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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에세이:
세계적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직면한 공통 쟁점들

지난주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중진국에서 신자유주의 경험의 국제비교’를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에 다녀왔다. 벤 파인, 봅 제솝, 알프레도 사드필호 등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진 좌파 학자들과 터키의 진보학계 인물들이 대거 참석한 이 학술대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흥미롭고 새로웠다.

우선, 신자유주의가 한물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체로 모든 좌파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듯했다. 봅 제솝은 1980년대 이후 대두한 신자유주의가 지난 1991년 옛 소련 블록의 붕괴와 함께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와 2001년 9·11 이후 한풀 꺾이기 시작했으며, 2007년 미국의 서프프라임모기지 위기와 함께 결정적으로 퇴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봅 제솝은 이와 같은 퇴조에도 불구하고 ‘경쟁력의 논리’, ‘금융화의 논리’, ‘상품화의 논리’로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무의식층’에 침잠해 계속 영향을 넓혀갈 것이라고 다소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벤 파인도 199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대두한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에서 보듯이 신자유주의는 국제적으로 퇴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도 산업자본의 축적이 금융시장과 의제자본의 논리에 의해 주도되고, 국가와 민간금융의 융합이 특징인 ‘금융화의 논리’는 오히려 더 확대되고 있다면서, 진보진영은 경제적 재생산을 ‘금융화의 논리’로부터 분리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봅 제솝과 벤 파인의 주장에 대해 ‘금융화의 논리’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를 이해하는 접근의 이론적·실증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신자유주의는 무엇보다 자본이 경제 위기에 따른 수익성의 위기를 노동에 대한 착취 강화를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알프레도 사드필호는 신자유주의를 노동에 대한 자본의 공격으로 환원하는 정치적 관점을 넘어서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의 이론적 분석과 대안적 축적체제 연구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발전주의 국가모델

터키 진보학자들이 발표한 터키의 신자유주의 경험에 대한 연구 결과들은 매우 흥미로웠다. 이 연구 결과들은 신자유주의가 국제적으로 퇴조하고 있다는 제솝과 파인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 터키에서는 투기적 금융자본과 자본주의적 농업기업의 득세, 공기업의 사유화, 프롤레타리아트화의 급진전 등에서 보듯이 신자유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점은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현재 집권 이슬람주의 세력인 ‘정의개발당’(AKP)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미국은 이슬람주의 세력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최대 걸림돌로 간주하고 있지만, 터키에서 신자유주의의 주도 세력은 다름 아닌 이슬람주의 집권당이었다.

한편 터키의 진보진영 다수는 이슬람주의 집권당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고 그 대안으로 1923년 터키 건국 이래 케말 아타투르크가 추진했던 국가주도적 발전모델, 즉 ‘민족주의적 발전주의 모델’의 복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장하준 교수나 일부 NL이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발전주의 국가 모델’의 복원을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였다.

실제로 다수의 터키 진보 학자들은 현재 터키 정치경제의 주요 대립과 갈등은 앙카라와 터키 동부 내륙 지역(아나톨리아)을 기반으로 한 이슬람주의 집권세력의 신자유주의와 유럽 대륙에 맞닿은 이스탄불을 거점으로 한 세속적 민족주의적 발전주의 세력 간에 형성되고 있다고 파악한다. 전자가 이슬람주의 계열 중소자본과 금융자본을 물적 기반으로 한다면, 후자는 대규모 산업자본과 관료·군부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터키에서도 신자유주의의 모순의 본질적 측면은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혹은 대자본과 중소자본 간의 모순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의 모순, 즉 자본일반의 모순일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터키 진보학자들은 최근 프롤레타리아트화의 급속한 진행 등을 비롯한 터키의 모든 사회경제적 문제의 근원을 자본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금융화’, ‘핫머니’ 등에서 찾는 케인스주의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급속한 프롤레타리아트화까지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환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실제로 터키의 노동자계급 총수는 1995년 8백41만 명에서 2000년에 1천49만 명, 2007년에 1천3백41만 명으로 급속하게 증가한 반면, 농민 총수는 1995년에 5백90만 명에서 2000년에 4백66만 명, 2007년에 3백15만 명으로 급감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급속한 프롤레타리아트화는 이미 19세기 서구에서, 20세기 후반기에는 우리 나라를 비롯한 주요 신흥공업국에서, 또 지난 세기 말부터는 중국의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최근 터키에서 가장 뜨거운 정치사회적 쟁점은 이슬람주의 집권당이 ‘관공서와 대학에서 여성들의 ‘히잡’ 착용 금지 규정’을 폐지한 일이었다. 이 정책은 아타투르크 이후 ‘세속화’와 서구화 차원에서 실시돼 왔다. 아이러니이게도 이슬람 집권당은 사회경제정책에서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자유시장주의 정책을 강행하면서, ‘히잡’ 착용 문제에서는 반대 입장을 채택했다.

그동안 터키의 세속주의 정권과 군부독재 정권이 채택해 온 여성의 ‘히잡’ 착용 금지법은 문화적 다양성과 자유에 대한 억압이므로 폐지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재 터키 진보진영에서는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반자본주의자’(Anticapitalist)와 같은 극소수 트로츠키주의자들만이 ‘관공서와 대학에서 히잡 착용 금지법’ 폐지 조처를 지지한다. 군부세력은 물론 대부분의 진보진영까지 이 조처가 ‘세속화’ 경향에 역행하고 여성 차별과 터키의 ‘재이슬람화’를 가속화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히잡

터키에서는 최근 이슬람주의 세력이 집권했음에도, 세속주의적 군부와 관료 세력이 강고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른바 국가이념인 ‘케말주의’에 대한 학술적 비판조차 형사 처벌될 정도다. 이들 세력은 한편에서는 현재 이슬람주의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히잡’ 착용 금지법 폐지 등에 대한 일부 국민들의 반대를 선동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터키 ‘반자본주의자’ 셈 우즌 동지가 ‘비밀 국가’라고 표현한 은밀한 비공식 채널을 형성해 끊임없이 군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990년 23.7퍼센트에서 2005년 9.2퍼센트로 급감한 데서 보듯이, 터키 조직노동자 세력은 취약한 편이다. 또, 최근 합법화된 터키공산당이 작년 총선에서 0.22퍼센트밖에 득표하지 못한 사실에서 보듯이, 급진좌파의 정치적 영향력도 아직 미미하다. 이런 점 등도 반신자유주의 투쟁에서 중요한 장애로 작용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터키에서는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전이 진행되면서, 사회 발전과 변혁에 대한 열망이 세계 어느 지역보다 더 고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2002~2005년 터키의 연평균 GDP 증가율은 7.5퍼센트나 됐다. 학술대회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터키 진보학자들의 높은 이론적 수준과 치열한 정치적 의식, 우리 나라 신촌에 해당되는 이스탄불의 ‘독립’ 거리에 넘쳐났던 청년층들의 열기는, 터키가 성소피아 사원으로 상징되는 비잔틴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불균등결합발전을 통해 새로운 세계사의 장을 열었던 것처럼 21세기에도 새로운 세계사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터키와 우리 나라의 경험에서 보듯이,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이에 맞선 국제적 투쟁은 상이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본질적으로 공통적인 계급과 민족 쟁점이 부각되고 있었다. 이는 반신자유주의 국제적 투쟁이 국제적 연대를 통한 상호 교류, 상호 학습 속에 서로 강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정성진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마르크스와 한국경제》,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저자이고, 《반자본주의 선언》,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 등의 역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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