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4·3 항쟁:
미군정과 한국 정부가 행한 끔찍한 학살과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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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슬〉이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에서도 소수 극장에서만 상영되고 있는 이 영화는 1948년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4·3 사건을 다룬 영화다. 평화롭게 살던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강간하는 군인들, 그러한 복마전에 분개하며 상관을 살해하고 탈영하려는 사병들의 모습들이 냉혹할 정도로 새하얀 겨울 풍경 속에 묘사되는 한편, 그들을 피해 산 속의 동굴로 달아난 사람들의 우애와 연대감, 그리고 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새까만 동굴 배경 속에 그려내면서 두 내러티브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1990년대 전까지만 해도 4·3 항쟁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는 오직 “공산주의 폭동”뿐이었다. 이후 진상규명 활동이 이어지고 2006년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사과를 하고 특별법이 제정되는 성과가 있었지만, 그때까지 4·3 항쟁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학살극”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지난 이명박 정권 동안 한국의 지배자들은 4·3 항쟁의 의의를 지속적으로 깎아내리는 조처를 남발했다. 심지어 지난해 육군 당국은 “천하무적 백골사단”이라는 육군 홍보 동영상에서 당시 군인들의 민간인 학살 사진과 함께 “무장공비 폭동 진압”이라는 자막을 올렸다가 반발이 일자, 육군 참모 총장이 직접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4월 3일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은, 지배자들이 말하는 “폭동”도,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학살”도 아니었다. 그날 있었던 일은 민주적이고 정당한, 그리고 급진적인 아래로부터의 항쟁이었다.
정치투쟁은 계급투쟁을 반영한다는 자명한 이야기를 생각해 봤을 때, 실제로 당시 제주도 지역에는 식량난과 전염병 등의 열악한 경제 상황과, 일제 때보다 심각해진 미군정의 실정과 비리, 그리고 미군정과 우파 청년단, 경찰조직 등이 주도한 좌파 세력과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고문, 탄압 등이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미군정이 식량난에 시달리던 제주도민들에게 쌀을 몰수하는 “미곡수집정책”을 실시하자 제주도 민중의 광범위한 저항과 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1947년 3·1절 기념 행사에서 경찰에 의해 어린 참가자가 사망하면서 제주도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쌓이고 쌓인 군경과 우파 세력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는 경찰서를 습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경찰들은 이들 중 6명을 사살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를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 사건”으로 규정했다. 당시 남로당과 제주도 민중들은 한데 결합해서 이에 항의하는 민관총파업을 벌였고, 제주 경찰들 중 20퍼센트가 여기에 가담하는 등(이때 가담한 경찰들은 해임당하고 이후 이 자리를 서북청년회 등 극우 단체가 대체하기 시작했다) 지배자·우파 세력과 제주도 민중들 간의 갈등은 극심해지고 있었다.
“제주 도민을 다 죽이더라도 제주도를 확보하라”
이 후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1948년 4월 3일 무장 봉기로 4·3 항쟁은 시작됐다. 미군정은 “제주도가 필요하지 제주도민은 필요하지 않다. 제주도민을 다 죽이더라도 제주도는 확보해야 한다”고 하면서 한국인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이 항쟁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미군정은 “제주도 비상 경비 사령부”를 설립해 육지의 각 도로부터 군대, 경찰, 서북청년회 등 각종 반공 단체들을 제주도에 대대적으로 급파했다. 지배자들과 우파 세력의 잔혹한 탄압과 이에 맞서는 저항이 계속되는 가운데 평화협상이 열리기도 했으나 미군정과 우익 단체들이 강경한 진압 정책을 고수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와 함께 거대한 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선거 공무원들 역시 업무 수행을 거부하는 등 사실상 선거 자체가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다. 결국 당시 단독 정부 선거에서 제주도의 투표율은 50퍼센트를 넘지 못하면서 사실상 무효처리가 됐다.
같은 해 8월 15일 이승만 정권이 수립된 이후, 이승만 정권은 4월 3일부터 계속되고 있는 제주도의 상황을 “제주도 빨치산”의 소행이라고 홍보했고, 이를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이후 이승만 정권은 10월 11일부터 제주도에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을 시행했고,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한라산 자락을 둘러싸고 산으로 피신한 수많은 제주도민들을 학살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고, 영화 〈지슬〉 역시 이때를 배경으로 한다.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신고된 희생자 수만 1만 4천여 명이라고 한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사람들까지 따지면 3만 명 정도로, 대략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 사망한 수준이었다.
기억의 회복
이후 4·3 항쟁의 기억은 금기시됐다. 민중이 주도한 4·3 항쟁이 학살로 끝난 후, 한국 지배자들은 이 항쟁을 ‘공산주의 폭동’으로 규정했고, 제주도민들은 온갖 편견과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학살 과정에서 제주도민들끼리 서로 총을 겨누도록 만듦으로써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내가 제주도에 살면서 봐 온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4·3 때 돌아가신 사람들의 제사를 같은 날에 치르며 함께 넋을 기리는 모습이었다. 기억은 탄압 당할지라도, 그 현실은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투쟁의 성과가 민주화의 성과를 이룩한 이후, 4·3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 시절까지 4·3에 대한 주류적이고 공식적인 평가는 단순한 ‘국가에 의한 집단적인 학살’이었다. 이는 학살의 이면에 숨은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과, 그러한 국가에 맞서는 민중들과 좌파 세력들이 벌이는 계급투쟁이 실종된 관점이다.
한국 사회의 지배자들이 하나로 뭉쳐서 탄생시킨 박근혜 정권이 4·3 항쟁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질지는 명약관화하다. 대선 기간 동안 박근혜는 제주도에 방문해서 당시 학살에 대해서 유감이라고 표명하기는 했지만, 그는 4·3을 김일성의 지령에 의한 무장 공비 반란으로 이야기하는 국사 과목 대안 교과서에 대해 칭송을 늘어놓은 전력이 있다. 이명박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박근혜와 우파 지배자들 역시 4·3 항쟁에 대한 폄하와 비하를 제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탄압에도 4·3이 민중 항쟁이었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 행한 제국주의적 한반도 분할과 이에 편승하는 이승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며 시작된 4·3 항쟁은, 민중이 중심이 된 아래로부터의 저항으로서 한국의 계급투쟁 전체에 매우 의미가 있는 저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