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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이유

지난 3월 21일 현대그룹명예회장 정주영이 사망하자 기성 언론과 재계, 그리고 정치인들은 정주영의 사망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명하고 정주영을 일제히 찬양·고무하고 나섰다. 이들은 하나같이,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교육도 변변히 받지 못했던 정주영 '신화'에 대해 요란스레 떠들었다. 그러나 화려한 정주영의 '신화' 이면에는 일제와 군사 독재에 대한 아첨, 정경유착 부패, 식칼테러까지 동원한 노동자 탄압, 세습 족벌 경영으로 얼룩진 추악하고 탐욕스러운 자본가의 모습이 있다.

빈농의 아들에서 자본가로

정주영은 돈을 벌기 위해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 일제에 협력하고 아부했다. 그 때 그는 정치 권력에 빌붙어야 재산을 축적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똑똑히 깨달았다. 정주영이 5공 청문회에서 "기업은 시류에 순응해야 한다"고 했던 말은 그의 평생 신조를 나타낸 것이었다.

일제 말기 중일전쟁으로 쌀값이 폭등할 때 정주영은 민중의 굶주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점 매석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해방 이후 정주영은 일제가 남기고 간 2백여 평의 토지 재산을 사업 밑천으로 삼아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당시 일제로부터 조선인 자본가·관료 등에게 넘어간 막대한 액수의 재산은 일제가 조선인 민중으로부터 수탈한 것이었다.

정주영이 시초 자본 축적의 기회를 얻은 것은 그가 "남달리 부지런하기 때문"도 아니고, 그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 때문도 아니었다. 정주영은 친일에서 친미로 재빠르게 정치 권력에 빌붙어 일제가 한국 민중으로부터 수탈한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현대건설은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됐다. 정주영의 동생 정인영이 미군 통역을 자원한 것을 이용해 현대건설은 미군 공사를 독점 수주했다.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는데도 정주영은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미군기가 뜨고 내리는 활주로를 건설하고, 미군들의 숙소와 무기 저장고를 세워 부를 축적해 나갔다. 이런 전쟁통의 공사 덕택에 현대건설은 1955년 자본 규모 9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정경유착의 표본

정주영은 1960년 4·19 혁명이 성공하면서 부정축재자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자 자유당 5인조였던 부정축재자 처리 대상자로 지목돼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5·16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정주영을 구원해 주었다.

군사 정권은 그들의 경제 건설 의지를 실천할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운 파트너로 현대건설을 선정했다. 그 결과 현대건설의 1966년 매출액은 전년도에 비해 173.6퍼센트 성장했고, 자본 총액은 1961년에 비해 29배나 늘었다. 불황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1970년대 초반, 재벌 기업들이 사채시장에서 고리 단기 사채를 마구 끌어다 쓰는 바람에 재무구조가 악화되고 대기업 부도 사태가 일어나자 박정희는 1972년에 8월 3일에 기업과 사채권자와의 채권·채무 관계를 모두 동결시키는 8·3조치를 시행한다. 당시 위기에 처한 현대건설은 8·3조치에 힘입어 기사회생했다.

군사 정부는 현대를 비롯한 재벌 기업에게 세금을 감면해 주고 금융 특혜를 제공했다. 또,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막는 법으로 마음껏 노동자들을 쥐어짤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정주영의 신화"는 이런 군사 정부의 육성책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정주영은 1970년대 후반에 박정희 정권의 '그 동안의 노고'에 감사해 압구정동에 현대아파트를 지어 고위 관료, 국회의원, 신문사 간부 들에게 상납했다.

전두환 시대에 정주영은 '올림픽추진위원장'과 '일해재단' 이사장직을 역임하면서 기업 중 가장 많은 2백억 원을 뇌물로 갖다 바치는 것도 모자라 손수 정치 자금을 수금하러 다니기까지 했다.

정주영은 1993년에 검찰이 현대 비자금 문제로 그를 소환하자 그 다음 날 김포공항을 통해 몰래 일본행을 기도하기도 했다.

"왕회장"은 "신용·검소를 밑천 삼아 매출 1백조 원의 대그룹을 일군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는커녕 정권에 기생충처럼 빌붙어 정경유착을 활용해 재산을 축적한 부패한 인물이다.

경제 건설의 선구자?

정주영 영결식에서 유창준 전경련 명예회장은 "고인은 열일곱 나이에 산업 현장에 뛰어들어 초근목피로 전전하던 우리 민족을 선진국의 반열로 끌어올린 산업화의 산 증인"이라며 "세계인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수많은 신화를 만든 우리 경제의 거인"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신화의 진정한 주역은 피땀 흘리며 청춘을 다 바친 노동자들이었다. 준공 기간 27개월이라는 세계 조선소 사상 유례 없는 신기록을 세운 울산의 현대조선소 건설 과정은 '총칼 없는 전쟁'이었다. 1973년 한 해 동안에만 조선소에서는 1천8백94건의 산재 사고가 일어나 34명이 목숨을 잃었다. 1974년에는 7월까지만 1천5백66건의 사고로 25명이 숨졌다. 1974년에는 하루에 8건, 3시간에 한 건의 사고가 생긴 셈이다. 안전 시설이라고는 전혀 없는 조선소 건설 공사장에서 60여 명의 노동자가 죽어간 것이다.

당시 울산조선소의 건설 구호는 "더 빨리"였다. 한 노동자는 그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는 정말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저는 용접을 했는데 최고 40시간까지 잠 한숨 못 자고 일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일하다 보면 안전이고 뭐고 정신이 하나도 없지요.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이동하다 떨어져 죽은 사람도 수두룩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돈 몇 푼의 보상금으로 끝났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것도, 조선소와 자동차를 만든 것도 모두 노동자들이었다. 정주영은 노동자들 없이는 단 하나의 공장도, 단 하나의 부품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고, 부와 명예를 얻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주영은 노동자들에게서 그들이 만든 생산물뿐 아니라 생산의 주역이라는 명예까지도 강탈해 갔다.

노동자를 탄압하는 '부유한 노동자'

정주영은 1982년 "나는 (나를) 자본가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아직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정주영은 같은 한국말을 쓴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노동자들과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1990년대 초 미국의 〈포츈〉 지는 정주영의 총 재산 규모를 4조 7천450억 원으로 산정했다. 아무리 근면·성실하게 일해도, 노동자가 이런 돈을 축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주영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때문에 가능했다.

정주영은 노동자 탄압으로 악명이 높다. 정주영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노조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현대중공업 정문에 해병대 출신 경비원들을 대거 채용해,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두발을 단속하고 몸수색을 하기도 했다.

또, 1988년에는 폭력배를 동원해 현대건설 서정의 노조위원장을 납치·감금했고, 다음해 1989년에는 노조 파괴 청부업자 제임스 리를 고용해 현대중전기 노조 간부와 현대해고자협의회에 대한 식칼 테러를 자행했다. 또, 1990년 현대중공업 노동자 파업에는 무려 1만 5천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 파업을 파괴했다. 이 외에도 정주영의 반노동자적 폭력 행적은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다.

정주영의 반노동자적 본질은 현대자동차에 1998년 3천 명 이상의 초대규모 정리해고를 강행하려던 계획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정주영의 죽음을 애도해야 하나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탄압하는 데에 일생을 바쳐온 정주영의 죽음에 대해 '노동자 국가'를 자처하는 북한 정권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조문단을 파견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남 사이의 화해와 협력, 민족 대단결과 통일 애국사업에 기여한 정주영 선생의 사망에 즈음하여 현대그룹과 고인의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라는 내용의 조전을 보냈다.

〈대학생신문〉의 지적대로 한총련, 주한미군철수국민운동본부 등으로 구성된 남북공동선언 실천연대는 "정주영 씨의 생의 대부분은 분단과 착취에 기여한 삶이었지만 조국통일에 기여한 생의 마지막 순간을 우리는 더 많이 기억하게 될 것"라는 이중 잣대의 입장을 밝혔다. 범청학련 남측본부 부의장인 황선 씨는 직접 정주영의 빈소에 가서 조문을 하기도 했다.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는 정주영의 사망 소식에 3월 22일 서울현대그룹 계동 본사 앞에서 예정된 고려산업개발 부도항의집회를 긴급 취소했다. 그러나, 정주영이 죽기 직전에 "통일 애국사업"을 했다고 해서 그의 계급적 본질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본가였고, 오로지 이윤의 논리에 따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협력을 추진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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