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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맑스를 읽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계급투쟁을 삭제하고 싶어 하는 책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마르크스의 《자본》에 관한 책들도 관심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한 독일인 개혁주의자가 마르크스의 저작을 발췌해서 해설한 《맑스를 읽다》도 출간됐다.

《맑스를 읽다》, 로베르트 쿠르츠 엮음, 강신준·김정로 옮김, 창비, 535페이지, 25,000원

엮은이 로베르트 쿠르츠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준자율주의 냄새가 물씬 나는 잡지 《엑시트!》의 편집인을 지냈다.(그는 2012년 의료 수술 중에 사망했다.)

쿠르츠는 동유럽 스탈린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세계 경제가 유례 없는 파국의 가능성마저 보여 주고 있는 상황에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부르주아적 애국주의”에 빠져 자본주의 체제의 수호자로 전락한 것에 비판적이다. 또, 옛 소련의 지배 관료가 “산업화를 위한 개발독재체제”를 마르크스주의로 포장한 것에도 비판적이다.

이처럼 쿠르츠는 서구 사회민주주의와 옛 동구권 스탈린주의 관료가 ‘근대화’, 즉 자본주의 경제 성장에 기여한 것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와는 다른 반자본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곡

그런데 쿠르츠는 마르크스주의가 왜곡된 원인을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운동이 만났다는 데서 찾는다. 그는 노동운동의 핵심 동력이 “자본주의 내에서 자신에 대한 인정”이고 “계급투쟁은 오히려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운동은 결국 자본주의에 포섭돼 체제의 발전에 기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제안하는 대안은 ‘계급투쟁-노동운동과 단절한 마르크스주의’이다. 그는 계급투쟁 중심으로 “알려진” 마르크스가 아니라 계급투쟁을 벗어난 “숨겨진” 마르크스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그는 《맑스를 읽다》를 8장으로 구성해 각 장의 서두에 그가 제시하는 개념을 설명하고 마르크스의 원전에서 이를 뒷받침해 준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발췌해서 엮었다.

그는 1장에서 자본 개념을 재정의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이제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급 착취를 중심으로 자본을 정의했던 것에 비판적이다. 대신 자본을 화폐를 목적으로 하는 “자동화된 주체”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가 “화폐의 맹목적 운동에 조정되는 개인”이라고 주장하고 싶어서인 듯하다.

그래서 쿠르츠는 자본가가 이윤을 향유할 수 없고 자본이라는 축적 과정에 종속되는 수동적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노동자는 서로 경쟁해야 하는 존재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이런 자본 개념은 일면적인 노동 개념으로 이어진다. 쿠르츠는 노동과 자본이 “응고된 화폐형태 속에서 포괄되는 공통의 관련 체계”에 속한다고 말한다. 즉, 노동자와 자본가는 화폐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의 운동 속에서 이해관계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계급을 해체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자본가도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생산 과정에서 “인간적 에너지”를 창출해 가치를 만드는 데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또, “유연화된 임노동자는 오늘날 3차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자기 노동력의 고용주로 변화했다”며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것이다. 또,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자본가들이 적은 노동으로 더 많은 것을 생산하기 때문에 노동과 자본이라는 관계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주장한다. 지식 사회에서 노동 주체는 “영구히 사라져” 가고 있고, “소외된 노동은 스스로 와해”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쿠르츠가 제시한 대안은 “계급운동이 아니라, ‘연합한 개인들’이 스스로 의식적으로 구성해 내는 운동”이다. 그는 “의식적 자기 관리”를 통해 각성한 개인들이 “시장과 국가를 넘어 … 사회를 자주적으로 조직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 사회 변화의 방법을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결국 쿠르츠의 주장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지만 모종의 자율주의에 가깝다. 서구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배신과 옛 소련 사회의 변질을 보며 자율주의와 아나키즘이 인기를 얻었는데 쿠르츠도 비슷한 경로를 밟은 듯 보인다.

노동-자본 간 갈등

물론 필요하다면 마르크스주의를 현실에 비춰 수정하려는 노력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쿠르츠의 주장은 개념적으로 부적절할 뿐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한다.

우선, 자본 개념과 관련해서, 마르크스도 자본이 “자기 증식하는 가치”라고 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기 증식’이 착취를 통해 나온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점은 결코 쿠르츠처럼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화폐라는 형식적 동질성이 아니라 착취를 통해 추출되는 잉여가치라는 실질적 내용을 봐야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자본》 1권의 절반 이상이 자본가들이 어떻게 잉여가치를 노동자들에게서 더 많이 추출하려고 노력하는가 하는 점을 분석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쿠르츠가 발췌한 텍스트들에서는 이런 내용이 빠져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쿠르츠의 주장과는 달리, 더 많은 잉여가치를 가져가려는 자본가에 맞서 노동자들의 저항도 끊이지 않는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심화되는 지배계급의 공격에 맞서 수세적이나마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 저항이 벌어지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거나 노동계급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여러 통계를 보면 전 세계 노동계급 규모는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 어느 때보다 커졌다.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이 아무리 증대한다 하더라도 자본에게 노동력은 필수적이고 노동계급의 잠재력은 자본의 생산력만큼 커진다.

물론 노동운동이 아직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것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는 노동운동이 본질적으로 자본가들과 타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사기를 꺾어 혁명적인 기회를 놓치게 만든 잘못된 정치 때문이다. 서구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는 노동운동을 패배로 이끌며 자본주의를 변혁할 기회를 좌절시키는 구실을 했다.

1918~23년 독일 혁명 과정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계급투쟁을 가라앉히고 체제의 위기를 수습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며 말이다. 이런 사민당 지도부의 태도는 노동운동 자체의 한계가 아니라 노동운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개혁주의 정치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 준다.

1928년 즈음, 스탈린이 소련에서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피의 반혁명이 필요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시기의 혁명가 거의 전부가 1936~37년 숙청됐다. 노동자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국제 혁명을 도모하자고 주장한 트로츠키는 1940년 암살됐고, 일국 사회주의를 주장한 스탈린주의 국가 관료층이 권력을 다졌다.

이런 패배는 노동운동의 본질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와 스탈린주의라는 정치 문제에서 비롯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잘못된 정치에 맞서 노동운동 속에서 계급투쟁을 발전시킬 혁명적 정치를 구현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반자본주의적 좌파가 노동운동과 거리를 두는 것은 오히려 개혁주의를 강화시켜 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쿠르츠는 당연히 자기 자신의 관점에 따라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발췌해서 엮었다. 그래서 그의 선집에서는 계급투쟁을 강조한 마르크스의 텍스트들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그의 책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듯하다. 노동계급이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를 변혁한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핵심 주장이기 때문에 필자의 선택적 발췌에도 불구하고 이를 충분히 가릴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국내에서 마르크스를 개혁주의적으로 왜곡하여 소개했고 이 책의 번역자이기도 한 강신준 교수는 쿠르츠 자신의 저작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선집으로 구성한 점은 아쉽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문제는 쿠르츠가 내놓는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 자신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충돌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계승해야 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공산당 선언》이나 《자본》 같은 마르크스의 원전을 읽어 보길 권한다. 마르크스에 대한 이런저런 해설서들이 원전보다도 더 쉬운 것도 아닐 뿐 아니라 마르크스의 취지를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쿠르츠가 발췌하고 강신준·김정로가 번역한 《맑스를 읽다》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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