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와 공산주의 -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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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최근 대안 사회 모델을 둘러싼 논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영국 사회주의자 개리스 젠킨스가 진정한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에 대해 설명한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려는 투쟁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꼭 나오는 질문이 있다. “사회주의가 무엇입니까?” “공산주의와 같은 것인가요?” 오랫동안 공산주의는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사회 질서가 공정한 미래 사회를 뜻했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노동자 운동의 목표를 공산주의로 정의했다. 나중에는 사회주의라는 말을 더 애용했다.
혁명 후, 러시아 볼셰비키당은 19세기 말 사회주의 정당을 뜻하던 ‘사회민주당’에서 ‘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스탈린주의가 득세해 공산주의라는 말을 더럽히고부터 대다수 좌파들은 사회주의자로 불리길 원했다.
이것은 단지 용어 문제인가? 한편으로, 우리가 어떤 용어를 사용할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미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사회는 노동자와 빈민 다수의 대중 행동을 통해 ‘아래로부터’만 건설될 수 있음을 명확히 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1852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했을 때, 그는 요시프 스탈린이 1920년대에 반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후 자행한 독재를 뜻한 게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말은 노동자들이 옛 착취 계급을 몰아내려면 자신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동일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자가 변화를 가져올 수 없고, 또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상인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를 거부했다.
19세기 초에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탁월하게 비판했을 뿐 아니라 사회가 어떻게 재편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무적인 비전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을 무기력한 희생자로 여겼다. 따라서 소수의 선각자들이 노동자들을 대신해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똑똑한 사람들이 사회에 적용하려고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업주와 노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현실의 계급투쟁을 표현한 것이다. 노동계급 투쟁이 완전히 성공했을 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실현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관한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 자체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혁명적 변화를 일으킬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사회를 건설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혁명 후 등장할 사회의 모습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가?
마르크스는 혁명 직후 무엇이 가능할지를 고민했다. 마르크스는 계급도 국가도 없고 인간의 개성을 완전하게 발전시키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협력적인 사회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지를 탐구했다.
공산주의 사회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1917년에 《국가와 혁명》이라는 소책자를 썼다. 이 책은 혁명 후 등장할 공산주의 사회의 첫 단계와 더 높은 단계의 관계를 논의했다. 레닌은 이것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로 보았다.
마르크스는 승리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려받은 ‘노동의 성과’를 어떻게 처리할지에서 시작했다. 사회의 총 생산물은 사회의 통제를 받을 것이다.
사회의 총 생산물을 모두 개인에게 나눠줄 수는 없다. 사회주의 사회는 설비·자재의 교체와 확대, 운영비용과 예비비, 복지 지출 등에 각각 얼마나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생산물 중 얼마가 개인 생산자들에게 분배될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집권적이면서도 민주적인 노동자 국가가 경제적 자원의 사용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이런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와 비교해 한 가지 큰 장점이 있다. 개인과 그들이 생산한 생산물 사이의 관계가 변할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개인과 생산물의 관계는 간접적이다. 개인들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것을 통제할 수 없다. 그들은 시장의 무계획성에 종속되며, [인간의] 필요보다 이윤이 먼저다.
개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임금을 받으며, 생산물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사회주의에서 개인과 생산물의 관계는 직접적일 것이다. 개인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것을 집단적으로 통제할 것이다. 그들은 더는 임금을 위해 노동력을 팔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사회와 개인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사회의 생산물을 어떻게 배분할지를 집단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개인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자본가 계급이 쫓겨났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완성돼야 할 것이다. 자본가 계급을 권좌에서 밀어내는 것은 점진적으로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으로] 노동 대중의 권력이 보장될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때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가 나타난 것처럼 혁명 과정에서 노동 대중이 자본주의 국가와는 완전히 다른 국가를 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노동 대중이 사회의 모든 측면을 통제한다는 뜻이다.
높은 단계
그러나 혁명이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 일인 반면, 새로운 사회 건설은 그렇지 않다. 첫 단계에서 더 높은 단계로 이동하기 위한 능력을 기르는 것은 훨씬 더 느린 과정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공산주의 사회는 스스로 자라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막 탄생한 것이다.”
이런 새로운 사회는 “경제적·도덕적·지적으로 자신이 태어난 자궁인 옛 사회의 흔적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부분적으로 옛 관계들이 지속될 것이며, 특히 사회 생산물에 대한 개인 지분 면에서 그럴 것이다.
개인은 자신의 노동을 사회에 제공하고 증서를 받을 것이며, 그 증서는 개인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노동의] 등가물을 사회에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줄 것이다.
형식을 보면 새로운 사회는 상당 기간 여전히 옛 사회의 임금 관계를 반영할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의 내용은 다를 것이다. 아무도 “거액 연봉”을 받지 못할 것이다. “거액 연봉”은 ‘노동’이 아니라 착취할 수 있는 능력을 반영하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소득’으로 생산수단, 즉 착취 수단을 살 수 없다.
자본주의가 약속했지만 지키기 못한 진정한 평등이 처음으로 구현될 것이다. 개인이 제공한 노동에 따라 사회 생산물이 개인에게 공정하게 분배될 것이다.
이런 원리를 오늘날에 맞게 적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첫째, 자본주의에서 생산되는 온갖 낭비(무기·광고·경영)가 아니라 광범한 다수 시민들의 이익을 증진할 것들(더 나은 주택·학교·보건)을 생산하는 데로 자원을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재분배
둘째, 너무 어리거나 늙거나 아파서 일을 못 하는 사람들에게 부를 대거 재분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보육 시설, 가족 수당, 연금, 질병 수당 등이 크게 증가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사회는 높은 수준의 고정된 기본 소득을 보장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노동시간을 단축시켜, 사람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 참가하고 문화적으로 자기 계발을 하기가 좀더 수월해질 것이다.
러시아는 가난한 나라였지만 1917년 혁명 후 러시아에서 이런 개혁 중 일부가 시행됐다. 경제적으로 훨씬 발전한 오늘날의 선진 공업국들에서는 훨씬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사회적·개인적 욕구에 맞춰 생산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도 인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풍요 덕분에, 생활 필수품을 둘러싼 개인 간 경쟁도 사라질 것이다.
경쟁이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역겨운 일들도 사라질 것이다. 한 사람을 평생 동안 한 가지 일만 하도록 묶어 두는 분업과, 우리를 지리멸렬에 빠뜨리는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 사이의 분리도 종말을 고할 것이다.
진정한 평등이 이뤄지면 개인들의 능력과 욕구가 불균등한 사실에 대처할 필요가 대두할 것이다.
노동자 국가도 소멸하기 시작할 것이다. 과거의 모든 계급 사회에서는 소수가 다수를 착취했고 국가를 통해서만 지배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착취가 종식되고 다수인 계급이 사회를 통제하게 되면, 사회의 특징 중 강압이 사라지고, 어떤 형태의 국가도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가 더는 계급 사회가 아니고 생산자들의 연합 권력이 되면서 심지어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사라질 것이다. 한 차원 더 높은 공산주의 사회가 나타날 것이다.
청년 마르크스는 더 고차원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 모두에서 뛰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을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사냥꾼도 어부도 목동도 비평가도 되지 않고도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식사 후에는 비평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일을 하고 싶을 것이다. 사회가 일단 생산수단을 충분히 발달시키면 노동 자체가 우리가 항상 벗어나고 싶은 기피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하듯 노동이 “삶의 필수적 욕구”가 될 것이다. 필수이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인간과 주변 세계와 맺는 만족스러운 관계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면 개인의 전인적 발전이 가능해질 것이며, 사회는 자신의 기치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라고 적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