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정치와 노동자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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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민족은 꼭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살아야 하는가?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하나의 민족이지만 두 국가 아래에서 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여러 민족이 모여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살아 가는 경우(가령 영국의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을 별개의 민족으로 여긴다)도 있다. 다른 한편, 전 세계의 화교는 한족(漢族)인데도 자기 부모 또는 조부모가 중국 본토 출신인지 타이완 섬 출신인지 정도에 대해서만 알 뿐, 자신을 중화인민공화국 국민 아니면 중화민국 국민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한반도의 남과 북에 두 국가로 나뉘어 살아 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는 식의 소박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반드시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한겨레 다수의 통일 염원은 민족의 의사를 거슬러 강대국들에 의해 분단이 이루어진 데 이어, 분단된 두 국가가 대량 살육이 수반된 전면전을 치른 적이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분단의 고통은 특히 전쟁이 남긴 상처에서 비롯한다.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당했다. 이로 인해 남북의 두 국민이 서로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더구나 냉전 시대 남북의 두 국가가 이 점을 더 부추겼다. 남한 국민은 북한 국민을 접촉해서는 절대 안 되었고, 그 역도 마찬가지였다. 상호 접촉을 중형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이 양쪽 모두(남한의 경우 국가보안법)에 있다.
그 결과 이산 가족이 생겨났다. 곧 만날 수 있겠지 하며 헤어졌던 가족이 반세기가 넘어 다수가 사망하기까지도 생사도 모르는 채 헤어져 있다.
그 동안 남북의 두 국가는 이산 가족 상봉을 각자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해 왔다. 그 결과 순전히 상징적인 규모의 상봉만이 있었다. 이 점에 비춰 볼 때 금강산에 이산 가족 상봉을 위한 면회소를 설치한다는 최근 발표를 반기면서도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남북 관계가 다시 경색되면 원점으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남북 관계는 이전 정부들 아래서는 말할 것도 없고 현 정부 아래서도 유화와 경색을 거듭해 왔다. 당장에 서해교전이 바로 엊그제 일만 같다.
이산 가족 상봉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자유 왕래가 이뤄져야 한다. 자유 왕래는 세계인권선언이 보장한 기본 인권이다. 하지만 남북의 두 국가가 이 기본권을 순순히 인정할 리 없으므로 노동자 운동이 자신의 강령에 포함시켜야 한다.
분단과 전쟁 경험은 또한 특정 사상만이 허용되는 비민주적 정치를 조장했다. 남한 국가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데, 자유민주주의는 사상과 그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용인하는 정치 체제이므로 분명한 모순이다.
심지어 군부 치하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사상조차 억압당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야당마저 탄압했다. 이것은 더 분명한 모순이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억압의 잔재가 국가보안법과 각종 검열의 형태로 남아 있다.
포퓰리즘
여러 사상들이 민간에서 토론되고 논쟁되도록 놔 두고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근대 자유주의의 핵심인데, 이 경험이 우리 나라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노동자 운동 안에 자유주의적 경향이 상당히 존재한다. 노동자 운동내 자유주의는 자유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지식 계층들(교수·변호사·성직자·문인 등)을 매개자로 해 지배 계급의 자유주의적 소수파와 동맹하는 포퓰리즘의 형태를 취한다. 가령 일각에서 노무현을 지지하는 것이 두드러진 사례이다.
계급 협력 사상으로서 포퓰리즘은 개량주의의 한 형태이므로 지배 계급에 의해 이용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전임 정부와 가장 두드러지게 다른 김대중 정부 통치 전략이다. 이전 정부의 대북 정책은 좌파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얻었다 해도 김영삼이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송환하고 겨우 1년 동안 누린 환상처럼 일시적이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집권 기간 대부분 동안에 포퓰리즘적 좌파의 환상을 누리고 있다. 이 개량주의적 환상을 이용해 김대중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탄압할 수 있었다. 남북 정상회담의 여파 속에서 일어난 롯데 호텔 노조와 사회보험노조의 저항을 떠올릴 수 있다.
군국주의
분단은 군국주의를 부추기기도 했다. 내가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한 번 전면전과 대량 살육을 치른 경험 때문에 남북한의 두 국가는 서로 불신을 말끔히 거두지 못한 채 꾸준히 군사력을 증강해 왔다. 냉전이 끝났는데도 그래 왔고, 오히려 냉전이 끝났기 때문에 더욱 그래 왔다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옛 소련이 양대 초강대국으로서 세계를 양분하고 각자 자기 진영을 단속하던 냉전 시대가 끝나자 세계는 오히려 더 불안정해졌다. 양극 시대에서 다극 시대로 전환에 뒤따르는 불안정인 것이다.
더구나 북한측으로서는 소련이라는 비빌 언덕이 사라졌기 때문에 독자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남한은 남한대로 불안정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해 왔다. 그래서 이른바 현 정부의 “햇볕 정책” 아래서도 해마다 군사 예산이 증가해 왔던 것이다.
과거에 분단은 미국의 원조(군사 및 경제 원조)와 미국 시장 접근이라는 이점을 한국 경제에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점이 사라졌다. 미국은 더 이상 원조하지 않고 오히려 한국산 철강 제품이나 자동차에 무역 장벽을 세우고 있다. 이제 한국 정부는 미국 무기의 주요 구매자가 돼 있다.
물론, 남북이 통일된다 해도 통일 한국이 군사력을 줄인다는 보장은 없다. 불안정이 한반도보다 훨씬 더 넓은 세계적 규모의 것이고 강대국들이 조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교육·의료·복지로 돌려져야 마땅한 재정이 분단으로 말미암아 더 쉽게 군사비로 돌려지고 있다. 노동자 운동은 ‘무기가 아니라 복지’라는 요구를 자신의 강령 안에 포함시키고 그것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가 북한에 너무 “퍼주는” 것 아니냐는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동아일보〉의 감정적 선동의 거짓됨을 폭로하고, 기근을 겪고 있는 북한인들에게 식량을 주는 것도 남북한 간 긴장을 줄이는 데 이바지한다. 그리고 탈북자를 환영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절대 다수는 굶주림을 피해 도망한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탈북자는 식량난·가난과 관계 있지, 사회주의와 관계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막대하게 증대시켜 놓은 생산력 위에서 건설된 풍요한 사회이지, 헐벗고 굶주린 사회가 아니다. 사회주의를 표방한다고(“우리식”이라는 한정어가 붙어 있긴 하지만) 해서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남한 노동자 운동은 탈북자를 박해하는 북한 정부와 중국 정부를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라고 중국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 이 일을 회피함으로써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이 우리 운동의 허를 찌르며 인도주의자 시늉을 할 수 있게 놔 둬서는 안 된다.
외국 군대의 주둔
분단과 미군 주둔 문제를 따로 떼어 다룰 수 없다. 가령 미군 장갑차에 의한 의정부 여중생 압사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군이 배짱을 부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분단 상황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남한 국민의 구세주인 양 착각하기 때문에, ‘여중생 죽은 것 갖고 왜들 난리냐’ 하는 식으로 제딴에 불만이다.
몇 년 전 오끼나와에서 미군이 현지 주민인 소녀를 강간한 일이 일어나자 거의 모든 오끼나와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해, 범인을 엄벌하고 미국 대통령(당시 클린턴)이 직접 사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조지 W 부시가 우리 나라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일은 없었다. 여중생 압사범 미군들이 엄벌을 받을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미국 정부는 자기네가 대한민국을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지켜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은 우리 민족이 통일을 이루더라도 군대를 계속 주둔시키려 할 것이다.(일본은 분단돼 있지 않은데도 오끼나와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북한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패권을 그 곳 열강(일본·중국·러시아)에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 분단 상황이 미군 주둔 명분을 더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사실이다. 분단이 끝나더라도 계속 주둔하려 하겠지만, 분단이 계속되는 동안 좀더 쉽게 주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물음 던지기
분단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남북한 간의 평화가 역전시킬 수 없을 만큼 확고히 정착되도록 만드는 것이 미군 철수 운동에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 그런데 이것을 정부에 맡겨 놓을 수 있을까? 정상회담이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다 줄까? 설사 남북의 두 국가가 상시적 평화 체제 확립에 합의한다손 치더라도 미국이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중국·러시아에 대한) 맹주권 천명을 위해 북한을 속죄양 삼고 있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남북이 합의한 평화는 일시적인 것이 되지 않을까? 게다가 설혹 상시적 평화가 도래하더라도 그것이 노동자 계급에 대한 억압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라면 노동자 운동은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고 인내해야 하는 것일까? 한나라당·〈조선일보〉가 북한을 비판하고 민주당·〈한겨레〉가 북한을 변호하고 있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는 얄궂은 상황에서 북한 사회, 주체사상, 남한내 그 지지자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사회근본변혁적 비판을 회피해야 하는가? 김하영 동지의 빼어난 신간 저서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제시한다.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 탈북자, 주한미군 범죄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많지 않은 것이 아쉽긴 하다. 하지만 지은이는 이 문제들을 제대로 보기 위한 출발점인 더 커다란 시야를 제공하고 있다. 즉, 동아시아에서의 맹주권 공고화를 추구하는 미국, 현상 유지를 위해 애쓰는 미·일·중·러·남북한 지배자들, 그럼에도 점증하는 불안정과 군국화 경향, 북한 사회의 진정한 성격, 남한 피억압자 운동의 지도적 이데올로기 등을 제대로 보는 눈 말이다.
그리고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의 일부로 지목하고 북한을 적대시하는 것을 넘어 대북 전쟁 책동을 하고 있다고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가능성은 단기적으로 크지 않다. 북한은 이라크보다 군사력이 훨씬 더 강하고, 저항도 훨씬 더 완강하게 할 것이며, 일본 도쿄를 쑥대밭으로 만들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단기적 목적은 봉쇄를 통한 북한의 고립화와 마침내 굴복이다.
하지만 장기적 전망은 장담할 수 없다. 지은이는 전쟁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 만족적 수동성에 빠져 있던 사람들(가령 1994년 6월 한반도 위기 때 〈내일신문〉 장명국 씨가 전형적으로 이런 태도를 취했고 나중에 자신의 예언이 맞았음을 자랑했다)과 노동 운동은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과 경제적 생활 조건에 집중해야 한다며 협소한(선거, 의회, 공식 정당 등 제도권) 범위를 넘는 정치 쟁점은 회피하는 사람들에게 더 긴 눈으로 볼 줄 알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정치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