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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라운드 투쟁으로 철도 민영화 반드시 막아냅시다”

이 글은 1월 21일 ‘노동자연대다함께’가 주최한 ‘연대의 밤 - 철도 파업 23일, 그리고 계속되는 투쟁’ 행사에서 하현아 철도노조 서울차량지부장이 연설한 내용이다. 이 행사는 철도 노동자 80명을 포함해 학생, 노동자, 청년들이 참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앞으로의 투쟁과 연대를 다짐하는 자리였다. 

하현아 철도노조 서울차량지부장 ⓒ이미진

(큰 박수)동지들 반갑습니다. 저는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 서울차량지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동지들이 철도 파업 23일 동안, 또 그 전부터 이후까지 보여 주고 있는 뜨거운 연대에 화답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시겠지만 용산경찰서에 지금도 우리 지도부 동지 다섯 분이 구속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엄길용 서울본부장님은 저희 서울차량지부 조합원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지만, 우리 지도부가 아직도 철창 안에 계시기 때문에 대단히 무거운 마음입니다.

그리고 전국에 철도노조 지부가 132개인데요, 저는 그 지부들 중 그냥 하나의 지부장일 뿐입니다. 사회자께서 저희 지부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는데, 그것은 제가 이룬 역사는 아닙니다. 물론 당연히 그렇게 투쟁해 왔던 역사가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 선배들, 그리고 많은 서울차량지부의 기층 조합원 동지들이 이뤄 낸 성과기 때문에 제가 온전히 그 소개를 받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오늘 또 이런 평가를 제가 감히 한다는 것도 사실은 굉장히 많이 떨리고 부끄럽습니다.

아직 저희는 현장의 투쟁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조합원 동지들 모두 다 이 파업 투쟁이 잠시 중단되었지만 철도 민영화 저지 싸움이 올 한 해 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지난 1월 18일 집회를 조직하면서, 다시 현장 순회를 죽 하면서 조합원 동지들과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대단히 힘들고 피곤할 것이라고요. 파업이 끝나고 이제 12월, 1월 임금명세표를 받는데, 다들 참담한 심정입니다. 정말 반 토막 난 급여, 그래서 지부에서는 뭐 급한 대로 그동안 마련해 두었던 구호 기금도 풀고 있고, 또 심지어 대출 사업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파업의 손실을 함께 나누는 임금형평성 기금 마련 등의 작업들도 하고 있지만, 막상 임금명세표를 본 봉급 생활자들이, 대단히 힘들어 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 여기 계신 참석하신 철도 조합원분들 다 아실 것입니다.

아직 파업이 진행중이어서 오늘 이 평가가 좀 우려스럽기도 하고, 맞지 않다는 생각도 중간에 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또 다음 싸움, 제2라운드 싸움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동지들의 소중한 의견도 듣고, 또 제가 23일 동안 조합원들이 생물 같이 역동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 그리고 저 자신도 대단히 나약했던 지부장에서 하루하루 지나면서 파업의 현장 지도부로서 성장해 나간 과정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경험들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는 것도 예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그동안 1백만 서명운동부터 지역대책위 동지들이 굉장히 정력적으로 활동을 해 주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려는 결론은 ‘철도 민영화 저지를 위한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과정을 설명을 드리면, 지난해 5월 이전부터 이미 철도 민영화에 맞선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논란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파업 시기를 놓고도 그랬는데요, 철도산업위원회가 6월에 개최될 거라는 예상이 있었고, 그래서 현장에서 철도산업위원회 개최에 맞춰서 투쟁을 준비하고 파업을 실질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현장 조합원들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물론 조합이 판단하기에는, 어쨌든 산업위원회 개최를 어떻게든 연기시키거나, 유실시키거나, 막아보자는 기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습적으로 6월에 산업위원회가 통과됐고 그걸 막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여름을 경과하면서 민영화 공세에 맞서 조합원들과 함께 계속 대국민 선전전 등 활동을 펼치고, 조합원 간담회, 마음의 준비 — 파업을 향한 전진이죠, 뭐 — 같은 준비 과정들을 겪으면서, 수서 KTX 법인이 설립되면 그 법인 설립 시기에 맞춰서 [파업]투쟁한다는 것으로 전체 조합의 기조를 결정했습니다.

1월 21일 성공적으로 열린 ‘연대의 밤 - 철도 파업 23일, 그리고 계속되는 투쟁’ ⓒ이미진

12월 9일이 임박해서, 철도공사와 국토부가 대단히 긴박하게 민영화를 추진했습니다. 이사회 날짜가 다가왔다는 게 전달이 됐고요, 11월 26일로 기억하는데 [철도노조] 확대쟁대위에서, 6시간 정도 지부장들이 격론을 벌였습니다. 왜냐면 그동안 우리는 파업을 준비하면서 ‘민영화 싸움은 전면 파업으로 준비한다’고 조합원들과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이 파업은 함께, 전부 다, 사활을 걸고 [하자고 했고], 또 특히 제가 지부장으로서 조합원들한테 말씀드렸던 게, 이 파업은 꼭 성사시켜야 하고, 유실돼서도 안 되고, 어느 정도의 성과를 가져오지 않으면 들어오면[복귀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약속을 했던 부분들에 조합원들도 공감했고, 전국의 많은 조합원들이, 아마 특히 서울지방본부 — 소위 철도노조에서 강성부위라고 불리는 — 를 중심으로 한 전면파업을 줄기차게 준비해 왔습니다. 동지들도 기억하시겠지만 위원장도 집회에서 “열차를 모두 다 세워서라도 반드시 민영화를 막겠다”고 국민들한테 약속한 바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11월 26일 파업 전술과 관련해 위원장으로부터 필수유지제도에 입각한 필공파업을 제안 받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 참석했던 지부장들 중 당황하신 분들도 있었고, 물론 철도노조가 전국적인 사업장이기 때문에 지역별 편차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지역별로, 전면 파업이나 전술을 다르게 이해하거나 준비해 왔던 부분들도 분명히 있었던 걸로 그날 확인됐죠. 그래서 그 논란 속에서 저도 진심 어리게 지부장 동지들에게 호소하고, 파업의 파급력을 높여서, 열차를 전면적으로 세워서, 함께 파업 투쟁을 승리하자는 기조로 말씀을 드렸었는데, 어쨌든 결론은 위원장한테 일임이 됐고, 결국 필공파업으로 정리됐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날의 그 토론이 대단히 유의미했다고 생각해요. [그 토론으로] 서로 책임지는 부분들이 생겼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필공파업을 주장했던 본부장들과 지부장들이 그것[필공파업] 정도를 실행하기 위한 약속을 그 날 했다는 점도 분명히, 이후에 필공파업이지만 그래도 파업이 길게, 지속적으로 완강하게 지속했던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하고 혼자 그냥 생각해봤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전면파업을 준비해 왔던 기관차, 차량, 열차승무 지부 같은 집단사업장의 경우에는 11월 26일 [필공파업을] 결정하고 12월 9일로 파업 디데이를 잡아도, 조합원들과 소통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 있어요. 많이 만날 수 있으니까요. 근데 분산사업장의 경우에는 좀 달랐죠. 분산사업장의 경우에는 필공 명단을 작성하는 것부터 조합원들과 함께 소통하고 결의하는 과정들이, [그동안] 전면파업을 준비해 왔던 지부장들에게는 대단히 부담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제 파업이 돌입했던 12월 9일, 집단사업장의 경우에는 원래도 주력 대오였고 완강하게 파업에 돌입했는데, 분산사업장들 같은 경우에는 파업에 많이 불참하거나 들어오지 못했고, 명단 작성에서부터 실패해서 파업에 어려움을 겪었던 지부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안타까운 일들도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12월 9일 파업에 돌입합니다. 그 이유는 12월 10일이 [수서발 KTX 법인 설립을 결정하는] 철도공사 이사회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회 전날 파업에 들어가는 게 맞겠다고 해서 들어갔는데요. 동지들도 아시다시피 필수유지 파업은 열차 차종별로 유지율을 유지하면서 파업을 하게 됩니다. 특히, 철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KTX 운행율 같은 경우에는 거의 본사의 대체인력들이 그동안 면허를 준비해 왔고 연습을 다 해왔기 때문에 [사측은] 1백 퍼센트 운행을 장담했어요. 심지어 2009년에는 1백2퍼센트까지 열차 운행을 유지했던 일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하루 전날 파업한다고 해서 과연 12월 10일에 철도공사가 ‘이사회 안 할게’ 하고 나오진 않을 거라고 조합원들도 다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12월 9일 파업에 돌입하는 것이 일단 1차적인 목표였습니다. 그 즈음 기관차승무지부에서 나왔던 문건이 있는데요, 어쨌든 필공파업으로 결정된 이후에는 완강하고 지속적으로 파업을 유지하고 1차의 분기점과 목표점, 파업의 전망을 조합원들과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기조의 문서였습니다.

저도 그 문서를 받아서 조합원들한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첫째는 2009년보다 [파업을] 더 해야 한다는 것, 둘째는 12월 19일은 박근혜 대통령이, 불법이지만 당선 1주년을 맞기 때문에 그때를 축제적으로 맞지 못하도록 파탄 내는 것, 그러기 위해 12월 19일을 반드시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렇게 되면 박근혜 정부가 부담스러워서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소하든지 아니면 강경 진압으로 나갈 거라고 조합원들한테 설명을 하면서 12월 19일을 1차 분기점으로 갖자고 했습니다.

서울차량지부의 경우에는 연말이 되면 해돋이 열차가 있어요. 관광객들이 이 열차를 타고 나가서 새해맞이를 합니다. 두 번째 [분기점은] 바로 [이 해돋이 열차를] 안 보는 거였습니다. 이렇게 연말까지의 정세를 전망했습니다.

즉, 12월 19일을 넘겨서 더 지속적으로 완강하게 가면 연말까지도 파업을 유지할 수 있겠다는 것이 조합원들과 저 개인적인 약속이고, 지부의 방침이었죠.

다만 이 와중에 12월 10일 공사 이사회[에서 수서발 KTX 법인 설립이 날치기] 통과될 때, 필수 조합원들이 굉장히 긴장을 많이 했어요. 위원장이 그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수서 KTX 법인 [설립한] 이사회 [결정을] 철회 안 하면 우리는 중대한 결심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합원들이 바짝 긴장을 해서 ‘아, 이제 필수[조합원들]도 나가는구나’ 하고 다들 판단하고 있었어요. 실제로 조합원들이 저한테 그런 말씀들을 굉장히 많이 하셨습니다. “중대한 결심”이란 건 더 상승된 투쟁을 의미하기 때문에, [필수 조합원들이] 그렇게 결심을 하셨고, 현장의 조합원들과 그런 약속도 계속하고 공감하고 있었던 부분인데요, 막상 그런 발표는 없었어요. 다만 “완강하게 유지하자”는 기조로 [파업 투쟁이] 지속되게 됩니다.

이사회가 끝나고 나서부터 국토부나 공사는 이 파업을 조기에 종료시키기 위해서는 파업 3일차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그래서 아시겠지만 3일차부터 직위해제가 시작되죠. 그런데 2009년에도 저희가 직위해제를 받았고, 2006년에도 직위해제를 받았는데, 이 문제에서는 대법원 판례 등이 있기 때문에 조합원들에게 크게 위협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오히려 조합원들이 ‘야, 이거 너무 부당하다’, ‘우리 동료들이 직위해제됐는데 필수 조합원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고민도 더 하게 되면서, 직위해제가 역효과를 낳게 됩니다. 파업 대오가 이미 직위해제되서 돌아가기 어려운 상황이 된 이후, 국민 여론이 그때부터 공사를 비난하기 시작하고, 여론이 열렬하게 폭발[적으로 파업을 지지]하는 상황을 목도하게 됩니다. 조합원들이 놀랐어요. 파업 한 번 해서 3일차 넘어가면 ‘국민의 발을 볼모로 한, 이기적인 철밥통’이라는 비난이 항상 쏟아졌기 때문에, 사실은 아시겠지만, 파업 중에 선전전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파업 같은 경우에는 그 시기를 경과하면서 대학생들의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가 등장하고, 열렬한 지지 속에서 조합원들이 밖으로 나가서 선전전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이르는 상황이 되고요. 파업 대오가 오히려 강고해지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파업 초기에, 아까 말씀드렸던 분산사업장 등 파업에 돌입하지 못했던 지부들이 속속 파업 대오로 다시 재조직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여기 앞에 청량리 전기지부 홍영희 전 지부장 동지 와 계시는데, 본인 스스로 ‘추노꾼’이라고 하셨습니다. 파업 대오는 대오대로 유지되고, 파업에 돌입하지 못한 비필수 조합원들을 [지부의 간부들이] ‘잡으러’ 다니는 거죠. 주재나 분소에 좇아가서, 설득해서 ‘잡아’가지고 차에 태워서 파업 대오에 결합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저희 지부 같은 집단사업장은 당연히 복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전체 결의가 있기 때문에 분산사업장들도 계속 파업 대오가 늘어나는 상황이 돼 오히려 파업의 힘이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커지고] 우리 힘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4일 집회가 정점이었던 것 같아요. 초기에, 14일 집회 때 정말 많은 대오가 상경 투쟁을 했고, 그때 감격이나 소름도 많이 느꼈어요. 저도 그날 단상에 올라가서 그 “어머니의 마음으로” 직위해제한 최연혜 사장, — 지금 그 바람난 계모가 명품 쇼핑하러 지금 다니고 있죠? 지역구 구걸하면서요 — 그런 “어머니”를 비판하고, 또 이 투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 전 더 길게 가면 사실 힘들다 하는 생각을 초반에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 빠르게 결정해서, 저들이 지도부를 침탈하거나, 수배를 내리는 것이 예상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전면파업으로 나가자는 주장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학생들도 참가했고, [조합원들이] 야간 촛불까지 [참가했어요.] 사실 철도노동자들이 민주노총 집회에 그동안 거의 참가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우리가 우리 힘으로 싸우면 뭔가 얻는 노조거든요. 기존의 대기업 노조라고 할 수 있고요.

그런데 이기적이진 않아요. (청중 웃음) 왜냐하면 저는 2006년, 2007년, 2008년에 KTX 여승무원 투쟁 등 비정규직 투쟁에 결합했는데, 그때 보여 줬던 노동자들의 의리가 있었어요. 당시 [후원] CMS도 5천 명 넘게 하며 연대했고, 또 저희 지부 같은 경우에는 제가 철탑 올라갔을 때 [조합원들이] 안전운행 투쟁도 하면서 비정규직 동지들의 정규직화 투쟁에 함께했거든요. 그런데 그런 부분들 많이 빠지고 이렇게 철도만 알거나, 혹은 산별로 전환도 안 하는 부분이 많이 강조되다 보니까 [철도노조가] 연대를 많이 안 하는 거 같지만, 사실 그것은 활동가들과 간부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조합원들은 항상 설득하고 토론하고 함께하면 연대할 마음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12월 14일 집회를 경과하면서 조합원들도 아침에 나와서 밤 촛불 집회까지 결합하는, 그런 놀라운 변화된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1월 18일 집회 때 보니까 2시 집회 끝나고 또 집에 가더라고요. 파업 끝나니까 다시 철도 노동자로 돌아왔습니다. (청중 웃음)

원래 앞에 [앉아 계신] 박세증 [청량리기관차승무]지부장이 지난번 파업 중에 [노동자연대학생그룹이 주최하는 포럼에] 연사로 이렇게 나오시기로 예정돼 있었는데, 16일 체포영장 발부되면서 토론회가 무산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박세증 지부장님이 [연설을] 했으면 했어요. 운전지부가 [파업] 23일 동안 보여 준 최저 복귀율에 놀랐거든요. 저는 입사 이후로 원래 차량이 대단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래도 1988년, 1994년 그 엄혹했던 시기에도 파업을 만들고, 8시간 노동제라는 전체 노동자의 요구를 걸고 싸웠던 기관차지부 운전조합원들이 저력이 있구나 하고 이번에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겼거든요.

체포영장 발부된 뒤로는 이데올로기전이 벌어졌던 거 같습니다. ‘민영화가 아니다’ 하는 정부의 발표, 이제 대통령도 입을 열기 시작하고, 국무총리도 입을 열고, 현오석 부총리는 헛소리, 개소리를 남발하고, 서승환도 ‘민영화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때부터 우리 철도노조에 굉장히 유리한 시기가 된 거죠.

여론전을 봤을 때, 저들은 그 전에는 민영화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어요. 파업 전에는 ‘경쟁체제 도입’ 같은 표현을 썼거든요. 그런데 민영화 논란 안에 들어오면 우리하고 같이 토론이 이루어지잖아요. 그러면 그들도 이제 그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 상황이 되는 거죠. 우리가 2008년 광우병 촛불의 수혜자이기도 한데요, 촛불 이후에 국민들에게 어쨌든 ‘민영화는 나쁜 것’이라고 이미 규정이 돼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국토부나 정부를 그 프레임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때부터 민영화 논란이 폭발적으로 일어납니다.

대단했던 것은 어느 국민들이든 SNS 등을 통해서 저희보다 더 자세하게 수서발 KTX [분리]가 왜 민영화인지, 왜 민영화의 전 단계인지를 [스스로] 설명하는 것이었어요. 제 고모부가 저한테 카톡을 보내 주었는데, 조합원들도 그랬어요. 조합원들도 자신들의 지인들과 가족들이 열렬히 지지하면서, [민영화 반대] 내용을 조합원들한테 공급하게 돼요. 이렇게 논란이 생기니까 조합원들도 자기 논리를 갖기 시작합니다. 그 전에는 아무리 [제가] 현장 순회 때 [민영화에 대해] 설명해도 ‘야, 파업이나 해’ 이렇게 말했던 조합원들이 말이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논리를 갖고 자기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요. 그래야지만 파업이 오래 갈 수 있고, 정당성이 더해지거든요. 그런 시기가 16일 이후로는 죽 형성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결정적이었던 건 22일 지도부를 체포한다는 이유로 [경찰이] 민주노총을 침탈한 것이었어요. 그건 거의 박근혜 정부의 패착이었던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자의 심장을 공격하자, 민주노총 지도부가 철도 파업에 대해서 연대파업을 선언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또 [지도부 검거에 실패하는] 반전이 있어서 조합원들도 굉장히 통쾌해 했던 투쟁이었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죽죽 넘어갑니다. 5백 명 기관사 대체 인력을 채용 공고했던 것도, 가슴 아프지만, 조합원들에게는 크게 위협은 되지 않았던 거 같아요. 철도 노동의 특성상, 기술을 습득하고 교육받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대체 노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조합원들은 믿지 않았어요.

다만 첫 번째 위기가 이사회 때라면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것은 27일 저녁입니다. 일명 저희는 ‘문자 전쟁’이라고 부르는 날인데요, 그 날 정말 대단했어요. 27일 야밤에 정부가 기습적으로 면허를 발급합니다. 그 날 밤에 공사가 준비했던, 면허 발급에 맞춰 전체 조합원들에게 발송하는 문자가 있어요. 본부장, 사장, 상임이사, 처장들, 소장들, 전부 다 조합원들에게 문자를 밤 12시 넘어서까지 막 쏴요. 그렇게 [사측] 문자가 한 번 오면, 지부도 문자 한 번 보내고, [다시 사측이] 문자 한 번 보내면 [다시] 위원장 이름으로 문자 한 번 보내고 … 이걸 반복해요. 새벽 1시까지 조합원들에게 문자가 그렇게 왔던 거 같아요. 그런데 또 문자를 안 보내면 — 문자 발송도 다 돈이잖아요(청중 웃음) — 조합원들이 보내 달라고 하더라고요. 왜냐면 불안하니까. 자신은 복귀를 안 할 건데, 혹시나 누군가 [사측] 문자 받고 복귀할까 봐 ‘문자전’ 하자는 거였어요.

그 다음날인 28일 대규모 집회, 3차 상경 투쟁 잡혀 있었어요. 그때 확인하기로 약속했죠. 28일 아침 총회 때 조합원들이 한 분 한 분 들어오시는데요, 그때는 정말 눈물이 나올 거 같았어요. 한 분도 빠짐없이 [총회 장소에] 들어오셨거든요.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히 파업을 유지하는 것처럼 들어오시는데, 밤새도록 잠 못 자고 '복귀하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했던 그 몇몇 반장님들한테 어찌나 죄송한지, 정말 죄송해서 그 날 만나 뵈면서 더 팍 끌어안고, 되게 반가워했던 것 같습니다.

28일 이후로는, 제가 그때부터 수배가 떨어져서 사실은 은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어쨌든 [12월] 30일에 복귀하는 날 평가를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제가 앞에서 전면 파업을 둘러싼 논의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는데, 파업 기간 동안 문제가 있었던 것은 소통이 잘 안 된다는 거였어요. 자기 조합원들을 챙기고, 관리하고 조직하고, 아까 말했던 ‘추노꾼’은 [파업 이탈 조합원을] 잡으러 가고 … 이런 과정들 때문에, 사실은 현장간부들이 서로 잘 소통하지 못하고, 이 파업을 더 승리 전망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들을 더 채울 것인가 하는 논의를 잘 하지 못했어요. 현장간부들이 그런 준비가 안 된 채 파업에 들어가니까, 특히 필공파업 하면서 산개되어 있는 상황에서 간부들 사이 소통이 안 됐어요.

그리고 소통은 골간이라고 할 수 있는 위원장과도 잘 안 됐습니다. 철도노조의 특성상 파업에 돌입하면 거의 위원장이 전권을 갖게 되는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사실 복귀 과정에서 어떤 논의나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복귀 선언이 됐어요. 특히 청와대가 그것을 재가했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신기할 수도 있지만, 여야 간에 새누리당과의 합의 하에서 들어왔다는 것, 특히 그 주체가 김무성이라는 건 정말 기분 나쁘고 치욕스러운 상황이었죠.

어쨌든 30일에 복귀하게 되고, 조합원들은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더 싸울 수 있는 지부들 같은 경우엔 더욱이요. 물론 28일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28일 정도 되면 위원장이 연말연초 투쟁 전망을 제시했어야 해요. 근데 [그것이] 전혀 되지 못하고, ‘계속 버티자’는 거였거든요. 그렇게 되니까 조합원들도 해가 넘어간다는 것에 불안감이 대단히 컸던 것 같고, 그래서 많이 흔들리고, 일부가 복귀하고, 결국 위원장도 고뇌에 차서 복귀 선언을 했을 수는 있지만 … 어쨌든 아까 말씀 드린 평가 부분은 철도노조의 여전히 좀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발제]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좀 정리하면서 약평하자면, 23일 동안의 최장기 파업은 철도 노동자들도 스스로 놀란 파업입니다. 저는 지부를 구성하지 못한 문산차량지부의 쟁대위원장을 겸임했는데, 그 동지들이 보여 줬던 눈빛이나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보여 줬던 모습들 … 예컨대 관리자들이 [파업 조합원을] 잡으러 와요. 조합에 ‘추노꾼’ 있으면 관리자들도 ‘추노꾼’이 있습니다. [사측 관리자들이] 조합원들을 잡으러 오고, [조합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침탈해서 설득하러 올 때, 연락을 받고 제가 달려갔거든요. 그런데 제가 거의 도착할 무렵이면 이미 조합원들이 스스로 똘똘 뭉쳐서 관리자들을 다 쫓아내고 돌려보낸 과정이 있었어요.

또,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처음 느꼈던 파업이었습니다. 아주 작은 소도시, 영주나 동해 등에서도 고등학생들도 다 우리 유인물에 열광했어요. [유인물을 나눠주면] ‘나 철도 거 받았어!’ 이렇게 좋아하고, 전화 부스라든지 주유소라든지 어느 곳에 가도 작은 대자보가 유행처럼, 열병처럼 막 퍼져 있었던 것들을 확인하면서 정말 저희도 놀랐습니다.

특히 민주노총이 몇 년 동안 굉장히 답답했잖아요. [철도 파업이] 민주노총에도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또 어려운 곳에서 투쟁하는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철도 파업을 보면서 통쾌함이나 가능성, 희망을 느꼈다는 얘기를 들을 때, 또 시민사회단체들도 집권 1년차 가장 힘 센 대통령 맞서서 철도 노동자들이 싸워줌으로써 다시 반박근혜 전선으로 모일 수 있도록 해 준 의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건 — 사실 파업 전에도 많은 [국회]의원들이 철도노조 대의원대회나 뭐 이런 데 와서 많이 얘기했는데 — 이번 파업으로 철도 노동자들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리 정치가 아닌 직접 정치요. 직접 자기 요구들을 가지고 거리에서 현장에서 파업을 통해서 직접 정치의 장을 열었습니다.

2008년에는 시민들이 광우병 촛불을 들고 그 수혜로 우리가 철도 민영화를 막았습니다. 그때 저희가 총투표까지 했거든요, 그때는 [촛불이] 노동자 운동을 이끌어 간 형국이었다면, 이번 파업의 의미는 반대로, 우리 노동자들이 싸워서, 즉 계급적인 투쟁을 통해서 다시 여러 단위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촛불을 다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전처럼 노동자 운동이 주도할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매우 크게 봤습니다.

철도노조 같이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투쟁이 즉각적이고 사회·정치적 파장을 만든 것이죠. 노동자 계급 투쟁의 사회·정치적 주도 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계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론 이후에 필공 파업과 전면 파업에 대해서 동지들이 더 물어보신다면 더 많은 얘기들 토론할 수 있을 거 같고요.

이후 전망에 대해서 짧게 얘기하겠습니다. 전망과 관련해서는 지금 파업은 중단됐지만 [노동자들의] 기세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특히 [1월] 18일 집회 보면서 확인했습니다. 다만 이것이 계속 주구장창 가진 아닐 거라는 거죠.

1월 말부터 지부 간부들을 시작으로 2월에는 파업 참여 전 조합원에 대한 징계가 예고되고 있습니다. 물론 조합원들은 징계에서 감봉 정도는 다 이미 마음먹고 파업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거 가지고 쫄진 않을 거 같아요. 그러나 다만 이렇게 계속 당하는 것에 대해서나, 철도 민영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이후에 물류자회사, 차량자회사로 [정부와 사측이] 계속 공격하는 것을 방관한다면, 조합원들이 위축되고 투쟁에서 멀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투쟁 계획을 다시 수립하고, 이 문제를 대응하고 다시 재파업을 조직해야 된다는 게 저의 입장입니다.

특히 2월 25일 민주노총이 국민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는데, 그 파업에 정말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전국의 금속 사업장들이, 의료 민영화 앞두고 있는 동지들이 다 참가할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철도노조가 그 안에서 하루 파업이든 어떤 파업이든 정말 제구실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특히 강제전보 얘기가 나오고 있어요. [사측이] 그걸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그걸 통해서 철도노조를 분열시키고 약화시키고 조합원들이 ‘아, 노조 활동을 하면 이런 피해를 보는구나’ 하는 인식을 뼈저리게 심어 주고 싶은 거거든요. 아직 [우리의] 기세가 있어서 지금 당장 시행하지는 못 하지만 최근에 확인된 게, 2월에 조직 개편을 한다는 겁니다. 철도공사가 대표본부장 체계로 지역본부를 다 통합해서 운영한다고 합니다. 인사권을 가진 대표본부장이 그 지역 내에서는 전보나 전출, 인사권이 있으니까, [강제전보를] 할 수 있다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우려스럽죠. 서울과 수도권이 굉장히 넓거든요, 원주부터 인천 끝까지, 분당까지, 굉장히 넓은 지역을 아우르기 때문에 전보 날렸을 때 이게 비연고지 전보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미리 좀 선제적으로 투쟁해야 할 거 같습니다.

영주, 동해, 제천 등의 지역이 한 본부가 되면, 생활권 자체가 바뀌어 버려요. 지금 저희 철도노조 단협에 비연고지 전보 제한이나 인사이동을 할 때 노사 협의·합의를 거치는 것 등 제약이 있어요. 이런 조항들을 무력화시키려고 지금 공사가 준비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조합에서 빠르게 투쟁 계획이 나와야 합니다.

국회의 국토 소위 관련해서 한계를 이미 노정하고 있는 거 다 아실 거구요, 조합원들도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강제해서 어떤 근거나 실마리로 삼아야 하는 부분들도 있고요, 여전히 수서발 KTX 문제를 놓으면 안 됩니다. 이거 놓는 순간 투쟁이 힘들어지겠죠.

저는 없었지만, 파업 복귀 과정에서 서울차 조합원들이 보여 줬던 그 역동성은 정말 끝내주는 것이었다고 자부합니다. 복귀가 [12월] 30일에 있었지만, 1월 5~6일까지 조합원들이 총회를 통해서 정말 ‘위원장의 명령으로 복귀한다’는 그 문구 하나 받아 내기 위해서 단 한 명도 이탈 없이 싸웠습니다. 서울차량은 그렇게 복귀했습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자부심이고요, 위원장도 유일하게 위원장 지침으로 복귀한 데는 저희밖에 없다고 그랬어요. 자랑 같네요. (청중 웃음) 문산차량지부도 복귀 과정에서 잔업 거부를 한 유일한 지부였고요, 잔업 거부를 통해서 동료 직위해제를 하루 만에 다 풀어버리는 그런 역동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철도 노동자들이 잘 싸웠고 잘 돌아왔는데, 이제 정말로 시작된 2라운드 투쟁을 어떻게 맞아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저희들의 몫이기도 하고, 그동안 수배돼 있지만 새로운 직무대리가 함께 담당해야 할 그런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후에 회의 일정을 통해서 그렇게 가져갈 것 같습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동지들 23일 동안 그리고 그 전부터 보여 주셨던 의리, 연대 잊지 않고 현장에서 더 열심히 투쟁해서 철도 민영화를 반드시 막을 수 있도록 함께 전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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