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의 날 1백 주년:
아직 오지 않은 해방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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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십 년 동안 여성들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우리 할머니 세대만 해도 여성들은 채 스무살이 되기 전에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과 결혼하는 일이 흔했고, 끝없이 밥을 짓고 바느질과 청소를 하며 대가족을 뒷바라지하곤 했다. 생활의 모든 면에서 엄격한 단속을 받았고 취업 장벽도 높았다.
1960년대 급속한 공업화 이후 여성 노동자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현재 여성 노동자는 전체 노동 인구의 41퍼센트를 차지하고 그 중에서도 기혼 여성이 다수가 됐다.
고등교육 기회가 비약적으로 확대되면서 여성들은 다양한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주요 국가고시 여성 합격자 수는 남성과 엇비슷해졌고 지난해 외무고시 여성 합격자는 67.7퍼센트로 남성 합격자를 추월했다. 언론들은 1등을 도맡는 여학생들 때문에 남자아이를 남녀공학에 보내지 않으려는 세태나 각종 수석을 휩쓸며 ‘여풍’을 일으키는 여성들의 사례를 요란스레 쏟아낸다. ‘알파걸’과 ‘골드미스’ 같은 신여성들이 남성들의 지위를 흔드는 시대라는 것이다.
확실히 여성들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집 밖에서 임금 노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증가하면서 여성들의 사고와 생활 방식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최근 독신 여성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꼭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대답은 40퍼센트를 넘었다. 1980년에 25~29세 여성 중 독신 비율은 14퍼센트에 그쳤지만 2005년에는 60퍼센트였다. 가임 여성 출산율은 1.13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고 이혼도 흔한 일이 돼 가고 있다.
이제 성 해방?
여성들도 성적 모험을 즐기라는 충고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고, 심야 케이블방송 토크쇼에서는 여성들이 성생활을 놓고 거리낌없이 대화를 나눈다.
그럼 이제 여성들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건가? 정말로 여성 억압은 완화된 걸까?
성적 자유의 확대는 분명 여성들의 숨통을 틔워 줬지만 여성을 눈요깃거리로 여기는 낡은 차별과 공존하고 있다.
여성의 인격은 종종 그의 지성과 재능 대신 “착한 가슴”이나 “진실한 몸매” 등으로 채점된다. 〈101 셀러브리티 핫 바디〉 같은 프로그램들이, 스타들의 몸매를 부위별로 훑으며 ‘탄탄함과 균형감’을 논하는 게 쇠고기 등급 심사와 큰 차이가 있나 싶다.
이 틈에 기업들은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 한 해 24조 원이라는 매춘산업 외에도 모바일 화보, 성인용 채널과 프로그램들은 높은 매출을 올리고 있고, 몸매 관리·미용 산업 규모도 26조 원에 이른다.
성의 개방화 한편에는 ‘단정치 못한 여자’를 손가락질하는 이중적인 성 도덕도 살아 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경찰에게 ‘여자가 왜 그 시간까지 집에 가지 않았나’, ‘옷은 뭘 입고 있었나’ 등 ‘당해도 싸다’는 식의 추궁을 받는 일은 지금도 비일비재하다.
여성 노동자들의 삶 ― 이중의 굴레
‘여성 상위 시대’라는 언론의 호들갑이 사실이라면, 사장, 교장, 국회의원 같은 명망 있는 직업의 상당수도 여성이어야 한다. 그러나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채 15퍼센트가 안되고, 공기업 고위 임원 중 여성은 단 2퍼센트(2007년)에 그쳤다.
‘유리천장’(위가 보이지만 올라갈 순 없는)은 지금도 단단하고, 숨막히는 차별이 다수 여성들의 삶을 지배한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불평등한 임금은 여성 노동의 여전한 특징이다. 여성 임금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비율이 67.6퍼센트에 이르고, 남성 임금의 64.2퍼센트만을 받는다(2006년). 남녀 임금 격차는 OECD 국가들 중에서도 제일 높다고 해마다 지적받지만 50대 대기업의 임금격차는 지난 2000년에 비해 5년 동안 50퍼센트나 더 벌어졌다.
유통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많은 여성 노동자들은 다리가 퉁퉁 부은 채로 쉬는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계산대에 서서 바코드를 찍고, 무거운 박스를 나르느라 몸이 성한 데가 없다. 지난해 여름 홈에버 점거 농성장을 방문한 의료진은 여성 노동자들 십중팔구가 화장실도 못가고 일하느라 방광염에 걸려 있다고 진단했다.
사측의 감시 때문에 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서비스업 노동자들은 자다가도 “네, 고객님”하고 일어날 정도다. 미국 월마트에서는 노동자들의 얼굴에 몇십 초 동안 미소가 보이지 않으면 감시카메라가 자동으로 경고를 보내고 해고까지 가능한 시스템을 가동했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아침에 출근카드를 찍는 순간부터 1분 1초까지 감시·통제하는 기술은 소름끼치도록 치밀해졌지만 여성들의 육아와 가사 부담을 덜어줄 서비스는 여전히 낙후해 있다.
보통 부모들이 선호하는 국공립 시설에 아이를 맡기려면 출산 전부터 예약을 하고 몇 년을 기다리는 ‘전쟁’을 치러야 한다. 정부의 보육 재정 부담률은 OECD 평균(70퍼센트)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24.5퍼센트다. 이는 개별 가정에 돌아가는 부담을 늘리고 여성 억압이 지속되는 데 커다란 구실을 한다. 자녀 한 명을 키우는 데 들어가는 총 양육비가 2억 3천2백만 원에 이르는 현실에서, 이것은 남녀 노동자 모두에게 불우한 일이다.
육아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 직장을 떠났던 여성들은 저임금일지언정 다시 일터를 찾아야 한다는 압력을 받으며 이중 삼중의 굴레에 갇힌다. 성공한 커리어 우먼, 나이를 잊은 듯한 외모, 환상적인 섹스파트너, 헌신적인 모성과 알뜰한 살림 솜씨까지 ‘수퍼우먼’의 덕목은 갈수록 까다로워진다.
자매애? - 날로 커지는 여성들 간의 양극화
첨예한 사회 양극화 속에서 여성들 사이의 격차도 더 뚜렷해졌다.
삼성 하이비트 해고노동자 최세진 대표는 이건희의 부인 홍라희가 사들인 1백억 원짜리 그림 〈행복한 눈물〉은 집단 해고되거나 백혈병으로 죽어 간 삼성 노동자들의 “한맺힌 피눈물”이라고 분노한다. 이명박의 부인 김윤옥이 한국타이어 부사장인 사위가 선물한 5천만 원 짜리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동안 한국타이어는 노동자 16명이 잇따라 숨진 ‘죽음의 공장’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처럼 최고 권력층에 오른 소수 여성들은 노동계급 여성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무심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이다.
최초의 여성 총리 한명숙은 면담하러 찾아온 KTX 승무원들을 외면했고, 승무원들은 경찰에 폭력적으로 연행됐다. 명품 브랜드 MCM으로 유명한 여성 CEO 김성주는 “실력이 갖춰지지 않은 여성을 사회가 배려해 주는 것은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말한다. 보육 문제도 정부에 기대지 말고 ‘스스로 해결사’가 되라고 한다. 여성 노동자는 사장이 여성이더라도 이해와 배려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1910년 미국의 사회주의자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이 말했듯, “노동자에게 여성 간의 자매애는 남성 간의 형제애나 마찬가지로 공허한 속임수일 뿐이다.”
해방의 열쇠 ― 남녀 노동자의 단결
억압은 변화된 성의 관계와 사회 관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명박이 “여성부를 두면 다른 사람들이 더 소외된다”며 여성가족부 폐지를 추진한 것은 얼마나 역겨운가. 이명박은 큰소리쳐 왔던 무상보육 공약도 최근 발표한 1백92개에 이르는 방대한 국정과제에서는 쏙 빼버렸다.
반면 이명박이 추진하려고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남녀 노동자들을 모두 고통에 빠뜨릴 것이다.
노무현을 두고도 “여성, 고령자, 장애인 등 보호 위주의 인기영합적 정책에 치중”했다고 펄펄 뛰는 기업주들이 무엇 하나 순순히 내주지 않을 것이다. 여성 해방을 달성하려면 사람들의 삶보다 이윤이 우선인 자본주의를 무너뜨려야 한다. 전쟁 같은 쓸모없는 일에 낭비하는 자원을 빼앗아 육아와 가사 사회화, 노동시간 단축에 쓴다면 여성들도 삶을 자유로이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는 공공 세탁소와 탁아소, 공공 식당, 혼자된 여성이 살 집을 제공했고, 낙태와 이혼을 합법화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변화들은 스탈린의 반혁명으로 후퇴했지만, 러시아 혁명이 펼쳐 보인 여성 해방의 가능성은 소중한 영감을 준다.
오늘날 착취와 억압을 무너뜨릴 여성들의 잠재력은 더욱 커졌다. 90년 전 러시아보다 더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일하며 이 사회의 부를 창조하고 있다. 이들이 정부와 사장들에 맞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다면, 진정한 변화를 성취할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럴 때 성 차별 같은 보수적 관념도 붕괴하기 시작할 것이다. 지배자들은 노동자 투쟁이 벌어지면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노동자 계급의 관점에서 보면 이 때만큼 제대로 보이는 게 많은 시기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크고 작은 실마리들을 목격하고 있다.
뉴코아·이랜드 투쟁은 이랜드 사측에 적어도 5백억 원 이상의 매출 손실을 입히며 지배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여성이 나약하고 수동적이라는 편견을 부숴 버렸고,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이 단결해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이랜드일반노조 김경욱 위원장은 지난해 출소 직후 〈맞불〉과의 인터뷰에서 “점거파업에 참가했던 조합원들은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조합원들이 ‘우리가 투쟁에 앞장설 테니 위원장은 따라오기만 하라’고 할 정도”라며 여성들의 놀라운 능동성을 증언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세계적 운동에서도 여성들의 참가와 기여가 눈부셨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정당화하며 여성해방을 들먹였지만, 출산 중 사망률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을 만큼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처지는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
여성 해방을 향한 노력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 한 가운데 있어야 한다.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단결은 착취와 억압 모두를 끝낼 중요한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