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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의 비극

수단 서부의 다르푸르 지방에서 아이들 수천 명이 굶어죽고 있다. 그들의 고통은 수단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참극이다. 지난해에 다르푸르에서는 기아·질병·전쟁으로 수만 명이 죽었다.

대략 1백만 명이 집을 잃었다. 연말쯤이면 약 25만 명이 죽을지도 모른다.

이 참극을 보도한 신문과 TV는 “아랍인과 아프리카인의 오랜 경쟁”을 지적하거나 “인종 청소”를 비난하는 등 진부한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다르푸르 사태는 인종 충돌이 아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의 비상위원회 부위원장 메르세데스 타티가 최근 수단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그 곳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 충돌을 ‘인종 청소‘라는 말로 묘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체계적인 표적은 없다. 즉, 특정 인종집단을 표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단의 상황 자체가 별로 심각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다르’는 아랍어로 집이나 가정을 뜻한다. ‘다르푸르’는 푸르족의 집이라는 뜻이다. 프랑스만한 크기의 지역에 거주하는 6백만 명 가운데 4백만 명이 푸르족이다.

그러나 다르푸르에는 다른 집단들도 많다. 아프리카계 흑인들과 아랍계 주민들이 수백 년 동안 그 곳에서 함께 살았다. 그들은 모두 무슬림(이슬람신자)이다.

아프리카인과 아랍인은 다르푸르에서 융합됐다. 최근 〈옵서버〉는 “수백 년에 걸친 결혼 때문에 두 집단을 물리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고 보도했다.

토지·물·방목권을 둘러싼 우발적 충돌은 다르푸르의 역사 내내 계속됐다.

그러나 더 전형적인 양상은 거친 반(半)사막 기후와 하르툼의 중앙 정부에 맞서 주민들이 서로 협력해 왔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사람들은 서로 잘 지낼 수 있다. 그러나 빈곤이 악화하면 긴장과 경쟁이 심해진다.

자녀들이 굶어죽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이 형편이 더 나은 이웃 때문이라는 말에 속아넘어가기 쉽다.

그래서 충분한 국제 원조가 없는 상황에서 1980년대 중반 수단을 덮친 극심한 가뭄 때문에 분쟁이 발생했다. 각 집단은 생존을 위해 서로 상대방의 가축을 약탈했다.

1986년에 정부는 살육전을 더 확대했다. 다르푸르의 일부 집단을 무장시켜 수단 남부의 반란군에 맞서 싸우게 한 것이다.

정부의 목표는 “수단의 통일”을 유지하고 다르푸르의 값비싼 석유와 광물 자원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1989년쯤에는 다르푸르 자체에서 충돌이 주기적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지난 18개월 사이에 살육전은 새로운 수준에 이르렀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민병대와 정규군이 다르푸르 전역에서 약탈·강간·살인을 자행했다.

수단의 분열은 식민지 시절에 설계되고 조장됐다. 독립 후 역대 수단 정부와 정부를 지지한 기업인들은 그런 불화를 부추겼다.

이라크 전쟁 비용의 단 1퍼센트만 있어도 다르푸르 사람들의 생명을 모두 구할 수 있고, 아프리카 전역의 수많은 사람들도 구할 수 있다.

이라크에 폭탄을 퍼붓지 않고 수단에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할 수는 없을까?

분쟁의 뿌리 ― 석유와 탐욕

다르푸르 참극의 근원은 영국의 식민 통치, 석유, 그리고 미국의 흉악한 개입이다. 세계 열강에게 다르푸르 사태는 하찮은 문제일 뿐이다. 다르푸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부시는 수단의 다른 분쟁이 끝나기만 바랄 뿐이다.

그것은 북부에 기반이 있는 수단 정부와 남부의 반군 사이의 전쟁이다. 남북 분쟁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됐다. 지난 15년 동안 2백만 명이 죽었고, 4백만 명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곧 그렇게 될 듯하다) 미국은 세 가지 주요 성과를 확보하고 싶어한다. 미국과 유럽의 석유 기업들이 수단의 석유를 더 많이 차지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수단에는 20억 배럴의 석유가 있고, 현재도 하루에 25만 배럴을 생산한다.

미국은 홍해 건너 사우디아라비아 반대편에 친미 정부도 세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수단과 국경을 마주한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케냐·우간다 등 일련의 친미 정권들의 블록이 형성될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이자 특히 중요한 점으로, 미국은 세계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의 정부들을 자신이 조종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 할 것이다. 수단이 이라크의 재앙을 기억에서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시 일당은 수단이 조금이나마 보상해 주기를 바란다.

미국은 다르푸르 사태가 남북 간의 더 광범한 협상에 걸림돌이 될까 봐 침묵을 지켜 왔다. 부시는 현재 수단 정부와 우호 관계 수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수단이 여전히 미국이 지정한 “테러 지원국” 목록에 올라 있는 현실과 충돌한다.

부시는 수단과 관련해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전 대통령 빌 클린턴의 전례를 따르고 있다. 클린턴도 수단을 “테러” 국가라고 비난하면서도 수단의 석유 개발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었다.

1996년 4월에 클린턴은 테러단속법(Anti-Terrorism Act)에 서명했다. 이 법은 미국 기업과 테러 지원국 사이의 금융 거래를 모두 금지했다. 그 목록에는 수단도 올라 있었다.

4개월 뒤 클린턴 행정부는 조용히 그 목록에서 수단을 제외했다. 그래서 미국의 한 석유기업이 수단에서 대규모 탐사 계약을 위한 협상에 나설 수 있었다.

1998년에 미국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수단을 테러 국가라고 비난했다. 그 해 8월 7일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이 대규모 폭탄 공격을 받았었다.

클린턴은 대사관 폭탄 공격의 범인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과 수단에 크루즈 미사일 79기를 발사했다. 하르툼의 엘-시파 제약 공장도 그 표적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그 공장에서 VX 신경가스를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은 훨씬 더 기괴하게 발전해, 이라크 전쟁에 이용된 거짓말들의 예고편을 보여 주는 듯했다.

엘-시파 공장에는 폐쇄된 출입구는 물론이고, 제대로 된 보안 장치, 심지어 창문 잠금 장치도 없었음이 드러났다.

미국 관리들은 이것이 공장의 진짜 목적을 은폐하기 위한 사악한 속임수의 증거라고 대꾸했다. 미국의 엄청난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몇 시간 만에 밝혀졌다.

엘-시파는 수단의 필수 의약품과 주요 동물 백신 생산 공장이었다. 그 공장은 수단 전체 의약품 생산의 50퍼센트를 맡았다. 미국의 경제제재 때문에 수단이 해외에서 의약품을 수입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 공장은 아주 중요했다.

공장이 파괴되자 어린이 수천 명이 말라리아와 결핵, 다른 치료 가능 질병으로 죽어갔다. 폭격을 자행한 지 1년 만에 미국은 결국 그 공장이 테러와 무관했음을 인정했다.

석유와 총

석유회사 자금이 수단의 살육전을 부추기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 회사들은 수단의 억압적 정부와 긴밀히 협력해 왔다.

북남 전쟁 기간에 석유 다국적기업들은 수단 정부를 직접 지원했다. 자기들 자신이 건설한 상용 활주로를 군대와 전투기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또, 석유 자금 덕분에 수단 정부는 가장 현대적인 살인 기술들을 도입할 수 있었다.

지난 5년 동안 이런 일련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했던 회사는 그레이터 나일 오일 컨소시엄(Greater Nile Oil Consortium)이었다. 그 컨소시엄의 최대 주주는 영국계 석유기업 BP 아모코(BP Amoco)이다.

1999년 8월 남부의 유전지대와 포트수단―수단의 유일한 항구―을 연결하는 약 2천6백 킬로미터의 송유관이 개통됐다.

석유가 송유관을 흐르기 시작하자마자 미국은 남부 반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지금 부시는 평화 협정을 추진해 그 노다지에서 이득을 챙기려 하고 있다.

간추린 수단 역사

1820년 이집트, 수단 침략. 1876년경 이집트 군대가 수단의 전 지역 장악.

1879년 영국·프랑스, 공동으로 이집트 지배. 수단의 법률을 지배하며 세금 수탈.

1881년 무함마드 아흐메드가 이끄는 반(反)외세 봉기 발생. 그를 분쇄하려던 영국군이 오히려 패퇴.

1885년 무함마드 아흐메드 군대, 하르툼 점령. 영국군 고든 장군을 처형하고 최초의 독립 정부 수립.

1898년 옴두르만 전투에서 키치너 장군 휘하의 영국군이 수단군 학살. 하르툼 남쪽 5백 마일 지점의 파쇼다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 충돌. 이 때문에 유럽은 전쟁 일보직전까지 가다. 결국 프랑스가 물러서고, 영국은 아프리카의 다른 식민지를 포기하는 대가로 이집트와 수단 지배권을 보장받다.

1914년 영국, 이집트·수단 직접 통치. 총독부는 수단을 남북으로 분리. 당시 한 총독은 이렇게 말했다. “남부 지방은 현대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다.”

1920년대 “폐쇄” 정책으로 수단 북부인들의 남부 여행이나 취업이 금지되다.

1930년 수단 남부인들이 북부 무슬림과 전혀 다른 민족이라고 선포되다. 수단 남부를 영국령 동아프리카로 통합하기 위한 술책.

1946∼47년 영국, 수단 남부인들과 아무런 의논 없이 남부를 북부의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에게 넘겨주다. 새 입법부의 남부 대표자들은 영국이 지명.

1956년 수단 독립. 그러나 영국이 조장한 분열 때문에 독립 직후 내전 발발.

1980∼83년 자파르 니메이리 정부의 억압에 저항하는 투쟁 고양. 니메이리는 지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샤리아 법[이슬람의 율법]을 공포했었다.

1986년 IMF, 수단의 “파산” 선언하며 모든 융자 회수. 50만 명이 기아로 사망. 3년 뒤 군부가 권력 장악.

1991년 수단 정부, 미국의 제1차 이라크 전쟁에 반대. 그 보복으로 미국은 당시 수단에 기근이 닥쳤는데도 포트수단 행(行) 곡물 선적을 중단시킴.

1992년 IMF가 교사한 [재정]삭감 정책과 수단 정부에 항의해 도시에서 파업과 폭동이 계속되다.

1993년 우마르 알-바시르, 대통령 취임 선언(여전히 대통령직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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