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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의 도박

부시의 도박

이수현

9월 12일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유엔 총회 연설에서 유엔이 이라크를 즉시 무장해제시키지 않으면 미국의 독자 행동이 불가피하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이르면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내일신문〉 9월 13일치).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유엔이 부시의 ‘막가파’ 식 전쟁몰이에 제동을 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은 결코 평화를 위한 기구가 아니다. 유엔은 제국주의 열강이 저지른 침략 전쟁에 그럴듯한 명분을 제공하는 외피 노릇만 해 왔을 뿐이다.

유엔은 1991년 제2차 걸프전을 승인했다. 그 전쟁으로 죽은 이라크인이 20만 명이 넘는다. 유엔은 1991년 이후 10년 넘게 지속한 이라크 경제 제재도 승인했다. 그 때문에 이라크 어린이들 5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평범한 이라크인들이 1백만 명 넘게 죽었다. 유엔은 작년에 부시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것도 막지 못했다. 미국의 폭격이 끝난 뒤 유엔 관리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갔지만, 혼란스런 상황은 여전하다. 또, 유엔은 올해 초에 선진국들이 아프가니스탄 지원을 위해 약속한 기부금도 거의 받지 못했다.

부시는 이라크가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위반한 것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유엔 결의안을 무시한 것은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직후 유엔에서 통과된 안보리 결의안 242호는 요르단강 서안·가자지구·골란 고원·시나이 반도 등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이 즉각 철군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유엔은 1973년 안보리 결의안 338호에서도 이를 재확인했지만, 이스라엘은 다시 무시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점령한 채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국가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안보리 결의안을 위반한 건수는 이라크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러나 미국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는커녕 오히려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부시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문제삼지만 이스라엘의 대량살상무기는 눈감아 준다. 이스라엘은 아랍 나라의 도시들을 겨냥한 핵탄두를 2백여 기나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시는 이라크가 세계는 물론 중동의 인접국들도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동에서 전쟁에 찬성하는 나라는 이스라엘뿐이다.

진퇴양난

부시는 유엔 무기사찰단이 이라크 내 모든 건물을 자유롭게 조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이 보유한 대량 살상 무기에 대해서는 그런 조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미국은 화학 무기를 규제하려는 국제 협약에서 탈퇴했다. 또, 작년에는 생물무기 협약 5차 평가 회의도 무산시켰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지난해 말 탄저균 공격에 사용된 세균의 출처가 미국 국방부 실험실이라는 사실을 시인했다. 미국은 또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미국이야말로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한 유일한 국가다.

1977년 12월 12일 통과한 유엔 총회 결의안 32/84호는 대량 살상 무기를 “핵폭탄, 방사능 무기, 치명적인 생화학 무기”로 규정하고 있다. 제2차 걸프전에서 미군이 사용한 열화우라늄탄과 연료-공기 폭탄(공중에서 연료와 공기의 혼합 가스를 살포한 다음 점화·폭발시켜 주변 공기를 흡수함으로써 반경 1킬로미터 이내를 질식 상태로 만드는 폭탄)은 바로 여기에 속한다. 또, 발전소, 상하수도, 관개 시설, 병원 등 이라크의 민간 시설을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은 “민간 시설을 공격이나 보복의 표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제네바 협정 52조를 위반한 것이다. 미국의 전쟁광들은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얼마 전에 미국 정부 관리들은 TV에 출연해 이라크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위성 사진을 보여 주면서 핵무기 저장고 건설 현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며칠 뒤에 백악관은 그 사진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시인했다. 미국은 1991년 제2차 걸프전 때도 이라크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군사위성 사진을 조작했다.

부시는 또 1998년도 국제원자력기구(IAEA)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이라크가 6개월 안에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보고서의 실제 내용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즉, 이라크가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부시의 전쟁몰이는 결코 누그러질 기미가 없다. 이번 전쟁의 진정한 목적이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나 “테러 위협”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부시가 노리는 것은 석유 지배력과 전 세계를 좌우할 수 있는 패권이다. 부시 일당은 “테러와의 전쟁”을 이용해 전 세계에서 미국의 눈에 거슬리는 정권들을 갈아치우고 싶어한다.

미국의 〈스트랫포〉는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파괴하면 두 가지 사실을 전 세계에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 미국의 막강한 힘에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점. 둘째, 미국은 이슬람주의 운동만큼이나 끈기 있고 단호하며 훨씬 더 강력하다는 점.” 그리고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은 알카에다나 호전적인 이슬람주의와 싸우는 것과는 달리 쉽게 성공할 수 있다. 세계 도처에 그물처럼 뻗쳐 있는 조직을 파괴하는 것보다는 대규모 군사력을 보유한 국민국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 미국에게는 훨씬 유리하다.”부시는 일단 전쟁이 시작하면 유럽 각국이 미국 편에 설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동의 석유는 미국보다도 독일 등 유럽 각국에 더 큰 경제적 파장을 미친다. 게다가 이라크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석유 매장량이 세계 2위다. 〈비즈니스 위크〉가 시사했듯이, 유럽 정권들도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뒤 “경제적 파이”를 나누는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영국 고위 관리의 말처럼,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의 전쟁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는 그럴듯한 유엔 결의안이 제시되면 가담할 것이다.” 부시가 굳이 유엔 무기 사찰이라는 절차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데는 이런 계산이 깔려 있었다. 사실, 부시 일당은 어떤 점에서 진퇴양난의 궁지에 몰려 있다. 새로운 전쟁에 대한 국내외 반발이 거세다. 미국 공화당 정권에서 국무장관이나 대통령 안보보좌관을 지냈던 강경파들, 즉 헨리 키신저, 제임스 베이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같은 자들도 부시에게 신중하라고 촉구했다. 물론 그들이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독자 행동이 초래할 고립과 반발을 고려해 전쟁 시기, 방법, 후세인 이후의 대안을 제대로 선택하라는 것이다. 여론도 점차 나빠지고 있다. 지난 8월 말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이라크에 대한 지상군 파병 지지율이 53퍼센트로 떨어졌다. 지난해 11월에는 74퍼센트였고 지난 6월에는 61퍼센트였다. 그렇다고 부시가 지금 뒤로 물러설 수도 없다. 그 동안 “악의 축” 이라크의 “정권 교체”를 너무 많이 공언했고, 전면전에 대비한 군사 준비도 꾸준히 진행해 왔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후퇴하면, 부시 정부는 거의 회복하기 힘든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이다. 부시는 어떻게든 전쟁을 밀어붙여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한 모험이 될 것이다. 제2차걸프전 때와 달리 중동 국가들이 미국의 전쟁에 찬성하지 않는 것은 아랍 민중의 반미 감정이 폭발해 자국 정부를 날려 버릴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최대 원조 수혜국 이스라엘이 50년 넘게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억압해 왔다. 미국은 이라크를 짓밟은 뒤 10년 넘게 경제 제재를 가하면서 이라크 민중에게 죽음과 고통을 강요해 왔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때문에 전통적인 친미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업률은 10년 전보다 두 배 이상 뛰어올랐다. 아랍 민중의 반미 감정이 거센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중동 각국의 정권들은 대부분 억압적인 권위주의 체제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그 알량한 부르주아 의회조차 없다. 중동 각국에는 피억압 민중의 불만과 분노를 흡수해 완화시킬 기제가 거의 없다. 미국의 전쟁은 중동에 사회적·정치적 격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2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책들 때문에 고통을 겪어 온 “미국의 뒷마당” 남아메리카도 불안하다. 9월 11일은 1973년 칠레에서 미국의 후원을 받은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날이기도 하다. 피노체트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옌데 정부를 전복하고 군사 독재를 수립해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미국은 남아메리카의 군사 정권들에게 고문·납치·암살 기술을 가르쳐 주었고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처럼 눈에 거슬리는 정권은 제거하려 했다. 남아메리카는 지난해 말 폭발한 아르헨티나 민중 봉기 같은 사태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과도 같다. “미국 재무부 산하기관”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IMF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들이 아르헨티나 경제를 파탄냈다. 10월에 있을 브라질 대선에서 좌파 후보 룰라의 당선이 유력해지자 미국은 IMF를 앞세워 압력을 넣고 있다. 미국은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콜롬비아에서 우익 정부군을 무장시키면서 군사 개입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이 전쟁을 벌인다면 내년 1월 말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리는 제3차 세계사회포럼은 대규모 반미·반전·반자본주의 시위 현장이 될 것이다. 아마도 부시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대중적 반전 운동에 맞닥뜨리는 상황일 것이다. 미국의 지배자들에게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의 베트남 반전 운동은 떠올리기 싫은 악몽이다. 1968년 미국의 대규모 반전 운동은 역사상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던 현직 대통령 린든 존슨이 재선 불출마 선언을 하게 만들었다. 그 뒤 계속된 사회·정치 위기는 1974년 대통령 닉슨을 중도 사퇴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국제적으로 그런 대규모 반전 운동을 건설하는 데 유리한 상황이다. 1999년 말 시애틀 시위 이후 계속 성장해 온 전 세계 반자본주의 운동은 나름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맞서는 반전 운동과 결합하는 데 대체로 성공하고 있다.

지난 4월 부시 방문 반대 시위에 10만 명이 참가한 독일에서 지금 반전 여론은 80퍼센트가 넘는다. 그래서 3년 전 발칸전쟁을 지지했던 독일 총리 슈뢰더는 얼마 전에 “유엔이 승인하든 안 하든 내가 총리로 재직하는 한 독일이 전쟁에 참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야 했다. 오는 9월 28일 영국에서는 베트남 전쟁 이래로 최대의 반전 시위가 벌어질 듯하다. 이런 대중적 반전 분위기는 각국 지배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미국의 국제적 고립을 강요할 수 있고 미국 내 반전 운동에 자극과 영감을 줄 수 있다. 이것은 경기 침체와 지지율 하락에 시달리는 부시를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다. 부시가 벌이려는 전쟁은 세계에 안정과 질서가 아니라 불안정과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