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임원직선제와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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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임원직선제가 12월 3~9일 실시된다. 이를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10월 2일 선거공고가 되고, 11월 3일 후보 등록이 시작될 예정이다.
민주노총 임원직선제는 민주노총의 혁신을 위한 핵심적 방안으로 제기돼 왔다. 1998년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직선제 공약이 처음 제기됐고, 2000년대 중반 민주노총 위기가 대두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직선제를 통해 민주노총을 쇄신할 수 있기를 바랐다. 논란 끝에 2007년 임원직선제가 결정됐으나 실시 유예를 거듭하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토론의 장
노동자연대는 조합원들이 노동조합 임원들을 선출하고 소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적 입장에서 이를 지지해 왔다.
그러나 직선제 자체가 민주노총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할 것이다.
직선제를 핵심적 혁신 방안으로 여겨 온 사람들은 ‘민주노총 지도력이 조합원들로부터 불신받고 조합원이 민주노총에 냉소적인 상황’에서 ‘직선제를 통해 조합원을 주체로’ 나서게 하고 ‘조직을 바닥에서부터 재조직’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직선제 선거 과정은 조합원들이 민주노총의 방향과 과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토론하는 장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좌파 활동가들은 이를 활용해 조합원들의 토론과 활동을 활성화하도록 애써야 한다.
그러나 상층과 현장의 분리나, 지도력이 조합원들로부터 불신받는 문제는 노동조합 관료의 (불가피한) 존재에서 비롯한 것으로, 선출 방식의 변화로 해결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노동조합의 본성을 인식해야 한다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때때로 투쟁을 조직하지만 흔히 조합원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투쟁을 중단하거나 약속했던 파업을 철회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지도자들이 조합원들의 이익을 일관되게 옹호하지 않고 비민주적으로 투쟁을 철회하는 일이 거듭될 때 이를 극복할 대안이 없으면 조합원들 사이에 냉소와 무관심이 퍼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특정 정파 소속의 지도자들만이 저질러 온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총이 수년 동안 한 정파에 의해 휘둘려’ 온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진단하는 입장에서는 직선제를 그 정파의 연속 집행을 막을 방법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동요와 투쟁 회피, 또는 약속했던 총파업을 철회한 전력은 상대적으로 좌파적인 지도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산별·연맹이나 단위노조의 경험을 보아도 아무리 직선으로 선출된 지도부라도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철도노조는 10여 년 전부터 직선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지난해 말에 보았듯이 중앙집행부가 일방으로 파업을 종료할 수 있고, 8·18 단협 개악 합의 때 보았듯이 노사합의 체결 전에 조합원들의 의사를 묻지 않는다.
혹자는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는 직선제 쟁취 투쟁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직선제가 일반화된 민주노조 진영이 급속한 관료화를 경험해 왔다는 엄연한 사실을 봐야 한다. 이는 노동조합 민주주의가 단지 직선제로 환원될 수 없으며, 직선으로 선출된 지도자라도 현장 조합원들의 통제를 받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노동조합 민주주의와 현장 조합원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지도자들의 관료적 권한을 제약하고 지도자들에 대한 현장 노동자들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불가피하지 않은 타협과 양보를 독단으로 하거나 파업을 일방으로 철회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또, 현장조합원들의 의사가 더 잘 대변되도록 민주노총 대의원들을 모두 직선으로 선출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조합 민주주의의 진정한 힘은 무엇보다 현장 노동자들 자신의 활동이 활성화되는 것에서 나온다. 이것이야말로 지도부를 통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아무리 좋은 규약도 조합원들의 자력 투쟁 노력이 약하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현장 조합원들의 힘을 강화해야만 지도자들이 투쟁하도록 압박을 가할 수 있고, 지도자들이 투쟁을 제대로 이끌지 않을 때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좌파적 지도부 세우기 전술의 의미
이렇게 원리·원칙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번 직선제 선거의 의미를 축소하는 결론으로 곧바로 이어져서는 결코 안 된다. 원리·원칙에서 출발한 것은 좌파 활동가들과 투사들이 이번 직선제 선거를 어떤 자세로 접근해야 하는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좌파 활동가들과 투사들은 이번 직선제 선거를 활용해 현장 조합원들의 자주적 활동을 고무하는 것에 주안점을 둬야 한다.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서 민주노총의 과제를 둘러싸고 토론을 활성화하고,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 소식을 교류하며 연대를 확대하고, 기층 투사들의 네트워크를 발전시키도록 애써야 한다.
만약 선진 노동자들을 대변할 괜찮은 대안적 후보가 나와 기대를 불러일으킨다면, 이런 활동에 유리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면 노동조합 내 세력관계를 좀더 왼쪽으로 기울게 만들고 현장 조합원들의 자신감을 북돋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좌파 활동가들이 이런 후보를 내어 이번 선거에 공동 대응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지금 현장 분위기는 일각에서 말하듯 그렇게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전교조 규약시정명령 수용 찬반 투표 결과나 철도노조 8·18 합의 인준투표 부결은 현 시기 현장 노동자 정서의 특징을 보여 준다. 오랫동안 침체됐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분위기도 살아나고 있다.
지금 현장 노동자들은 스스로 투쟁에 나설 만큼 자신감이 높은 수준은 아니더라도 잘 싸워 줄 지도부를 원하며, 그런 지도부가 실질적이고 전면적인 투쟁을 선언하면 이에 응해 투쟁에 나설 수 있다.
이런 투쟁 속에서 현장 노동자들은 자신감을 회복하고, 지도부가 계획한 것보다 투쟁을 더 발전시키고, 조직을 성장시킬 기회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현장 조합원의 자주적 활동성을 고양시키는 데 주안점을 둔다는 점이 단순히 좌파 집행부 세우기에 의의를 두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다.
좌파 활동가들과 투사들은 무엇보다, 민주노총 차기 지도부가 박근혜 정부의 공격에 맞서 실질적인 저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즉, 투쟁하는 민주노총이 돼야 한다. 그동안 많은 지도부가 투쟁을 말했지만, 중요한 것은 언행일치다.
지금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정국을 끝내고 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계급에게 전가하기 위한 공세를 다시 펴려 한다. 경제 위기 시기에 단호하고 실질적인 저항을 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는커녕 지키기조차 할 수 없다.
민주노총 현 집행부는 이 점에서 부족함을 드러냈다. 지난해 말 철도파업 당시 박근혜 정부가 양보 불가 입장으로 민주노총 본부를 침탈하는 강수를 뒀을 때, 현 지도부는 민주노총 산하 노조들에 즉각적 파업 돌입을 명령하기를 주저하고 파업을 두 달 반 뒤로 미뤘다. 그럼으로써 좋은 반격 기회를 날려 버렸다. 세월호 정국에서도 민주노총 지도부는 박근혜 정부에 실질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산하 노조들의 힘을 사용하지 못했다.
정치의 중요성
물론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고 해서 투쟁을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의 전략을 이해하고 제대로 맞서야 하는데, 여기서 핵심은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이다.
박근혜는 마거릿 대처와 달리, 노동계급의 주요 부문들을 하나씩 차례로 공격할 만한 여유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래서 다양한 부문에 대한 파상공세를 펴고 있다. 대신 (대처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이간질로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각개격파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공무원연금 개악이나 공공부문 단협 개악(사내복지 축소) 등 공공부문을 공격할 때 ‘철밥통’ 논리를 내세워 이들을 고립시킨다. 통상임금 ‘정상화’는 대기업 정규직에게만 득이 될 뿐이라고 이간질한다. 그러나 공무원연금 개악은 국민연금 개악의 지렛대가 되고, 공공부문 ‘방만’ 비난은 민간 기업의 노동조건 악화 압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통상임금과 임금체계 개편 문제는 전체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하락 압박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민주노총은 박근혜 정부의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 시도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또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단결된 투쟁으로 맞서야 한다. 잘 조직된 부위의 자신감을 분쇄하려는 박근혜 정부의 전략에 맞서 연대하고, 또한 잘 조직된 노동자들이 그 힘을 비정규·미조직 노동자들의 요구를 위해서도 사용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민주노총 조합원들뿐 아니라 비정규·미조직·이주·청년 노동자들과 차별받는 사회집단들의 처지를 대변하고 개선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세월호 문제나 국정원 대선 개입 같은 정부의 부패에 맞서는 정치적 민주주의 투쟁도 민주노총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2008년 촛불 운동 때 노동조합이 거리의 운동과 만나지 못했던 것에 비해 올해 세월호 투쟁에는 (초기에) 노동자들의 집단적 참여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이런 운동에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파업 같은 노동자 고유의 경제적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좌파 활동가들은 직선제 선거를 활용해 민주노총의 방향과 노동운동의 과제에 관한 주장을 활발히 펴면서, 여러 작업장과 지역의 투사들을 폭넓게 접촉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해 미래의 투쟁을 위한 디딤돌을 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