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상문고 투쟁의 주역들을 만나다

상문고 투쟁은 비리 재단에 맞서 싸운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 들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지난 3월 22일 재판에서 이우자(재단 이사장) 측이 패소했다. 재판이 있었던 날 밤에 상문고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 들이 함께 모여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3월 29일, 우리는 22일 재판 이후의 소식을 듣기 위해 상문고 학생회실을 다시 찾았다. 지난 3월 20일에 상문고 김관우 군(부학생회장, 3학년)과 이종대 군(3학년)을 각각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이 날은 두 사람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종대 군은 상문고 투쟁 승리의 원동력을 이렇게 지적했다.

"처음에 학부모님들 걱정을 많이 했어요. 아무래도 강남 분들이라 아이들을 감싸는 경향이 많고, 학교가 혼란스러운 것을 싫어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예상 밖으로 부모님들이 학생들의 힘든 상황을 이해하시고, 적극 동참해 주시더라구요. 유인종 교육감 집 앞에서 새벽 집회할 때가 대표적인 경우였어요. 정말 위대하셨죠.

"그리고 무엇보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걸 증명했다는] 점이 [중요했]죠. 학생들이 과격하게 자신의 의사 표시를 한 거예요."

그는 "남은 1학년들이 아니었다면 망했을 것"이라며, 120여 명의 1학년 학생들이 재배정 신청을 하지 않고 상문고에 남은 것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김관우 군은 재판 후에 주변 사람들에게 "표정이 밝아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그는 다른 사립학교도 문제가 많다는 걸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상문고의 사례가 큰 발자취를 남겼다고 생각해요. 이 파장이 커져서 큰 변화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김관우 군은 상문고 투쟁이 마치 옛 일처럼 느껴진다며 학생회실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칠판을 빼곡이 채웠던 투쟁 일정은 어느새 '9월 축제' 일정 등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음은 상문고 학생들과의 인터뷰이다. 인터뷰에 기꺼이 응해 준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김관우 3학년 현재 부학생회장

문 : 이번 '상문고 사태'는 1994년 당시 구속까지 됐던 장방언 교감이 올해 2월 19일 신임 교장으로 임명되면서 촉발되었습니다. 장방언 교감은 어떤 인물인가요?

답 : 장방언 교감은 상춘식 교장 시절에 교감을 하면서 성적 조작을 했어요. 비디오 자료를 보면, 직접 성적표를 가져다가 지우개로 지우고 나서 볼펜으로 옆에 '수'를 쓰는 식으로 조작했어요. 상춘식 씨의 의견을 교무회의나 여러 군데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죠.

문 : 1999년 12월 27일 4차 관선 이사가 이우자 정이사 선임을 의결하고, 유인종 서울시 교육감이 이를 졸속 승인한 것이 장방언 교장 임명의 배경인데요. 당시 학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답 : 2000년 1월에 선생님 50여 분이 교육청 점거농성을 시작했어요. 저희들은 한참 후에 홈페이지나 전화 연락을 통해서 알게 됐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저희들은 재단 복귀 시도를 정확히 알지 못했고 언론 보도도 제대로 접하지 못했어요. 가장 당혹스러웠던 쪽은 학생들이었을 거예요. 말로만 듣던 그 사람들이 학교에 다시 들어온다니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선생님들도 다 교육청에 가 계시고 …. 개학을 하고 나서야 여러 사실들을 한꺼번에 알게 되었어요. 한꺼번에 알게 되면서 많은 충격을 받았어요. 개학 첫 날부터 학생회와 3학년 선배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시위 같은 것을 시작했어요. 아주 분노에 찬 분위기였어요. 선생님들이 단결해 움직였다는 것이 학생들에게 크게 어필이 된 것 같아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처음에는 무엇이 본질적으로 잘못인지를 인식하기 힘들었어요. 차차 알아가면서 부패 재단이나 사립학교법에 대해서도 깨닫게 된 거죠.

문 : 이번 상문고 사태를 겪으면서 교육부나 교육청, 교육 관료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나요?

답 : 교육청은 상춘식 체제 시절에 감사 한번 제대로 나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교육청은 제대로 관선이사를 파견하지 않아 이우자를 정이사로 임명하는 상황까지 오게 했어요. 그야말로 안일한 태도로 일관했어요. 교육청과 행정 관료들에게 약간의 책임 의식만 있었다면 적어도 학교가 그 지경까지 가도록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실제로 학교에서 분규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회피성의 멘트만 하고 그랬어요. 교육청은 그야말로 무사 안일주의·행정 편의주의에 찌들어 있어요.

문 : 상문고는 부패 재단의 비리말고도 체벌 문제로 악명이 높은데 어떤 실정인가요?

답 : 체벌이 주는 신체적 고통도 컸지만 그보다 더 잔인한 건 정신적 고통이었어요. 예를 들면 침을 뱉었다고 해서 바닥에 뱉은 침을 혀로 핥으라고 시킨다든지, '너는 집도 가난하고 …' 하는 식으로 학생들 앞에서 모욕을 주기도 했어요. 돈을 못 내는 사람은 무조건 그런 식으로 천대했거든요. 청소도 돈을 안 내는 사람들만 시켰어요.

상춘식 체제에 반항하는 학생들을 이렇게 체벌한 적도 있었어요. 차에 태워 한 시골 집에 데려가 벽에 점을 하나 찍어 놓고 '열중 쉬어'를 하게 한 채 그것만 쳐다보게 했어요. 선생님들은 뒤에서 술 마시고 떠들고 놀면서 이틀을 그렇게 세워 놓았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면 정말 별 생각이 다 들면서 사람이 미치거든요.

이상한 별명을 가진 선생님들도 많았어요. 공수부대 출신으로 별명이 '학다리'인 한 선생은 다리를 쉬지 않고 놀리면서 얼굴을 가격하는 걸로 유명했어요.

지금 상대위(상문고 정상화를 위한 대책위)건 상미교(상문고의 미래를 걱정하는 교사들의 모임)건 학교에 재직중인 교사 중에도 실제로 과거에 돈을 걷는데 앞장 섰거나 아니면 체벌을 아주 잔인하게 해서 유명한 사람들이 많아요.

문 : 상춘식이 교장이었을 당시 그 자신이 체벌 대장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답 : 그 사람은 학생들이 지나가다 인사를 안 하면 찍어서 조사를 한 다음에 약점이 잡히면 정학시키고 퇴학시키고 했어요. 학생들 보는 앞에서 선생님의 따귀를 때린다던지 '똥차 타고 다니냐?'며 이죽거렸어요. 이런 식으로 학교 오는 길에 인상 쓰고 있다가 문 열고 내리라고 해서 시비를 건다든지 여하튼 자신이 할 수 있는 변태적인 모든 짓을 다 했구요.

문 : 마지막으로 상문고 사태를 겪으면서 느끼신 점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주십시오.

답 : 이런 것들[비리 재단 복귀 반대 투쟁]을 하면 피해를 많이 받을 거라고 많이 걱정해요. 물론 소중한 시간들이지만 그런 시간을 투자한 만큼의 가치를 얻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적게는 정의가 무엇이냐는 고민, 넓게 본다면 올바른 방향의 행동을 해 나가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를 배웠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채소처럼 연하게 자라왔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좀더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부심도 갖게 된 것 같아요.

■ 이종대 3학년

문 : '상문고 사태'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재단 비리입니다. 상춘식 재단의 비리 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든다면?

답 : 선배님들은 하나같이 상춘식 시절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를 저으시고 얼굴 빛도 달라져요. 두발이나 옷 등 인상 착의 규제도 심했어요. 당시 상문고는 '상문사'라고 불릴 정도로 학생들의 머리가 상당히 짧았어요. 당시 규정은 2cm였는데 2cm면 일주일에 한번씩은 잘라 줘야 하거든요. 머리가 금방 자라니까 매일 머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등교할 때에는 1차로 체육 선생님들이, 2차로 교련 선생님들이, 마지막으로 상춘식 교장이 검사를 했대요. 그 세 관문을 제대로 통과해야 교문 통과가 무사히 끝나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 위축이 되는 거예요. 지나가다가 상 교장에게 거수경례 안하면 뺨 맞고 심지어 선생님들한테도 그랬대요. 실제로 싸대기를 맞은 선생님이 지금 상대위[상문고 정상화를 위한 대책위]에 계세요. 상문고에서 상당한 지성인으로 불리는 분들 중 한 분인데 상춘식한테 싸대기까지 맞으신 거예요.

찬조금이나 여러 가지 명목으로 돈을 징수했어요. 예를 들어서 상문고등학교 명찰이 현재 500원 밖에 안 하는데 당시에는 5천 원이었대요. 4천5백원을 착복한 거죠. 이건 새발에 피예요. 보충수업비 뻥튀기, 찬조금을 학급별로 할당하기 등.

재단은 학교 부지를 많이 팔아 고급 빌라를 지어서 엄청난 돈을 챙겼어요. 학교 땅 4만 평 중 2만 평을 팔았으니까. 학교가 세워질 당시에 이 근방의 땅 값이 10원인가 그 정도밖에 안 했는데 강남 땅 값이 오른 뒤 땅 팔아 엄청나게 돈을 벌었어요.

문 : 상문고 사태는 1999년 8월 사립학교 법이 개악되고, 4차 관선 이사들이 재단측 이사를 인정해 주고 교육부가 승인해 주자 사태가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학생들 사이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답 : 선생님들이 교육청을 점거하신 뒤 소식을 알게 됐어요. "선생님들이 재단빌딩에 들어가셨다." "이상희 선생님을 비롯해서 선생님들이 구속되셨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재단 복귀 문제가 장난이 아니란 걸 알게 됐죠. 지난해 2월 7일에 개학을 한 뒤 학생회가 상춘식이 누구인지를 알렸어요. 그러니까 애들이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 하고 느꼈죠. 2월 7일 집회는 누가 시작했는지 5교시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몇 명이 나와서 팔뚝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졸업하신 26기 선배님들이었어요. 선배님들이 '나가자' 하면서 돌아다니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애들이 '그래 나가자' 하면서 몰려 나갔어요. 생각을 해 보면 그 때는 거의 우발적이었어요. 방송부 애들도 얼떨결에 빨리 마이크 설치했고 애들이 시위하고 있으니까 회장형이 나와서 "자 우리가 몰아낸다"고 말하고 …. 그 때부터 상문고의 데모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거죠. 2월 7일 이후 교내에서 계속 데모를 했어요.

법원 앞까지 가서 시위하고 파고다 공원에서 명동성당까지 가두 행진도 했어요. 그 정도 하니까 관선이사가 나오더라구요. 그 때 선생님들한테 이야기를 들어 봐도 상황은 좋지 않았어요. 그런데 학생들이 데모 한번 하니까 교육청이 움직이고 관선이사가 나온 거예요.

문 : 시위하면서 새롭게 느끼고 배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답 : 처음에는 솔직히 끌려 다닌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학생회 선배님들이 주도한 것도 사실이고. 2월 데모는 우리들이 그렇게 크게 느끼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6월 29일 김영태 부장 판사의 판결이 난 후 7월부터 비대위를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움직이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비대위에 지원자가 400여 명이나 됐어요. 이제 학교가 부패 재단에게 넘어가게 되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학생들이 나서기 시작한 거에요. 특히 1학년들의 반응은 정말 폭발적이었어요. 그런 식으로 비대위가 조직됐어요. 법원 갈 때가 백미였어요. 전경들이랑 부딪히고 장난 아니었어요. 옆에서 누가 밟히고 맞고 그러니까 눈이 뒤집히더라구요. 그 때 일종의 상문고 학생들 사이에서 전우애 같은 게 생긴 것 같아요. 우리 힘으로 맘 먹고 법원까지 진출했는데 전경이 막았어요. 아마 우리가 최초로 서울지법에서 검찰청까지 행진한 것일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뭔가 했구나', '우리가 대단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문고등학교 홈페이지를 보면 애들이 뭔가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우리 스스로 우리의 권리를 찾겠다는 거죠. 예를 들어 구두 신는 문제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구두 신게 해 달라고 사정하는 애들도 있었고, 그저 성질만 내는 애들도 있고, 반면에 조목조목 헌법까지 뒤져서, 머리카락 길이나 구두를 신느냐 마느냐 하는 건 신체의 자유에 관한 문제라고 말하는 식의 성숙된 모습도 있었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 자기 인권에 대한 의식이 싹트지 않았나 생각해요.

문 : 당시 법원 앞 집회에는 얼마나 왔나요?

답 : 전교생 2천 명 중에 1천2백 명이 왔습니다.

(이종대 군은 상문고와 법원 주변의 약도까지 그려가며 작년 법원 앞까지 진출했던 시위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문 : 1천2백 명이 전경이랑 싸울 정도로 상춘식·이우자의 복귀에 어마어마하게 불만이 많았던 거군요.

답 : 재단의 전력을 보면 이 사람들이 도대체 교육을 하려는 사람들인지 의문이 가요. 재단측은 VIP 리스트까지 만들었어요. 당시 상문고등학교에는 이문열 씨 아들이나 김홍신 씨 아들이나 장세동 씨 아들이 다녔어요. VIP 리스트에는 정권과 연관된 사람들도 많았죠. 그런 사람들의 자제들을 잘 봐준다는 식으로 로비를 하고 교육청이 못 움직이게 만들어 놔서 감사에 한 번도 안 걸렸대요. 교육청 건물의 수위까지 상춘식·이우자의 로비를 받았다는 말도 있어요. 이렇게 미리 손을 써 놓고 끈 풀린 망아지처럼 돈을 막 걷어들이는 거예요. 맨 처음에 상춘식 씨 집은 17평짜리 연탄 보일러 아파트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서울에서 가장 부자들이 산다는 성북동에 30억 짜린가 40억 짜리 집에서 살아요. 미국에 우리 돈으로 20억 정도 되는 별장이 있고요. 그런 돈들이 어디서 나왔냐는 거예요. 그리고 더욱 더 용서가 안 되는 것은 수익 사업을 위해 내신 성적을 조작한 일이예요.

학교 설립을 거의 장사로 여긴 것 같아요. '학교를 세우면 여기저기 걷어들이는 돈이 많아서 수지 맞더라' 이런 말이 퍼지다 보니까 전국에 사립학교가 우후죽순 생긴 거죠. 애들이 분노한 이유는 성적은 자기가 얼마나 공부했는지를 알아보는 수단인데 그걸 돈으로 조작했다는 거죠.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고 화나는 일이었죠. OMR 기계를 설치하려고 하면 상 교장이 막았대요. 왜냐하면 전산 처리가 안 되면 내신 조작이 상당히 쉬우니까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정말 내신 성적이 사업이었어요. 그런 사람이 교장으로 오는 건 정말 우리들이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죠.

문 : 작년 1학기 동안 상문고는 정상화되는 듯했어요. 새로운 학교 운영 방식도 많이 보였구요. 당시를 회고한다면.

답 : 잊을 수 없는 게 있어요. 그 때 두발 제한이 풀렸던 거예요. 애들한테 불만이 많았던 게 두발 제한이었어요. 지금 상문고는 주변 학교 중에서 머리가 가장 길어요. "상문" 하면 짧은 머리가 상징이었어요. 94년도에 나왔던 TV 자료를 보면 머리가 새하얗습니다.

선생님들이 부패 재단 몰아내자는 이야기를 은연중에 많이 하셨어요. 그러다 보니까 애들이 그 기간 동안에 많이 알게 되었죠. 아마 그래서 6, 7월에 비대위를 만들자고 했을 때 큰 호응이 있지 않았나 생각돼요. 뭔가 학교에 대한 정체성이 생겨가는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인권 선언도 했어요. 물론 일종의 콘서트가 되긴 했지만 …. 저희가 처음으로 고등학교 인권 선언을 한 거였죠.

문 : 교육청과 재단 사이의 비리 의혹이 많이 거론되는데.

답 : 1차 관선이사 시절 교장이셨던 편관보 선생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선배들을 배려해 주신 거예요. 그 선배들은 '상춘식은 물러가라'는 유인물들을 돌렸던 일로 퇴학당했어요. 상춘식은 각 반마다 정보원을 심어 애들을 추궁해서 누가 뿌렸는지 알아낸 거죠. 상춘식은 그 선배들이 검정고시도 못 보게 퇴학 관계 증명서도 안 떼 줬어요. 그러다 보니 편 교장 선생님과 상춘식은 틀어지기 시작했죠. 편 교장 선생님 때부터 학생회, 서클, 교지, 축제도 다시 만들고 교복도 투표로 뽑았어요. 상춘식 입장에서는 속터지죠.

그래서 상미교(상문고의 미래를 걱정하는 교사들의 모임) 교사들에게 지시를 해서 편 교장을 쫓아내도록 했어요. 문제지를 선정하는데 리베이트를 받고 그 돈을 다른 선생님들에게 나눠 준 사실을 잡아 편 선생님을 물러나게 했죠. 교장 선생님이 가시던 날은 비오던 날이었는데 전교생이 나와서 배웅하고 노래 부르고 학생회 간부들은 울고 그랬대요. 그 이후로 상춘식 씨와 관련 없는 사람들로 이사진이 점차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4차는 상춘식 씨 지인으로 가득 찬 거예요. 이사장이 이장호 씨였는데 상춘식 씨와 동향이었어요. 1999년 8월에 사립학교법이 개악돼 당시 관선이사는 99년 12월로 임기를 마치도록 바뀌게 돼 있었죠. 4차 이사회에서 상춘식·이우자 측근들이 정이사가 됐죠. 이우자가 정이사로 선임되고 며칠 뒤에 바로 교육감이 승인했어요. 더 황당한 것은 이사진을 승인할 때 보통 3∼4개월은 심사를 하는데 단 3∼4일만에 처리된 거예요. 이것은 교육청이 뭔가를 꾸미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예요.

문 : 그렇다면 교육청의 재배정안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는 건가요?

답 : 의심이 갔어요. 되레 재단이 폐교를 바랄 수도 있어요. 상문고는 동인재단인데 동인재단에 속해 있는 학교는 상문고밖에 없어요. 상문고가 폐교가 되면 자연스럽게 동인재단도 없어지는 거예요. 법적으로 보면 재단이 사라지게 되면 재단에 귀속되어 있던 재산이 국가로 귀속되지만 재단이 어느 정도 챙길 수 있는 방법이 있대요. 상문고 자리가 서울 강남 노른자위 땅이기 때문에 2천3백억 원 정도 되거든요. 그 중에서 10분의 1만 챙겨도 엄청나기 때문에 재단은 폐교를 바라는 것 같아요.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뿐 아니라 귀찮으니까. 교사들, 학생, 학부모, 언론이 계속 쫑알대니까. 빨리 해결을 하고 싶으니까 또 다른 엽기적인 방법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지방에 땅 값 싼 데에 조그만 학교 하나 지어놓고 상문고는 폐교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동인재단 소속의 학교는 남아 있으니까 재단은 해산하지 않아도 되고 상문고는 폐교되고 그 자리는 재단 땅이니까 팔아서 처분하는 방식이죠. 이 방법은 정희여중고가 실제로 썼던 방법이래요.

상문고를 폐교하기 위해서 1학년 재배정안을 넣은 것 아닌가 의심을 할 만해요. 1학년을 재배정 하면 신입생이 없으니까 뻥 뚫리게 되고 기수 하나가 사라지게 되죠. 저희 3학년이 졸업하게 되면 3학년 있고 2학년 없고 1학년은 언제 들어올지 모르고…. 상문고를 둘러싼 이해 주체들 중에서 상문고가 폐교했을 때 이익을 보는 쪽은 재단밖에 없거든요.

문 : 본인이 바라는 학교 정상화는?

답 : 아놀드 토인비가 말했듯이 역사의 발전은 도전과 응전에서 발전한다고 했는데 우리의 승리는 대한민국 교육에 있어서 한 족적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해요. 학생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학교가 돼야 할 것 같고 학교 운영이 민주적으로 돼야 할 것 같아요.

이메일 구독, 앱과 알림 설치
‘아침에 읽는 〈노동자 연대〉’
매일 아침 7시 30분에 보내 드립니다.
앱과 알림을 설치하면 기사를
빠짐없이 받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