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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 맞선 세계적 저항

[편집자]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 개막식은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특히 인도와 아시아에서 세계화와 전쟁, 가난과 억압에 반대해 모여든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축제의 장을 열었다. 그리고 수만 명이 넓은 광장에 빼곡히 모여 앉아 아룬다티 로이나 제러미 코빈 같은 연사들의 발언을 들었다. 다음은 아룬다티 로이의 개막 연설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지난해 1월, 전 세계에서 온 우리 수천 명은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 모여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 하고 거듭거듭 외쳤습니다. 북쪽으로 몇 만 킬로미터 떨어진 워싱턴에서 조지 부시와 그 측근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프로젝트는 세계사회포럼이었습니다. 그들의 프로젝트는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유럽과 미국의 대도시들에서 이런 말들은 몰래 속삭이기만 했었는데, 이제 사람들은 제국주의의 좋은 측면이나 어지러운 세계를 다스릴 강력한 제국의 필요성에 대해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의] 새로운 전도사들은 정의를 희생시켜 질서를 얻고 싶어합니다. 존엄을 희생시켜 복종을 얻고 싶어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배력을 얻고 싶어합니다. 가끔 우리 중 몇몇은 상업 언론이 제공한 “중립적” 자리에서 그 쟁점을 “토론”해 달라고 초청을 받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토론하는 것은 강간에 대해 찬반 토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제국주의가 그립다고 말해야 합니까?

어쨌든, ‘새로운 제국주의’는 이미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것은 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을 개조하고 변형시킨 것입니다. 역사상 최초로, 하룻밤 사이에 전 세계를 없애버릴 수 있는 무기를 가진 하나의 제국이 철저하고 단일한 경제적·군사적 패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 제국은 서로 다른 시장들을 개방시키기 위해 서로 다른 무기들을 사용합니다. 미국 크루즈 미사일의 십자선[망원경 등의 초점에 새겨진 선]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수표책에 오르지 않은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신자유주의의 총아가 되고 싶다면 아르헨티나가 그 모델이며, [여러분이 신자유주의의] 말썽쟁이라면 이라크처럼 될 것입니다.

새로운 제국주의

지정학적으로 제국에 전략적 가치가 있거나, 일정 규모의 “시장”이나 사유화될 수 있는 사회기반시설이 있거나, 아니면 불행히도 석유·금·다이아몬드·코발트·석탄 같은 귀중한 천연 자원을 가진 가난한 나라들은 [제국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지, 그렇지 않으면 군사적 표적이 됩니다. 가장 많은 천연 자원을 보유한 나라들이 가장 위험합니다. 만약 그들이 자원을 상업 기구에 자발적으로 내놓지 않으면 국내에서 사회 불안이 조성되거나 대외적 전쟁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제국의 시대, 겉 다르고 속 다른 때에, 관련 회사 중역들은 해외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워싱턴의 ‘공공 정직성 센터’는 미국 정부 산하 국방정책위원회 위원 30명 중 9명이 2001년과 2002년에 7백60억 달러 상당의 군수 계약을 수주한 회사들과 연계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전 국무장관 조지 슐츠는 이라크해방위원회 의장이었습니다. 그는 벡텔 그룹의 이사이기도 합니다.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은 슐츠는 “나는 벡텔이 그[이라크 전쟁]로부터 특별히 이득을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뭔가 조치가 필요하다면, 벡텔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회사다. 그러나 거기서 뭔가 이득을 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전쟁 뒤에 벡텔은 6억 8천만 달러짜리 이라크 재건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야만적인 계획은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거듭거듭 이용됐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당연히, 제국이 벌이는 전쟁은 모두 정의로운 전쟁으로 둔갑합니다. 이것은 대체로 상업 언론의 구실입니다. 상업 언론이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를 그저 지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입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선택한 도덕적 입장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대중 매체의 경제적 작동 방식에 고유한 것입니다.

대다수 국가는 적당히 무서운 가족 비밀[일부 또는 모든 가족 구성원이 가지고 있거나 공유하는, 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서로 비밀로 하는 신념과 지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언론이 거짓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강조되기도 하고 무시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정당한 전쟁의 표적으로 인도가 선택됐다고 합시다. 그러면, 1989년 이후 카슈미르에서 약 8만 명이 살해당했으며 그들은 대부분 무슬림이고 인도보안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해마다 약 6천 명씩 사망한 것입니다), 아직 1년도 채 안 지난 2003년 3월 구자라트 거리에서 2천 명 넘는 무슬림이 살해당하고 여성들이 집단 강간당하며 아이들이 산 채로 불에 타 죽고 15만 명이 자기 집에서 쫓겨나는 동안 경찰과 정부는 이를 지켜보기만 하거나 가끔은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사실, 이런 범죄들 때문에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오히려 이를 감독한 정부가 다시 선출됐다는 사실,…이 모든 것이 전쟁 직전에 전 세계 신문에 대서특필됐을 겁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 도시들이 크루즈 미사일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고 우리 마을들을 날카로운 철조망이 빙 둘러싸며 미군 병사들이 우리 거리를 순찰하고 나렌드라 모디[구자라트 주 총리로 광적인 힌두교 배타주의자]나 프라빈 토가디아[힌두교 배타주의 단체인 세계힌두교협회(VHP) 지도자] 또는 인기 있는 보수적 지도자 중 어느 누가 사담 후세인처럼 미국에 붙잡혀 머리에 이가 있는지 금니가 있는지 검사당하는 장면을 황금 시간대 TV 화면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장”이 개방돼 있는 한, 엔론·벡텔·핼리버튼·아서앤더슨 같은 기업들이 자유를 누리는 한, “민주적으로 선출된” 우리 지도자들은 민주주의, 다수결주의, 파시즘 사이의 차이를 과감하게 흐릴 수 있습니다.

‘태생적 동맹’

우리 정부가 ‘비동맹’이라는 인도의 자랑스런 전통을 비겁하게 포기하고 ‘완벽한 동맹’(유행어로는 “태생적 동맹”인데, 인도·이스라엘·미국이 “태생적 동맹”이라는 겁니다) 대열의 맨 앞에서 싸우러 달려갔기 때문에 그 적법성을 훼손하지 않은 채 억압적 정권으로 변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습니다.

정부가 살해하고 투옥한 사람들만이 정부의 피해자가 아닙니다. 쫓겨나고 빼앗기고 기아와 빈곤이라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개발” 프로젝트 때문에 [생계 수단을] 빼앗겼습니다. 지난 55년 동안 대형 댐 때문에 쫓겨난 인도 사람만 해도 3천3백만 명에서 5천5백만 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법에 호소할 수 없습니다.

지난 2년 동안 경찰이 평화적 시위대에 총을 쏜 일련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시위대는 대부분 아디바시[Adivasi : 소수부족]와 달릿이었습니다. 삼림지 침입 때문에, 그리고 댐·광산·철강공장·기타 “개발” 프로젝트에 맞서 삼림지를 보호하려다가, 빈민들이, 특히 달릿과 아디바시 사람들이 죽거나 살해당했습니다. 경찰이 발포한 경우 거의 언제나 정부의 전략은 폭력 행위 때문에 경찰이 발포하게 됐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총을 맞은 사람들은 즉시 호전적인 사람들로 몰렸습니다.

인도 전역에서 미성년자들을 포함해 무고한 사람 수천 명이 테러방지법(POTA : Prevention of Terrorism Act)에 따라 체포됐고 재판도 없이 무기한 구금 상태에 있습니다. ‘테러와의 전쟁’ 시기에 빈곤은 테러리즘과 교묘하게 결부되고 있습니다. 기업 세계화의 시기에 빈곤은 범죄입니다. 빈곤의 심화에 반대해 항의하는 것은 테러리즘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대법원은 파업에 돌입하는 것도 범죄라고 말합니다. 법원을 비판하는 것도 물론 범죄입니다. 그들은 출구를 봉쇄하고 있습니다.

‘옛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제국주의’도 그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대리인들, 즉 제국에 봉사하는 부패한 토착 엘리트들의 연결망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도와 관련된 엔론의 더러운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당시 마하라슈트라 주정부가 엔론과 체결한 전력 구매 계약에 따르면, 인도 농촌 개발 예산 전체의 60퍼센트나 되는 금액이 엔론의 이윤으로 가게 돼 있었습니다. 미국 회사 하나가 약 5억 명을 위한 사회기반시설 개발 자금과 맞먹는 이윤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옛날과 달리, 새로운 제국주의는 말라리아나 설사, 조기 사망의 위험을 무릅쓰고 열대 지방을 터벅터벅 돌아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새로운 제국주의는 이메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직접 발로 뛰는 옛 제국주의의 저속한 인종차별은 시대에 뒤떨어졌습니다. 새로운 제국주의의 기초는 새로운 인종차별입니다.

미국의 “칠면조 사면” 전통은 새로운 인종차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1947년 이후 해마다 미국칠면조연맹(National Turkey Federation)은 추수감사절에 칠면조 한 마리를 대통령에게 선물합니다. 해마다 대통령은 관대함을 보여 주는 의식 뒤에 그 특별한 새는 살려 주고 다른 새를 잡아먹습니다. 대통령의 사면을 받은 ‘선택된 한 마리’는 버지니아 주의 프라잉 팬 파크(Frying Pan Park)로 보내져 천수를 누리게 됩니다. 추수감사절을 위해 사육된 나머지 5천만 마리는 추수감사절에 도살돼 잡아먹힙니다. 대통령 칠면조 계약을 따낸 회사 콘아그라 푸즈(ConAgra Foods)는 그 행운의 새들에게 사교성을 훈련시켜 고관대작, 어린 학생들, 언론과도 교류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머지않아 그 새들은 영어로 말도 할 겁니다!)

“칠면조 사면”

그것이 바로 기업의 시대에 새로운 인종차별이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잘 키운 칠면조들―여러 나라의 토착 엘리트들, 부유한 이주민 공동체, 투자 은행가들, 가끔은 콜린 파월이나 콘돌리자 라이스, 몇몇 가수들, 몇몇 작가들(저 같은)―은 사면을 받고 프라잉 팬 파크에 갈 수 있습니다. 그 나머지 수백만 마리는 일자리를 잃고 집에서 쫓겨나며 전기와 수도가 끊기고 에이즈로 죽습니다. 원래 그들은 잡아먹기 위해 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라잉 팬 파크에 있는 행운의 칠면조들은 잘 지냅니다. 그들 중 일부는 IMF와 WTO를 위해 일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 중 누가 과연 그런 기구들을 칠면조를 잡아먹는다는 이유로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일부는 칠면조선택위원회 위원들로 근무합니다. 그렇다면 그들 중 누가 과연 칠면조들이 추수감사절에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 자신이 추수감사절에 참가하면서 말입니다! 누가 과연 빈민들이 기업 세계화에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프라잉 팬 파크에 가기 위해 난리들입니다. 그 와중에 대부분 죽어나간들 뭐가 어떻겠습니까?

새로운 인종차별 프로젝트의 일부는 ‘새로운 대량학살’입니다. 경제적 상호의존의 이 새 시대에 경제 제재는 새로운 대량학살을 촉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현장에서 사람들을 직접 살해하지 않고도 대량 살상이 가능한 상황을 조성한다는 뜻입니다.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유엔의 이라크 인도주의 조정관이었던(그 뒤 넌더리가 나서 사임한) 데니스 핼리데이는 이라크 경제 제재를 대량학살이라는 용어로 묘사합니다. 경제 제재는 이라크에서 어린이 5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감으로써 사담 후세인의 악행을 능가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 정책으로 추진하는 것은 구시대적이고 불필요한 일입니다.

국제 무역·금융 기구들이 감독하는 다자간 무역법과 금융 협정의 복잡한 체계는 빈민들이 그들의 반투스탄[남아공의 흑인 격리 지역]에서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 전반적 목적은 불공정을 제도화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방글라데시 의류 제품에 미국산 의류보다 20배나 높은 세금을 매기는 데 다른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세계 카카오 열매의 90퍼센트를 생산하는 나라들이 세계 초콜릿의 겨우 5퍼센트만을 생산하는 데 다른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이보리 코스트[코트디부아르의 옛 이름]나 가나 같은 카카오 열매 생산국들이 초콜릿 생산을 시도했다가 엄청난 관세 부과로 시장에서 퇴출당하는 데 다른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자국 농부들에게 하루 10억 달러씩 보조금을 지급하는 부국들이 인도 같은 빈국들에게 전기 보조금을 포함한 모든 농업 보조금을 폐지하라고 요구하는 데 다른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50년 넘게 식민주의 정권들한테 약탈당했던 옛 식민지들이 바로 그 정권들에 대한 외채의 늪에 빠져 해마다 약 3천8백20억 달러씩 상환하는 데 다른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칸쿤에서 무역 협정이 무산된 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했습니다. 비록 우리 정부들이 신뢰를 회복하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아주 많은 나라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몇 년 동안 투쟁한 결과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칸쿤에서 배운 것은 진정한 타격을 가하고 급진적 변화를 강제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저항 운동들이 국제적 동맹을 결성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칸쿤에서 우리는 저항을 세계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어떤 개별 국가도 혼자서 기업 세계화 프로젝트에 맞설 수 없습니다.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관한 한, 우리 시대의 영웅들이 갑자기 찌그러지는 것을 우리는 몇 번이나 목격했습니다.

비범하고 카리스마적인 사람들, 저항 운동의 거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 수반이 되면 세계 무대에서 무기력해집니다. 저는 브라질 대통령 룰라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룰라는 지난해 세계사회포럼의 영웅이었습니다. 올해 그는 IMF 지침들을 이행하고 연금 혜택을 축소하며 노동자당에서 급진파를 쫓아내기에 바쁩니다. 전 남아공 대통령 넬슨 만델라도 생각납니다. 1994년에 집권한 지 2년도 채 안 돼 만델라 정부는 ‘시장의 신’ 앞에 거의 무조건 무릎을 꿇었습니다. 만델라 정부는 대규모 사유화와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제도화해 수많은 사람들한테서 집, 일자리, 물과 전기를 빼앗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배신감에 우리 가슴을 치면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찌그러진 영웅인가 민중의 힘인가

어떻게 보더라도 룰라와 만델라는 걸출한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저항 운동에서 반대편으로 넘어가 정부에 들어가게 되는 순간 그들은 갖가지 위협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그 중에서 가장 악질적인 것은 자본 도피 위협인데, 이것은 어떤 정부라도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카리스마나 투쟁 경력이 기업 카르텔을 약화시킬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모르거나, 그 문제에 관한 한, 권력의 작동 방식을 모르는 것입니다. 급진적 변화는 정부들끼리 협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민중의 힘으로 강요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 세계사회포럼에서는 세계 최고의 지성 몇몇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의견을 교환할 것입니다. 이런 논쟁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쟁취하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훼손돼서는 안 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정치 행동을 희생시킨 채 이 과정에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면, 세계 정의 운동에서 그토록 중요한 구실을 해 왔던 세계사회포럼이 우리 적들의 자산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긴급히 토론해야 하는 것은 저항의 전략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표적을 겨냥해야 하고, 진정한 전투를 벌여야 하며, 진정한 타격을 가해야 합니다. 간디의 ‘소금 행진’은 단순한 정치적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간단한 저항 행위로 바다까지 행진해서 스스로 소금을 만든 수천 명의 인도인은 소금세법을 깨뜨렸습니다. 그것은 영국 제국의 경제적 토대를 겨냥한 직접적 타격이었습니다. 그것은 실질적이었습니다. 우리 운동이 몇몇 중요한 승리를 얻었지만, 우리는 비폭력 저항이 무기력하고 자족적인 정치적 연극으로 전락하도록 놔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갈고 다듬어야 할 매우 소중한 무기입니다. 그것이 단순한 볼거리, 언론의 사진 촬영 기회로 변하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지난해 2월 15일, 5대륙에서 1천만 명이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 시위를 벌인 것은 대중의 도덕성이 분출한 경이로운 광경이었습니다. 그것은 경이로웠지만 충분하지는 않았습니다. 2월 15일은 주말이었습니다. 하루 일을 관두고 나와야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휴일 시위는 전쟁을 막지 못합니다. 조지 부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압도적 여론을 무시하고 오만하게 행동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교훈이 돼야 합니다. 부시는 이라크를 정복하고 식민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프가니스탄, 티벳이 그랬고, 지금 체첸이 그러하며, 한때 동티모르가 그랬고, 팔레스타인이 아직도 그렇듯이 말입니다.

부시는 위기를 쫓아다니는 언론― 그러나 위기로 먹고사는 언론 ―이 이제 그것을 포기하고 다른 데로 이동할 때까지 자신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머지않아 [병사들의] 시체는 언론에서 사라질 것이고 격분했던 우리는 모두 흥미를 잃게 될 것입니다. 부시는 바로 그걸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운동에는 중요한 세계적 승리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옳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결의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뭔가 쟁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뭔가를 쟁취하려면 우리는 뭔가에 동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마 최소한의 의제일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정말로 반대한다면, 우리의 시선을 이라크로 돌립시다. 이라크는 이 둘 다의 필연적인 절정입니다. 사담 후세인이 체포되자 많은 반전 운동가들이 혼란에 빠져 후퇴했습니다. 그들은 사담 후세인이 없어졌으니 세계가 더 나아진 것 아닌가 하고 조심스레 묻습니다.

세계적 승리

하지만, 이 문제를 정확히 살펴봅시다. 사담 후세인을 체포한 미군에 박수를 보내고 거슬러 올라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을 정당화하는 것은 칼잡이 잭[Jack the Ripper : 19세기 말 영국의 연쇄 살인범]이 보스턴 교살자[Boston Strangler : 1960년대 미국의 연쇄 살인범]를 할복 살해한 것을 신성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25년 동안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합작 사업을 해 오던 둘이 그렇게 했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더러운 거래를 둘러싸고 사이가 틀어진 사업 파트너들입니다. 잭이 최고경영자(CEO)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제국주의를 반대한다면, 우리는 미국 점령에 반대한다는 것과 미국은 이라크에서 철수해야 하고 이라크 민중에게 전쟁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의 저항을 고조시킬 수 있을까요? 정말 작은 것에서 시작해 봅시다. 점령에 반대하는 이라크 저항 세력을 지지하는 것이나 저항 세력의 정체(옛 살인자 바트당 세력인가, 아니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인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쟁점이 아닙니다. 우리는 점령에 반대하는 세계적 저항이 돼야 합니다.

우리의 저항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제국이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실제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행동을 뜻합니다. 그것은 병사들이 전투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 예비군들이 복무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 노동자들이 배와 비행기에 무기 싣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인도와 파키스탄 병사들을 이라크로 보내 뒤처리를 맡기려는 미국 정부의 계획을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나라들에 사는 우리가 저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심지어 세계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부당함을 영속시키고 미국의 패권을 확립하려 합니다. 세계사회포럼은 정의와 생존을 요구합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지금 전쟁중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