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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혁명 논쟁:
리비아 혁명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리비아 항쟁은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됐다. 그러나 나토의 개입 이후 상황이 극적으로 변했다. 시문 아사프는 리비아가 서방에 종속된 정부로 전락할 운명인지 아니면 혁명이 부활할 것인지에 관해 분석한다.

리비아 혁명은 중단된 것처럼 보인다. 이제는 철저히 서방의 지원을 받는 반란인 것처럼 보인다. 이집트의 청년들이 이스라엘 대사관을 공격하는 동안, 리비아에서는 서방 정부 지도자들이 영웅 대접을 받았다. 벵가지 한복판에는 프랑스, 미국, 영국 해군 깃발이 걸려 있다. 카이로에서 이런 깃발들은 [시위대에 의해] 찢기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리비아 혁명이 리비아에 서방 열강의 종속 정권을 세우려는 의도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또, 서방 정부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카다피 정부의 몰락에 기여했다면서 잘난 척하고 ‘인도주의적 개입’을 부활시켰지만, 그들은 새로운 리비아를 자기 뜻대로 만드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2월 말 벵가지를 해방시킨 청년 혁명가들 여전히 남아 있는 진정한 혁명의 원동력

리비아의 도시와 마을 들을 뒤흔든 반란의 물결은 호스니 무바라크와 벤 알리의 몰락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된 것이었다. 소규모 활동가 집단들이 시위를 벌였고 중앙 광장들을 리비아판 ‘타흐리르 광장’으로 만들려 했다. 이 시위들은 평화로웠지만 참가자들은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카다피 정부가 엄청나게 잔인하게 탄압하자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카다피 정부의 끔찍한 반혁명 움직임에 반발해 무장 항쟁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원래 혁명을 시작한 청년 혁명가들의 목표와 열망 ― 모든 외부 개입 반대를 포함 ― 이 무시됐다.

이 청년들 중 많은 이가 혁명이 시작된 뒤 몇 주 사이에 죽임을 당했다. 어떤 이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어떤 이는 정부의 체포 물결 속에서, 또 다른 이는 동부의 핵심 유전이 자리잡은 브레가와 라스 라누프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죽었다. 2월 17일 ‘세바브’, 즉 청년들이 패배하면서 리비아 혁명은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과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전환점

리비아 혁명의 두번 째 전환점은 카다피 정권 이탈자들이 혁명의 수도인 벵가지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은 당시 막 출범한 과도국가위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들이 ‘과도 정부’를 대표한다고 선언했다. 당시 벵가지에서 벌어진 혼란들은 반란의 원래 지도자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현 과도국가위원회 지도자들은 서방의 지원 덕분에 지도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리비아에서 서방의 이익을 대변하는 구실을 하게 됐다. 카다피군의 반격이 강력해지면서 그들의 영향력도 강해졌다. 그들은 서방 정부들과 동맹을 맺은 덕분에 비행금지 구역 설정, 각종 정치적·재정적·군사적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에 청년 혁명가들은 내놓을 대안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청년 혁명가들이 패배하면서 리비아 혁명은 왜곡됐다. 리비아 사회를 완전히 변화시키려는 열망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카다피, 그 아들들, 측근 인사들 등 정권의 우두머리를 바꾸는 것이 유일한 목적으로 여겨지게 됐다. 리비아의 혁명적 열망이 좌절되자 서방 제국주의는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고할 기회를 잡았다. 특히, 정치적 기회주의자인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북아프리카에서 제국주의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악마처럼 끼어들었다.

리비아 전쟁은 ‘인도주의적 개입’이란 이름에 스며든 오물을 씻어냈다. 인도주의적 개입은 1990년대 발칸 전쟁에 서방이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고안된 것이었고, 나중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는 명분으로 이용됐다. 이 독트린의 주된 내용은 서방 제국주의의 이익이 자유주의적인 인도주의적를 추구하는 것과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좌파 일각에서도 유행하게 된 이 생각은 서방 군대가 ― 서방의 이익을 지키면서 ― 대중의 자주적 행동을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재앙으로 빠지면서 인도주의적 전쟁이란 명분의 오류가 폭로됐다. 서방 열강에게 리비아 혁명은 인도주의적 개입을 되살릴 기회였다. 서방의 리비아 개입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개입과 다르다는 주장이 많았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리비아 반군들이 먼저 도와달라고 서방에게 요청했고, 아랍 연맹도 서방의 개입을 지지했고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같은 반제국주의 운동도 암묵적으로 지지했다는 근거를 들곤 했다.

서방의 리비아 개입을 지지한 사람들은 만약 카다피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다면 다른 독재자들이 힘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제국주의의 진정한 의도를 무시했다. 카다피가 반란을 진압하려 탱크를 보낼 준비를 할 때, 사우디아라비아군(과 카타르와 아랍 에미리트군)은 혁명 운동을 진압하려고 바레인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바레인 진주 광장에서 벌어진 학살극은 사소한 사건으로 치부됐다.

인도주의적 개입

서방 제국주의는 이라크 전쟁의 악몽을 떨쳐내려고 개입을 정당화하는 미사여구를 바꿨다. ‘민간인 보호’와 같은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표현들이 ‘충격과 공포’ 등을 대신해 사용됐다. 미국 전략문제 연구 잡지인 〈스트랫포〉는 이런 현상과 연관된 아이러니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리비아의 경우, ‘소프트 파워’만을 사용할 길을 찾기가 힘들었다. 제재와 훈수를 통해 카다피를 저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군사 작전은 소프트 파워 원칙과 어긋난다.”

2월 말 벵가지에 걸린 외국군 개입 반대 현수막

그래서 이른바 소프트 군사력에 관한 독트린이 등장했다. 비행금지 구역 설정이 인명 살상을 동반하지 않는 군사 개입의 방식으로 제시됐다. 서방 열강은 이런 생각을 통해 리비아 개입과 이라크 개입을 구분하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었다.

리비아 군사 개입은 나토의 구실을 재정의하는 계기가 됐다. 나토는 더는 서방 지배의 수단이 아니라 아랍의 봄의 일부로 여겨지게 됐다. 서방 열강은 리비아에 개입하는 진정한 동기를 감추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사르코지와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론은 아랍 거리의 영웅으로 여겨졌고 서방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범한 죄 ― 반란이 발생하기 불과 몇 달 전에 영국 정부는 저격용 소총을, 스페인은 고성능 포탄을 판매했고, 미국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카다피 정부의 협력을 받았고, 미국 기업 제너럴 다이나믹스는 카다피의 악명 높은 하미스 연대를 무장시키는 계약을 맺기 일보직전이었다 ― 를 씻었다고 축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토 개입은 민간인을 보호하는 데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와 영국 군인 수백 명이 리비아에서 전쟁을 지도하고 계획했다. 반군 수천 명은 해외 나토 기지에서 훈련을 받았다. 나토는 사실상 반군의 공군으로 활동했고 나토 전투기가 카다피군의 장갑차, 병영, 무기고를 폭격하는 등 반군 진격의 장애물을 미리 제거했다.

서방이 리비아에 개입한 주된 목적은 석유가 아니었다. 카다피 정부는 이미 서방 기업들에게 관대한 조건으로 석유를 개발할 기회를 줬다. 따라서 이 전쟁의 주된 목표는 프랑스가 튀니지에서, 미국이 이집트에서 망신을 당한 후, 북아프리카에서 서방 제국주의의 위치를 재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캐머론과 사르코지가 벵가지에서 전승 행진을 하는 동안, 미국 언론들은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다. 언론들의 논조가 변하기 시작했고 이른바 ‘세속주의 대 이슬람주의’의 경쟁을 경고하고 나섰다. 이런 새로운 논의 뒤에는 카다피 이후 리비아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나토 사무총장 안데르스 라스무센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승리를 가로채는 것”이 걱정된다고 주장했다. 덧붙여, 이 잡지는 이렇게 보도했다.

“나토의 한 고위 관료는 나토 공군의 정찰과 비행금지 구역 준수 활동이 지속돼야 서로 다른 분파와 부족 간 다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료는 나토가 리비아에서 “저강도 비행금지 구역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며 … 이제 우리가 리비아를 소유한다”고 덧붙였다. 확실히 리비아는 서방 기업들에게 활짝 열리게 됐다. 이미 카다피 정부와 협력해 왔던 서방 기업들은 새로운 건설 계약과 석유 개발 계약을 따내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럼에도, 서방 열강은 아직 리비아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서방 정부들은 과도국가위원회의 지도자들을 이용할 수 있지만 리비아의 거리를 통제하지는 못한다. 또, 카다피 정부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혁명가들이 서방의 군사 개입을 요청하게 만들었던 원인도 사라지고 있다.

이슬람주의자들

새로운 리비아의 미래를 둘러싼 투쟁이 시작됐다. ‘세속주의자, 이슬람주의자, 분파와 부족’에 관한 언론들의 온갖 논의들 뒤에는 리비아 정치의 최전선에서 진행 중인 투쟁이 놓여 있다. 옛 정권과 연관된 장관과 관료 들은 반란군 기층이 “카타르의 재정 지원을 받는” 이슬람주의자들로 가득하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슬람주의자들, 특히 리비아 동부의 이슬람주의자들은 반란군의 중요한 일부로 반란에 조직적 일관성을 부여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과도국가위원회의 친서방 지도자들은 항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이슬람주의자들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려 했지만, 이제 이슬람주의자들과의 동맹이 깨지고 있다. 나토는 영공을 통제하고 과도국가위원회를 통해 신생 리비아 정부를 통제한다. 그러나 거리를 통제하는 것은 무장한 시민들이다. 이들 지도자들 중에는 최근까지 테러와의 전쟁의 표적으로 추적당하던 사람들이 많다.

아랍 혁명이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청년들이 독재자를 무너뜨리려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보고 많은 이슬람주의자들이 감명을 받았다. 이슬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채택한 테러리즘 전술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된 탄압 속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많은 이슬람주의 전사가 민중 항쟁이 발생할 가능성을 포기했다. 그러나 튀니지와 이집트가 그런 사고방식을 바꿨다. 리비아 이슬람주의자들은 보통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청년 활동가들과 함께 싸웠다.

나토의 군사 개입이 시작된 뒤에도 이슬람주의자들은 반란군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리비아 도시와 마을을 해방시킨 주역인 오합지졸 민병대와 무장 시민 집단들은 이슬람주의자들 ― 이들 중 일부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사 활동을 한 경험이 있다 ― 이 지휘관의 구실을 하기를 바랐다. 이런 지휘관들 중 상당수는 알카에다 소속 집단으로 잘못 알려진 리비아이슬람투쟁그룹 출신이다.

이 그룹은 1990년대 카다피 정부를 상대로 실패한 반란을 일으킨 바 있다. 아이러니이게도 오늘날 이슬람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고참인 셰이크 알리 살라비는 1990년대 말 사이프 가다피와 손잡고 이 이슬람주의 전사들을 ‘개과천선’시키려고 노력했다. 살라비는 카타르 정부와 가까웠고 리비아 반란에 대한 걸프 석유 생산국들의 지지를 얻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서방에게 얼마나 큰 골칫거리일 수 있는지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현 트리폴리 군사령관인 압델 하킴 벨라지는 테러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영국 정부에 의해 리비아로 납치된 인물이다. 리비아이슬람투쟁그룹의 원로인 벨라지는 영국 정보기관 요원들와 카다피 정부에 의해 고문을 받은 경험이 있다. 벵가지 군사령관은 전 리비아이슬람투쟁그룹 사령관 출신이다. 최근 살라비는 과도국가위원회 지도자들이 측근을 석유 장관 등 요직에 앉히는 정실주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한 과도국가위원회 2인자인 마무드 지브릴이 신생 정부 각료 임명에서 이슬람주의자들과 이스트라 위원회를 무시하면서 “혁명을 강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리비아가 새로운 아프가니스탄이 될 것이라는 신경질적인 언론 헤드라인과 관측은 진정한 현실을 감추고 있다. 이슬람주의 운동은 모순적이다. 그들은 독재 정부에 대한 분노와 이 정부를 지원하는 서방 열강에 대한 대중적 분노를 대변할 수 있지만, 그들은 또한 ‘경제 안정’을 바라고 서방 제국주의 열강과의 타협(서방에 대한 종속이 아니라)을 꾀할 수도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대중의 분노를 통제하고 분노가 근본적 사회 변화를 바라는 것에서 다른 것으로 향하도록 조종하려 할 수도 있다. 리비아 이슬람주의자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모델은 탈레반이 아니라 터키 이슬람주의다.

반면에, 과도국가위원회 내의 친서방 인사들은 구질서의 많은 요소를 그대로 유지하려 하며, 그들 자신도 카다피 정부에서 누렸던 옛 지위를 회복하려 한다. 과도국가위원회의 통치를 받는다면 리비아는 서방에 종속된 나라가 될 것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의 통치 아래에서는 리비아는 서방과 좀더 거리를 둘 것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둘러싼 갈등은 리비아 반란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던 압델 파타 유니스 ― 반란군 총사령관이자 전 카다피 정부 내부 장관 ― 의 암살을 이해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반란 초기 유니스가 통솔하는 군의 사병들이 벵가지를 지원하기 위해 이탈하는 상황에서, 유니스는 군이 혁명의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혁명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 직전까지 유니스는 카다피의 핵심 동맹이자 정권의 제2인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막상 그가 반란 지도부에서 한 구실은 좀더 지저분했다. 〈포린 어페어스〉 잡지는 이렇게 보도했다. “유니스는 이슬람주의에 영향을 받은 병사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 병사들은 유니스가 나토와 모의해 자신들을 공격했다고 생각해 그를 암살했다.” 어떤 이는 유니스가 카다피 측과 비밀리에 접촉한 대가로, 혹은 1990년대 이슬람주의 반란자들을 잔인하게 탄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암살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들이 과연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전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서방과 손을 잡고 반란군의 기층을 탄압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는 것은 리비아 반란 속에서 등장한 연합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잘 보여 준다. 많은 이는 불확실한 선거 일정을 제외하면 과연 평범한 리비아인들이 희생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미스트라의 반란은 다른 동부 도시들의 패턴과는 달랐다. 혼란스런 벵가지와 달리 이 신도시의 투쟁은 좀더 잘 조직돼 있었고 파견된 정부군을 함정에 빠뜨리고 무찔렀다. 그러나 다른 반란군 통제 지역과 마찬가지로 투사들은 나토 공군력에 의존해 트리폴리로 향하는 길을 확보할 수 있었다.

미스트라 전사들은 전투에서 용맹성으로 명성을 얻었고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받아) 트리폴리를 상대로 한 최후의 공격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미스트라 투사들은 최초로 구질서 인사들이 신정부를 통제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미스트라 위원회는 과도국가위원회의 정체성을 의심했고 종종 그들의 명령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미스트라의 승리는 카다피 정권의 몰락 후 그들이 취한 태도 때문에 빛이 바랬다. 미스트라 투사들은 아프리카계 흑인과 피부색이 검은 리비아인들을 카다피 정부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인종적으로 청소”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미스트라인들은 (많은 경우 이번 전쟁과 전혀 상관 없던) 흑인들을 주거지와 이웃한 마을인 타웨르가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카다피 정부와 맞서 싸우지 않은 아랍인 마을인 질탄의 경우, 미스트라인들은 이곳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했다.

이런 인종 청소는 서부 산악 지대에서도 발생했다. 정권에 맞서 성공적 게릴라 전투를 벌였던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들은 이제 부족민의 일부가 정부 편에 섰던 투아레그족을 공격했다. 이런 숙청은 2000년 카다피 정부가 흑인 3백 명을 집단 성폭행했던 인종차별주의적 만행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많은 이의 눈에는 한때 해방의 상징이었던 카다피 정권의 몰락이 옛 억압 질서와 인종차별주의의 지속으로 여겨지게 됐다.

혁명은 끝났는가?

초기 리비아 반란에서 나타난 대중 시위들은 점차 수천 명이 싸우는 무장 투쟁에 의해 밀려났다. 그러나 이 운동의 규모를 볼 때 대다수 리비아인이 이집트와 튀니지 혁명을 본받고 싶어 했던 것은 분명하다. 혁명들은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관계를 탄생시키기 마련이다. 혁명 과정에서는 거리, 공장, 사무실, 경제와 자원을 누가 통제할 것인가를 둘러싼 도전이 공개적으로 분출할 수밖에 없다. 수백만 명이 자신의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그 자신의 의식도 변화시키는 활동에 뛰어드는 것이다. 리비아에서는 이 과정이 중도에서 멈췄다.

처음 외국군 지원 제안이 대두했을 때, 반란군들은 이 제안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이 주요 대도시에 접근하면 그곳들에서 반정부 항쟁이 터져나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토와 다른 많은 이는 이 가능성을 기각했고 트리폴리와 같은 대도시들은 카다피 정권의 대들보라고 주장했다. 원래 트리폴리 공격 계획은 트리폴리 사람들의 반란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트리폴리인은 반군의 진격 계획을 알게 되자 녹색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트리폴리 함락 작전에서 대단히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렇게 대중의 구실이 다시 중요해진 것은 리비아 혁명에 아직 숨이 붙어 있음을 보여 준다. 2월 17일 혁명을 낳은 조건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앞으로 발생할 투쟁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많은 반란군은 서방 열강과의 동맹을 필요에 의한 일시적 동맹으로 생각한다. 리비아 전쟁은 끝났고 서방 열강은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방 열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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