었지만 농민이 가난했던 만큼 상당 부분의 사찰이 대단히 가난했고 거기의 사제들 즉, 승려들이 농민과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도시에서도 승려들 안에서 빈부격차가 대단히 심했는데, 일부 가난한 승려들에게는 하층민들 그리고 노동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가치와 의식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20세기 초반, 그러니까 1920∼30년대에 일본 자본주의가 여러 가지로 위기에 봉착하고 특히 세계 공황 이후에 가난한 사찰 신도의 상당 부분이 파산하고 파탄에 빠졌습니다. 이 때 일부 젊은 승려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 등의 신사조를 접한 승려들이 자기 신도들과 연대해서 폭력적인 계급 사회를 새로운 근대적 방법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됐습니다. 그 의식이 어느 정도 체계화된 결과가 바로 세노 기로 스님이 만든 신흥불교청년동맹이었습니다. 그 동맹은 바로 1930년대 초반 일본 불교의 진보단체였고 정치적으로 사회민주당 또는 공산당과 연대를 해서 반파시스트 전선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세노 기로의 경우 볼셰비즘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르크스 저서에 깊이 공감을 했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와 불교가 얘기하는 망상, 마르크스가 말한 허위의식과 불교가 얘기하는 온갖 환상들을 연결시키기도 했죠. 자본주의의 심성적인 배경이 불교적으로 봤을 때 과연 무엇인가. 결국, 탐냄, 어리석음 그리고 성냄 그러니까 인간적인 공격성 등 불교가 제거하고자 하는 바로 그런 부분이 자본주의라는 제도를 심성적으로 뒷받침한다든가 하는 식의 체제 비판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또, 초기 승가의 생활로 봐서는 이미 일본의 제도권 불교가 산송장이 됐다는 등 제도권 불교에 대해 매우 정당한 비판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일본 공산당하고도 손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결국 1936∼37년에 세노 기로 스님이 경찰에 검거되고 고문받아 전향하고 평생 폐인이 됐죠. 풀려나오고 나서도 전향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너무 깊었지요. 더는 의미있는 사회적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에는 일본의 파시스트 국가에 대항하기에는 세력들이 너무 취약했습니다.
한국에서도 한용운과 같은 사람들이 불교사회주의자를 자처하고 공산주의자들하고도 매우 친했고, 그리고 민중적인 세계관을 매우 강력하게 가졌던 사람이에요. 그 뒤에는 1970∼80년대 일부 불교의 청년 세력들이 민중불교 운동을 일으켜서 제도권 불교에 대해 세노 기로의 비판과 매우 비슷한 방식의 비판을 가했지만 한국 불교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세노 기로가 얘기한 산송장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