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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살인
황재민
“고문 치사 사건은 검찰 사상 초유의 일이며, 민주 인권 국가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10월 26일 터진 서울지검 고문치사 사건 때문에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을 갈아치우면서 김대중이 한 말이다.
그러나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1월 7일까지 국가인권위원회에는 검찰의 인권 침해 사례가 하루에 한 명꼴로 접수되고 있다. 대부분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일어난 갖가지 가혹 행위와 폭행 등이었다.
이번 고문치사 사건은 ‘국민의 정부’ 검찰이 군사 정권 시절 검찰보다 나아진 게 별로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한 사례일 뿐이다.
검찰은 항상 정권 유지 도구였다. 검찰의 인사권은 대통령이 쥐고 있다. 검사들은 스스로 정권에 유리하게 수사를 하면서 자신의 출세를 꾀한다. 지난 1996년 여론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86.8퍼센트가 검찰이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강압 수사를 하고, 권력자에 대한 수사는 축소하거나 기피한다고 믿고 있다(〈윈(WIN)〉 1996년 8월호).
검찰 자체가 억압적 국가 기구다. 검찰은 해마다 한총련을 이적 단체로 규정해 탄압한다. 1997년 검찰이 프락치를 고용해 추적하던 전 한총련 투쟁국장 김준배 씨는 검거 과정에서 죽었다. 1987년 항쟁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적 있는 음영천 씨는 10년 이상 경찰의 불법 사찰을 받았는데, 그 뒤 검찰이 불법 사찰을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9년 노동자 투쟁을 가로막기 위해 만들어진 공안대책협의회도 검찰이 주도한 것이다.
1987년 수지김 간첩 조작 사건의 주모자인 전 안기부장 장세동은 검찰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려 지금 대선 후보로까지 나왔다. 이번 고문치사 사건 수습 뒤 곧바로 새 검찰총장이 한 일은 비리사범들을 석방한 일이다. 김대중 아들 김홍걸과 진승현 게이트 핵심 인물인 전 국정원 차장 김은성이 석방됐다.
검찰은 인권 보호는커녕 기소 독점권을 이용해 제 식구 보호에 앞장서 왔다.
2000년 한 해 동안 검찰·경찰·국정원 같은 수사기관들의 폭행, 가혹 행위, 직권 남용, 불법 체포 등에 대한 고소·고발은 8백49건이 있었으나 단 7건만 기소됐다. 2001년 상반기에는 5백11건이 접수됐지만 고작 1건만 기소되는 데 그쳤다. 검찰이 기소하지 않을 때 법원에 호소할 수 있는 재정신청제도가 있지만 받아들여지는 확률은 매우 낮다(〈주간조선〉 2002년 11월 21일치).
검찰의 이런 행태는 이번 대선을 거친 뒤에도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현재 대선 여론 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이회창의 한나라당은 과거 공안 검사, 부패 검사였던 자들의 집결소다. 과거에 검찰과 안기부에 있으면서 고문을 일삼은 정형근이 이회창 집권시 차기 국정원장으로 꼽히고 있는 지경이다. 검찰의 ‘거듭나기’는 요원할 전망이다.
철도 노조가 민주노총에 가입하다
이정원
철도 노조가 상급 단체를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변경했다. 11월 4일부터 6일까지 진행한 조합원 총회 결과, 총 2만 1천7백22명 중 2만 4백40명(94.1퍼센트)이 투표에 참가해 그 중 1만 1천43명(54퍼센트)이 찬성표를 던졌다. 11월 4일 상급단체 변경 조합원 총투표를 시작하는 날, 철도청은 92명의 조합원을 대상으로 임금 가압류를 포함해 78억 1천만 원의 조합비 가압류 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사측의 이런 방해 공작도 사태를 바꾸지는 못했다.
이제 양 노총의 조합원 수는 한국노총 85만 6천여 명, 민주노총 66만 5천여 명으로 조합원 수 격차가 19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1995년 이래 민주노총의 조합원 수는 25만 명 가까이 증가했다.
한 해에 30명 이상이 산재로 죽고, 월 2백93시간을 일하고, 근로기준법도 적용되지 않는 사업장이 바로 철도다. 이런 현장에서 묵묵히 버텨 오던 2만 2천 명의 철도 노동자들을 잠에서 깨운 것은 김대중의 공기업 구조조정과 사기업화 정책이었다.
철도 노조의 한국노총 탈퇴는 매우 역사적인 사건이다. 철도 노조는 한국노총의 제1호 노조라는 상징성을 띠고 있었다.
철도 노조는 지난해에 최초로 위원장을 직선제로 선출하고 민주 노조를 건설했다. 그리고 올해, 1946년 이래 처음으로 전면 파업을 벌여 51시간 동안 한국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런 변화가 한국노총과 결별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
철도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으로 상급 단체를 변경한 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철도 사기업화를 저지하려는 투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또, 김대중 집권 5년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노동자들의 투지와 자신감이 여전히 강력함을 보여 준 사례다. 철도 노동자들의 본 게임은 이제부터다.
커지는 빈부격차
■ 김대중 집권 5년간 상위 10퍼센트의 소득계층과 하위 10퍼센트 사이의 소득격차는 6.9배에서 8.9배로 확대됐다.
■ 시가 5억 원이 넘는 주택이 10만 채가 넘는 반면, 방 하나에 세 식구 이상 사는 가구는 10만이 넘는다.
■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은 최저 생계비 이하인 절대빈곤층이 서울에만 약 40만 명(서울 시민의 8퍼센트)이라고 밝혔다.
■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연명하는 사람이 세계 인구의 20퍼센트인 12억 명에 이른다.
■ 해마다 6백만여 명의 어린이가 5살이 채 안 돼 굶주림으로 숨진다. 전 세계에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은 8억 4천만 명이나 된다.
■ 빌 게이츠 등 세계 최고 부자 3명의 재산은 가장 가난한 49개국에 사는 6억 명의 연간 소득보다 많다.
■ 30년 전 1백대 기업 최고경영자의 평균 연봉이 봉급 생활자의 39배였으나 지금은 1천 배가 넘는다.
북파 공작원 - 냉전의 희생양
김태훈
역대 남한 정부는 간첩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정전 협정을 위반한 만행”이라고 북한을 비난했다. 그러나 정전 협정을 위반한 것은 북한만이 아니다. 남한 정부도 50여 년 간 수시로 무장 공작원을 침투시켜 잔인한 복수극을 벌였다. 군 당국이 인정한 수치만 봐도 1953년 휴전 협정 이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전까지 사망·실종된 북파 공작원이 7천7백26명이다.
정부는 공작원을 철저하게 가난한 사람들에서 충원했다. 국군정보사령부는 ‘물색조’를 구성해 병무청 건물 주변에서 은밀하게 공작원을 모집했는데, 한 전직 ‘물색조’는 “고위층 자제들은 선발 단계에서부터 제외했다. 자기 자식이 몇 년 간 실종돼도 감히 항의할 수 없을 만큼 힘없고 가난한 농촌 출신만 포섭했다.” 하고 증언했다(MBC ‘PD수첩’ 10월 22일 방영).
박정희는 1968년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북한 김신조 부대보다 더 강력한 부대를 원했다.
그래서 북파 공작원들을 가혹하고 잔인하게 훈련시켰다. 한 전직 북파 공작원은 “고된 훈련과 구타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다. 탈출하다가 잡히면 ‘배신자를 처단한다’며 동료 훈련병들에게 몽둥이를 나눠 주고 죽을 때까지 때리게 했다. 그 곳은 인간성을 버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었다.” 하고 회고했다.
남한 정부에게 북파 공작원들은 냉전의 도구일 뿐이었다. 정부는 훈련·침투 과정에서 다치고 병든 공작원들을 “밖에서 입을 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겠다.” 하고 협박하며 쫓아냈다.
최근 전직 북파 공작원들이 실체 인정·진상 조사·명예 회복·피해 배상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와 언론은 이들을 외면했다. 정부는 이들의 집회를 아예 불허했고, 〈중앙일보〉 논설 고문 송진혁은 “북파 공작원 같은 존재는 원래 있어도 없는 것으로 돼야” 한다고 협박했다.
3월 15일과 9월 29일의 ‘폭력 시위’는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시위에 참가한 북파 공작원들은 국가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목숨을 바쳐 충성했지만 돌아온 것은 몽둥이 세례였다. 만약 앞으로 이 나라에서 어떤 위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우리는 참전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바보처럼 이용당하지 않겠다.”
선량한 시민들을 겨누는 경찰의 총부리
김덕엽
11월 초 전주에서 강도를 뒤쫓던 시민 백철민(31세) 씨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총을 쏜 경찰은 백 씨를 공범으로 오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목격자에 따르면, 경찰은 “나는 강도가 아니다.” 하고 여러 차례 소리치는 백 씨의 등에다 총을 쐈다. 경찰은 잔인하게도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백 씨를 병원으로 옮기기는커녕 수갑을 채운 채 길가에 방치했다.
언론은 이번 사건을 “미숙한 경찰관에 의한 불상사”로 취급했다. 경찰관의 총기 사용 훈련이 미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범죄 용의자일 뿐인 사람에게 총을 쏠 수 있도록 허용한 데서 문제가 벌어진다.
1998년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1996∼1998년 8월까지 경찰 총기 사용은 8백68건이었다. 1996년에 2백94건, 1997년에 2백95건, 1998년 1∼8월까지 2백79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2.3퍼센트 급증했다. 그러나 범죄는 좀체 줄지 않았다.
범죄의 뿌리는 사회 전체에 널리 퍼진 불평등·가난·소외에 있다. 경찰의 총기 사용은 범죄를 없애기는커녕 평범한 사람들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