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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전쟁저지연합에서 배운다

영국 전쟁저지연합에서 배운다

이수현

9월 28일 런던의 반전 시위는 영국의 반전 운동 세력이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노력해 온 성과였다. 작년 9·11 직후 출범한 전쟁저지연합(이하 연합)은 초기부터 여러 가지 중요한 결정들을 통해 대중 운동을 건설할 수 있었다.

연합은 정치 좌파, 평화 운동, 노동조합 운동, 무슬림 단체 등 광범하고 다양한 세력들을 결집시켰다. 인종의 벽을 뛰어넘어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이는 각 세력들이 전통적 지지 기반 외에 더 광범한 사람들과 접촉하기 쉽게 해 주었다.

연합은 또, 반전 운동이 영국과 미국 정부를 주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늘 분명히 했다. 따라서 탈레반이나 사담 후세인도 동등하게 비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항상 경계했다. 그들을 지지하거나 그들에게 어떤 환상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면 전쟁광들의 책략에 말려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합은 특수한 반제국주의 강령을 거부했다. 그리고 전쟁·인종차별·공민권 억압 등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환영했다. 만일 연합의 회원 자격을 제국주의를 이해하는 사람들로 제한했다면, 진정으로 광범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합의 지도부는 대부분 반제국주의자들로 구성됐다. 그들은 미국 제국주의를 전략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과거 10년 간의 여러 전쟁들을 전반적인 제국주의 전쟁의 일부로 연관지을 수 있었다.

지난해 11월 18일, 연합이 주최한 아프가니스탄 전쟁 반대 시위에는 무려 10만 명이 참가했다. 이것은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상황에서 대단한 성공이었다. 이 시위에서 아마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인종적 다양성일 것이다. 그 시위는 라마단 기간에 열렸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음식을 먹어도 되는 시간이 됐을 때, 트라팔가 광장에서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이 함께 어울려 음식을 나눠 먹었다. 그 시위에는 비무슬림 흑인과 아시아인들도 함께 참가했다. 국적과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반전 시위에 참가했다. 이것은 영국과 전 세계 반전 운동에서 하나의 이정표였고, 영국을 국제 반전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로 끌어올린 계기였다.

반전 시위에 무슬림이 참가하자 영국의 좌파 내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좌파는 고유한 의복·문화·종교를 고수하는 무슬림들은 모종의 “근본주의자”이기 때문에 함께 반전 운동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합은 반전 운동에 참여하는 무슬림을 항상 환영하고 존중했다. 젊은 무슬림 여성들이 앞장서서 반전 운동을 조직하고 정치적 지도부로 떠오르자 편견은 점차 사라졌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고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자, 연일 폭격이 지속되고 있을 때만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 그럼에도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은 말할 것도 없고 카슈미르, 팔레스타인, 점차 미국의 다음 표적으로 떠오른 이라크에도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에 벌어질 전쟁의 규모와 속도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합을 유지하고 계속 끌고 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연합의 향후 전망을 둘러싸고 수많은 제안과 요청이 있었다.

연합의 지도부는 올해 1월 말 주영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1천 명이 참가한 가운데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3월 초에 전국 규모의 반전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을 둘러싸고 또 논쟁이 벌어졌다. 많은 좌파는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무슬림 단체나 평화 운동가들의 열의도 지난해 11월보다 훨씬 적다는 사실 또한 분명했다.

그러나 연합의 지도부는 연합이 아직 건재하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과 지지자들을 불러모으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더 광범한 사회 내 반전 분위기를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연합의 시도는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시위에 2만 명이 참가했고 강력한 반제국주의 중추가 형성됐다. 노조 총회가 열리는 기간에 연합은 작지만 중요한 모임을 많이 가졌고 거기서 노조의 지지를 끌어 낼 수 있었다.

올해 봄에 팔레스타인 사태가 폭발해 꽤 큰 규모의 시위가 한 달 사이에 두 번이나 벌어졌다. 연합은 이 시위들을 적극 지지했다. 그 직후 연합은 노동당 전당대회 직전에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4월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들을 주최한 ‘영국 무슬림 협회’는 제2차 인티파다 기념일에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연합과 무슬림 협회 양측은 두 개의 시위를 따로 조직하기보다는 하나의 대규모 시위를 함께 조직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 시위의 쟁점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두 가지가 될 것이다. 초여름에 일부 사람들은 이라크가 쟁점이 될 것인지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합의 지도부는 이라크 침공이 의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확신했다. 9·11 직후부터 이라크 침공은 부시 행정부의 핵심 목표였고 그들은 매우 정밀한 시간표를 짜 두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상황, 특히 예닌 사태 때문에 부시 행정부의 계획이 틀어지긴 했지만, 그들의 기본 구도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여름이 지나면서 연합 지도부의 분석이 옳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라크가 주요 정치 의제로 부상했고, 국민들의 반전 여론을 무시한 영국 정부의 전쟁 몰이는 국내에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노총(TUC) 내의 상당수 소수파가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고, 크고 작은 도시에서 열린 집회에서 노동당 국회의원 조지 갤러웨이 같은 연사들이 인기를 끌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도 젊은이들 사이에 대규모 반전 운동이 시작되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 이 모든 흐름이 모여 9월 28일 역사적 시위로 이어졌고, 이 시위는 전 세계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시위 다음 날, 베트남 참전 군인이자 〈7월 4일생〉의 작가인 론 코빅이 연합에 이메일을 보내 “당신들이 전 세계에 영감을 주었다.” 하고 말했다. 멀리 일본이나 미국의 반전 운동가들한테서 요청과 메시지가 쇄도했다.

그 시위는 기존 활동가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고 새로운 활동가들을 끌어 모았다. 영국 전역의 여러 도시에서 활동가들이 매주 모여 운동을 진전시킬 수 있는 방안들을 논의했다. 10월 31일 “이라크 공격 반대의 날”에 벌어진 각종 반전 행동은 운동의 열기를 가정으로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연합은 엘리트주의의 함정을 피하기 위해 애를 썼다. 다양한 정당들, 국회의원들, 유명인사들이 반전 운동을 후원했지만, 그런 상층 인사들에게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연합은 진정한 기층 운동이 되고자 했고, 그 힘은 다양한 세력들의 공동 활동에서 나왔다. 연합이 직접 행동과 시민 불복종을 얘기할 때, 그것은 다수의 노동조합원, 학생, 평화운동가 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대중 직접 행동이었다. 소수가 나서서 독자 행동을 한다거나 비폭력 직접 행동 기술을 훈련하는 것도 좋지만, 그런 엘리트주의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연합은 외향적인 운동을 구축하기 위해 작업장이나 노조를 중심으로 조직을 건설했다. 게이와 레즈비언 들을 겨냥한 “집단적 반전 커밍아웃”(Out Against the War)이나 “전쟁 반대 예술인들” 같은 조직들을 건설했다.

연합은 각 지역에 뿌리내리고 민주적·개방적 태도로 최대한 다양한 세력을 참여시키면서 “테러와의 전쟁” 반대 운동을 일관되게 벌임으로써 진정한 대중 운동을 건설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