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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항의투쟁을 돌아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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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항의운동은 1만 명 규모의 반이명박 거리 도심 행진을 재현했다. 이명박 집권 2년차 개악 시동에 브레이크를 거는 성과도 거뒀다. 항의운동의 구심은
그러나 아쉽게도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2월 하순 이후 집회 규모와 정치적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명박 정부의 탄압이 자행되고 있고 나를 포함한 용산범대위의 상황실 활동가들은 소환장과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용산범대위 김태연 상황실장은 경찰에 체포된 상태다. 이에 맞서 방어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나는 용산범대위의 항의운동 조직에 동참한 경험을 바탕으로 운동의 성과와 함께 지금에 이른 과정을 평가하고자 한다.
이명박 정부의 살인 진압으로 시작된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제2의 촛불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집회와 거리행진 참가자들에게
참사가 벌어지자마자 구성된 용산범대위는 항의운동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2월 중순까지 용산범대위는 정부의 혹독한 탄압과 사건의 왜곡
전국적 초점이 형성되자 시민단체들뿐 아니라 민주당까지 용산참사 항의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2월 MB악법 저지를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끌어들이는 중요한 연결 고리 구실을 했다. 그래서 박성제 언론노조 MBC본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이명박의 총체적 위기를 가속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혹자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얻어낸 게 무엇이냐고 실망할 수도 있지만,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경제 위기 고통 전가, 방송 장악, 비정규직법 개악, 민주주의 후퇴 등 MB악법 추진에 제동을 거는 효과를 냈다.
또, 처음에 이명박은 살인 진압의 직접적 책임자 김석기 사퇴 요구에
보수 언론과 김석기는 살인 진압이 아니라 철거민들의
〈조선일보〉는
하지만 용산범대위의 주요 활동가들은
항의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용산범대위는 전투로 치자면 지휘부에 해당한다. 운동의 지도부는 전투에서 적과 우리의 힘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공세를 취할지 후퇴를 할지 구체적인 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
지배자들의 분열과 위기를 가속시켰다는 점에서 김석기 사퇴를 항의운동의 성과로 보지 않고 이명박의 예정된 시나리오 정도로만 판단하면 운동 참가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더 커다란 운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기회를 유실할 수 있었다. 실제로, 안타깝게도 용산범대위는 2월 9일 김석기 사퇴와 곧이어 폭로된 청와대 이메일 파문을 이용해 공세적으로 용산참사 항의운동을 포괄적 반이명박 운동으로 전환시키지 못했다.
이명박 퇴진 논쟁
김석기 사퇴 전까지 항의운동은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항의운동 초기부터 내재해 있던 분열의 씨앗은
용산 살인 진압 직후 결성된 용산범대위는 대표자들 다수에 의해
그러므로 이명박 퇴진 요구는 실현 가능한 힘이 있는가 여부를 따지기보다 이명박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요구냐, 기조냐, 슬로건일 뿐이냐를 따지는 것은 그것이 현실화될 수 있는 지점까지는 현학적인 논쟁이었다.
레닌은
마치 1987년 1월 보안경찰의 잔인한 고문으로 박종철 씨가 사망하자 분노한 청년
하지만 참여연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은
시민단체들이 용산범대위를 탈퇴하자 정부는 곧바로 전철연을 집중적으로 마녀사냥하고 용산범대위 주최 집회를 원천봉쇄하기 시작했다. 분열을 틈타 반격하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용산범대위는 탄압에 굴하지 않고 구정연휴를 앞둔 1월 23일 대규모 항의 행동을 시도했고,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수천 명이 행진을 시도했다. 이 날 시위는 제2의 촛불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때부터 용산범대위의 정치적 위상은 높아졌고 시민단체들은 용산범대위와 함께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기 시작한 듯했다.
그러나 이들은 협력의 전제조건으로
만약 처음에, 용산범대위 결성 당시에 이명박
그래서
기존 입장이 유지되면서 용산범대위 내 분열과 사기저하를 막을 수 있었다. 1월 31일 용산범대위가 주최한 범국민대회에서는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1만 명이 청계광장에 모였다. 이 날, 용산 운동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거리 행진을 했다.
시민단체들이 1월 31일 집회에 힘을 집중하지 않고, 2월 1일에 민주당 등과 별도의 집회를 개최해 운동의 분열 위험이 보였지만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대중적으로 저변이 확대되고 있었다.
당시
이런 모습은 항의운동의 다음 국면에서도 나타날 약점이었다.
공동주최 논쟁
1월 31일 범국민대회 이후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검찰은 용산참사 수사 발표를 세 차례나 연기하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2월 7일 범국민대회는 무척 중요했고, 국민회의는 용산범대위에 집회를 공동 주최하자고 먼저 제안했다.
범국민대회 공동주최는 항의운동의 단결을 도모하고 운동의 저변을 확대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하지만 용산범대위 내 일부 좌파들은 시민단체들과의 공동주최를 한사코 거부했다. 공동주최를 하면 이명박 퇴진을 내세울 수 없다는 게 거부의 이유였다.
1월 23일 시위 직후에는 용산범대위 내부의 단결을 지키기 위해 이명박
검찰 수사 발표를 앞두고 김석기 사퇴 여부가 최대 관심사였고, 대중적 분노의 초점이었으므로 용산범대위는
일부 좌파들은 그동안 시민단체를 단지
다행히도 용산범대위 대표자 회의에서 공동주최의 필요성을 주장한 측이 더 많은 지지를 받아 통과됐다. 이것은 항의운동이 확대되고 있던 시점에서 대다수 대표자들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결과였다.
이처럼 격렬한 내부 논쟁 끝에 용산범대위가 국민회의와의 집회 공동주최를 확정했지만, 안타깝게도 국민회의는 애초의 입장을 번복하고 자신들의 공식적인 회의에서 2월 7일 범국민대회 공동주최를 거부했다. 참여연대 김민영 사무처장은
결국 국민회의는 2월 9일 김석기 사퇴를 전후로 궁지에 몰린 이명박을 몰아붙일 수 있는 절호의 시기에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청와대 강호순 이메일 파문
한편, 용산범대위의 주요 활동가들은 2월 14일 이후의 항의운동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다수의 좌파 활동가들은 김석기 사퇴를 커다란 성과로 생각하지 않았고
용산참사라는 단일 쟁점 운동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고려하면, 김석기 사퇴는 최대치의 정치적 성과를 얻은 셈이었다. MB악법 저지 등 다른 쟁점과 결합되는 대중 투쟁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주관적인 의지만으로 확대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소수파처럼 동력이 사라졌으니 장례위원회로 전환하자는 것도 진정한 대안이 못 되었다.
되돌아보면, 이 시점에서 용산범대위의 주요 활동가들은 청와대 이메일 문제와 MB악법 저지 문제를 정권의 뿌리깊은 부패와 반민주성 문제로 규정하고 포괄적 반이명박 투쟁을 준비하며 운동의 전환을 모색했어야 했다. 용산 문제는 국민의 54퍼센트가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라고 했지만 청와대 이메일 파문은 국민의 70퍼센트 이상이 청와대 잘못이라고 했다. 보수 우익인 이문열조차
청와대 이메일 파문은 용산범대위에 참여하고 있던 좌파들이 김석기 사퇴라는 성과를 발판으로 포괄적 반이명박 투쟁의 새로운 국면 전환을 위한 기회로 삼았어야 했다. 청와대 이메일 지침을 처음 폭로한 것은 민주당이었다. 민주당은 이 쟁점을 2월 임시국회 협상용 압박 카드 정도로 취급했다. 국민회의는 이 사건을 신속하게 쟁점으로 부각시켰지만 MB악법 저지를 위한 민주당과의 공조에 강조점을 두었기에 국회 밖으로 확대시키지 않았다. 반면, 용산범대위는 이 문제에 대한 정치적 중요성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일부 좌파 활동가들은
그러나 누가 주도하든 그것이 운동의 확대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 김석기 사퇴 이후의 용산 항의운동이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용산범대위의 조직 범위를 넘는 더 폭넓은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했다. 이메일 파문과 MB악법은 바로 이를 위한 핵심 고리였다. 이 고리를 중심으로 시민단체와 심지어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운동에 참가시키려 해야 했다. 2008년 촛불 항쟁이 1백만 명까지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좌파 지지자들의 폭을 뛰어넘는 사람들의 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이들의 지지를 받는 시민단체들과 공동행동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시민단체가 민주당을 핑계로 집회 공동주최 등 공동 행동을 부담스러워한다면, 심지어 민주당까지도 끌어들여 대열을 늘리고 대중 속에서 주장하고 입증받으려 노력했어야 했다.
이것은 모든 쟁점에서 민주당과 손잡는 전략적 공조와는 다르다. 청와대 이메일 파문을 계기로 MB악법 저지와 용산참사 쟁점을 결합시켜 반이명박 투쟁의 폭을 넓히는 전술적 공조일 뿐이다.
그러나 용산범대위 안의 일부 좌파들은 2월 28일 열릴 집회의 주최에 민주당이 포함되지 않으면 시민단체들이 참여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용산범대위의 일부 좌파 활동가들은 레닌이
만약 용산범대위가 민주당까지 포함해 범국민대회 개최를 진지하게 제안했다면 나름의 정치적 효과를 얻었을 것이다. 민주당이 참가하기로 결정한다면 민주당과의 공조를 중요시하는 시민단체들이 열의있게 참가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용산범대위는 이명박의 이간질
물론 민주당의 동참은 언제나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 종속되는 전술적 고려의 대상이고, 또한 결코 비판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반면, 민주당이 공동주최를 거부한다면 민주당의 일관성 결여와 계급적 한계가 폭로돼 그것은 그것대로 대중에게 좋은 교육적 효과를 제공했을 것이다.
좌파가 주저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민주당을 포함한
아쉽게도 용산범대위는 민주당을 효과적으로 폭로하지도, 효과적으로 끌어들이지도 못했다. 범대위 주요 활동가들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의지와 투지는 강했지만 광범한 대중 운동을 어떻게 건설할지에 대한 전략과 전술은 부족했다. 결국 2월 중순 용산참사 쟁점뿐 아니라 청와대 이메일 파문, MB악법 강행처리 등 이명박의 위기를 이용해 반이명박 공동전선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과정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종파적 유산은 유연한 전술을 구사할 타이밍을 놓치게 만들었고, 결국 개혁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2월 28일 용산 집회와 전국노동자대회가 따로 치러지는 과정에서도 이런 약점은 드러났다. 민주노총이 경찰의 불허 방침으로 집회 장소를 대학로에서 여의도로 옮기자 용산범대위는 경찰의 협박에 굴복했다며 범국민대회를 여의도에서 열지 않으려 했다. 노동자대회를 안정적으로 치르려면 타협이 불가피했는데도 말이다.
결국 용산범대위는 전국에서 올라온 3만여 명의 노동자들에게 용산범대위 요구 사항을 알리고, 연대를 호소할 기회를 놓쳤다. 반면, 노동자들은 집회를 마치고 위력적인 도심행진을 했다. 이 날의 용산범대위 집회는 노동자대회와 분리 개최되면서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이제 용산 투쟁은 새롭게 이명박에 맞서는 대중 운동이 부활하기 전까지 소규모 항의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용산범대위는 이런 상황을 인정하지 않았고, 기존 방식대로 평일 집회와 주말 집회를 고수했다. 일부 활동가는 동력을 억지로 살려내기 위해 소수가 모종의 장소를 점거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행동으로 나서지 않지만, 구속자 석방, 명예회복과 보상, 철저한 진상규명 등을 원했다. 이럴 때일수록 전투적 언사나 소수 행동보다 차분하게 다음 번 기회를 준비하며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
용산 투쟁은 주춤해졌지만, 용산 투쟁이 낳은 퇴적물은 남았다. 이명박에 맞선 운동은 언제든 다시 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미 경제 위기 고통 전가에 맞서 3만 명의 노동자들이 도심행진을 벌였고, 언론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언론악법 통과도 연기됐다.
이런 운동들의 영향으로 신영철 대법관 파문 등 이명박의 정치 위기가 가속화하고 있다.
용산 항의운동에 참가했던 활동가들은 용산 운동이 낳은 성과와 교훈을 되새겨, 앞으로 반이명박 공동 행동에 적극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