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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서경식 칼럼:
난민을 두 팔 벌려 맞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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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태어나 이 나이까지 대부분 일본에서 살아왔기에, 부끄럽지만 나의 우리말 어휘 수는 빈약하다. 이번 여름에 나는 새로 ‘폭염’(暴炎)이라는 말을 익혔다. 일본에서는 혹서(酷暑)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쓰지만, 폭염 쪽이 더 실제 느낌에 가깝다. 텔레비전 뉴스 등에서는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더위”라는 표현을 많이 쓰면서 온열질환 대책을 호소했다. 온열질환으로 사망하는 희생자도 잇따랐다.
지구 전체의 이상고온화와 온열질환 급증의 배경에 지구환경의 파괴와 온난화가 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천재라기보다 대규모 인재다. 하지만 이런 인재는 원인과 결과 관계를 논증하기가 쉽지 않고 또 피해가 나타나 문제가 표면화할 때까지 긴 시간이 걸린다. 그 때문에 오늘의 이익에만 열중할 뿐 내일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정부나 기업은 종래의 정책이나 전략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미국은 2017년 6월 모든 체약국들이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처하기로 합의한 파리협정을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시야가 협소한 이기주의(미국 제일주의)로 전세계의 안전이 위기에 처하게 됐다. 그 여파로 인한 피해를 맨 앞에서 받고 있는 것은 노인과 빈곤층 등 사회적 약자들이다. 이는 원자력발전소 사고와 같은 구조다. 다만 그 규모나 범위가 훨씬 더 크다.
이런 세계적인 이상기후 속에서 수입도 없고, 살 집도 없고, 국가나 공적 기관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인 ‘난민’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마음에 걸린다. 염천에 지친 나그네에게는 하다못해 그늘로 불러들여 한 잔 가득 물이라도 대접하고 싶다. 그것이 인륜의 기초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현실은 어떨까.
밤바다에 새까맣게 떠 있는 섬. 그 섬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솟았다. 불꽃이 해면에 반사돼 반짝이면서 처절하도록 아름다웠다. 그것은 도민들이 사는 마을들을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의 불꽃이었다. 미군 함정들이 섬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화공을 당한 도민들이 바다로 도망쳐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오래전 일이지만, 제주도 출신 원로 소설가 현기영 선생이 일본에 왔을 때 그 강연장에서 들은 이야기다. 묵시록적이라고 해야 할까. 현기영 선생이 오히려 부끄러운 듯 더듬더듬 얘기한 그 광경이 내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이어진 제주도 4·3사건 과정에서 도민 5명에 1명꼴인 6만명이 학살당하고, 마을 70%가 불탔다고 한다. 제주도는 일본과 인연이 깊은 땅이다. 식민지 시절에는 오사카와 정기선으로 연결돼 일본에 돈벌이하러 간 사람이 많았고, 해방 뒤 제주도로 귀환한 사람도 많다.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 지옥으로 변한 제주도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거친 바다를 건너 지리적으로 가깝고 친척이나 지인들이 사는 일본으로 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 당국은 이들을 ‘빨갱이’(친북 적화세력)라며 탄압했다. 미 군정과 일본 정부는 이 사람들을 일률적으로 ‘밀입국자’로 규정하고 입국을 막았다. 구속된 밀입국자는 이승만 정권하의 한국으로 강제송환됐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지옥으로의 송환이었고 죽음과도 같은 처사였다.
4·3사건 직후에 제주도에서 2만명이 일본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정확한 수를 파악할 순 없지만 1946~1949년에 일본에서 강제송환당한 밀입국자는 5만명에 가까웠는데, 미검거자를 그 3~4배로 계산하면 밀입국자는 모두 20만~25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대로 일본에 계속 산 사람도 많은데, 이들은 재일조선인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내 숙부도 제주도에서 온 것은 아니지만 밀입국자였다. 식민지 시절에 일본에서 태어난 숙부는 해방 뒤 할아버지와 함께 귀국했으나 한국전쟁의 전화(戰禍)로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돼 아직 소년의 몸으로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형(내 아버지)이 사는 일본으로 밀항해 왔다. 일본에서는 신분을 감추고 가짜 일본이름을 쓰며 살았다.
이런 이야기는 재일조선인들 사이에 드물지 않다. 어느 집이든 가족사를 들춰보면 반드시라고 할 만큼 이런 밀항자나 이산가족의 존재가 숨어 있다. ‘밀항자’를 다른 말로 하면 ‘난민’이다. 난민의 역사는 우리에게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난민 가족인 것이다. 밤바다에 붉게 타오르며 떠 있던 섬 제주도. 거기에는 지금 지구 끝에서 난민들이 당도해 있다. “세계 최악의 인도적 위기”라는 내전이 이어지는 예멘에서 500명이 넘는 난민 신청자들이 왔다. 일본 신문(〈아사히신문〉 8월6일치)이 전하는 바로는 제주도민들이 갈피를 잡지 못했으나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싼 요금에 예멘 난민들을 받아준 호텔 경영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부모 세대는 (4·3사건 당시) 일본에 건너가 목숨을 건졌다. 예멘 사람들도 나라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들었다. 내버려둘 수 없었다.”
이 호텔 경영자의 소박한 감정은 귀중한 것이고, 많은 조선민족이 공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론조사 등을 보면 한국 사회 전체로는 난민 수용에 대해 비교적 젊은 지식층 사이에 거부감이 강하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실망을 넘어 부끄러울 것 같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멕시코인은 모두 강간범이다”라고 소리치며 국경을 따라 분단장벽을 건설하자고 주장했고, 적지 않은 미국 국민들이 이를 지지했다. 일본의 우익세력은 기다렸다는 듯 “조선인과 중국인은 범죄자다”라는 혐오 선전을 해대면서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마저 부정하려 한다. 지금 한국 사람들이 이슬람교도는 강간범이라는 망언에 속아 그들을 거절한다면, 미국 대통령이나 일본 우파를 비판할 윤리적 근거를 스스로 내던지는 꼴이 될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가.
난민은 국가의 비호(보호)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우리 조선민족은 예전에 나라를 잃고 식민지로 전락한 시절에 중국, 러시아, 남북 아메리카, 그리고 일본으로 흘러갔다. 마침내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뒤에는 국토가 분단돼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떠돌아다녔다. 그 고난의 역사 속에서 그래도 자랑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우리는 난민이 된 적은 있지만 타민족을 난민으로 만든 적은 없다는 것이 아닌가.
예멘인, 시리아인, 팔레스타인인, 멕시코인, 기타 제3세계 사람들… 그들의 경험은 우리 조선민족의 그것과 공통된 것이다. 우리에게 최대의 자산은, 같은 경험으로 고통을 당하는 세계인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윤리성일 것이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의 2017년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난민 인정 수가 가장 많았던 나라는 독일로 14만7671명, 인정률은 25.7%였다. 캐나다는 인정 수 1만3121명, 인정률은 가장 높은 59.7%였다. 이에 비해 한국은 인정 수 121명, 인정률 2.0%. 일본은 인정 수 20명, 인정률 0.2%. 한·일 두 나라는 세계 1,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난민에 폐쇄적인 나라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은 이 부끄러워해야 할 상황에서 빠져나와 동아시아에서 난민·이민에 대해서도 가장 열린 국가, 가장 관대한 나라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예전에 제주도민들을 태워 죽인 불의 그 빛을 이제 세계의 난민들에게 피난소의 존재를 알리는 횃불로 승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 빛에 이끌리듯 이 나라를 찾아온 사람들을 두 팔 벌려 맞이하라. 그것은 자랑스럽고 기쁜 일이다.
번역 한승동/독서인
원문 보기: [서경식 칼럼] 두 팔 벌려 맞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