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투쟁을 돌아보며 주의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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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노동자연대의 노조원 회원 토론용으로 최일붕 운영위원이 10월 11일 했던 발제를 녹취해 편집한 것이다.
올해 벽두는 철도 파업의 여파 속에서 시작됐다. 이 파업은 민영화 저지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데 철도 파업이 철도노조 관료와 여타 민주노총 관료에 의해 일방으로 종료됐을 때 파업 노동자들의 반응이 시사적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조금은 아쉬워했지만, 결코 패배감과 사기 저하 속에서 업무에 복귀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노동자들은 마치 개선장군들이나 된 양 복귀했다.
아마도 철도 노동자들은 ‘아쉬워도 이 정도면 됐다’ 하고 생각했던 듯하다. 과거에 민영화를 막는 데 필요했던 저항 수위보다 높은 수위의 저항을 보여 줬으므로, 정부가 민영화를 함부로 밀어붙이지 못할 것이라고 봤던 것 같다. 내심 약간은 불안해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의 일말의 불안감이 적중했다. 박근혜는 김대중이나 노무현과는 물론 이명박과도 달랐다. 바로 이 점이 국내 정치 상황 인식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우리는 박근혜가 특히 사악하다는 점을 그가 집권당 대선 후보로 등장했을 때부터 주목했다. 그저 그가 박정희의 정치적 계승자를 자임한다는 개인적인 특성 때문에 그랬던 게 아니다. 그런 특성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근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지배 계급은 세계 경제 불황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장기화하면서 이 장기 불황의 고통을 일방으로 노동자 계급에 전가하고자 단호히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강화하기로 했고, 그 결과가 박근혜의 등장이었던 것이다.
경제 위기
수출의존도가 큰 한국 경제는 세계 시장의 변동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한국 수출의 지역별 비중은 중국이 26.1퍼센트로 가장 높고, 미국 11.1퍼센트, 유럽연합 8.7퍼센트, 일본 6.2퍼센트였다. 그런데 중국 경제의 불안정과 위기 가능성 때문에 한국 경제는 대(對)중국 수출이 감소해 왔다. 게다가 최근엔 유럽이 2009년 이래 세 번째 경기후퇴 위기에 직면해 있어서 유럽발 세계경제 위기설이 또다시 제기되고 있다. 유로존의 성장 엔진인 독일 경제도 경기후퇴를 겪고 있다. 유럽연합의 경제성장률이 1퍼센트포인트 떨어지면 그해 한국의 대(對)유럽연합 수출은 4퍼센트 줄어든다고 한다.
바로 이런 경제 위기 지속 전망 때문에 박근혜가 전임자들보다 더 억압적일 뿐 아니라 더 착취적인 지배자로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지난해 말 철도 노동자들에게 분명하지 않았던 듯하다.
이제 더 많은 철도 노동자들이 박근혜 정부가 더한층 사악하고 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됐을 것이다. 철도 노동자들뿐 아니라 이제는 다른 수많은 노동자들도 이를 알게 됐을 것이다.
이 학습 과정은 위축되고 방어적인 과정이다. 격투기 경기에 비유하자면, 내가 나름 잘 방어하고 카운터펀치도 날려 상대방이 타격을 받은 게 분명한데도 상대방이 고삐를 늦추지 않고 집요하게 파상공세를 펴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때는 오히려 내가 다소 위축되고 조심스러워지는 경향이 있게 된다.
특히 세월호 참사의 진실과 책임 규명을 요구하는 운동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분노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박근혜의 사악함, 표독스러움, 뻔뻔함에 질렸을 것이다. 이 운동도 핵심 요구 사항(수사권과 기소권이 있는 특별법 제정)을 쟁취하지 못하는 바람에 앞으로 우여곡절을 더 많이 겪게 될 것 같다. 부분적으로 이는 이 운동 초기에 조직 노동자들이 비교적 의욕적으로 참가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여름부터는 그들이 거의 침잠한 상황에서 비롯했다. 물론 항의 운동 초기에도 노동자들은 생산수단 가동을 멈출 계급 고유의 경제적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심화되기 시작한 박근혜의 정치 위기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착취 증대 문제든 정치적 억압 강화 문제든 박근혜 정부는 공격적이었고, 노동자 운동은 방어적이었다. 게다가 그 방어가 그다지 성공적이지도 못했다. 특히, 노동자 대중이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소심함에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들을 대신해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투쟁적으로 싸워 주기를 바라는 대리주의가 통례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선언한 파업들은 모두 단시간의 형식적인 경고성 파업에 그쳤다.
하지만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점이 있다. 박근혜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박근혜는 서슬 퍼렇게 이석기 국회의원과 진보당을 물리적·이데올로기적으로 마녀사냥하며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에 압도돼 박근혜의 정치적 탄압을 막아 내지 못하면 노동운동이 전진하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봤다. 그러나 이는 일면적이고 기계적이며 결정론적인 인식일 뿐이다. 철도 파업으로 노동자들은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교사와 건설 노동자, 보건의료 노동자,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등등 다른 노동자들도 저항을 해, 박근혜 정부와 자본가들에게도 적잖은 타격을 입혔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과 일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심지어 공세를 취해 소중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노동자 계급의 이런 저항의 결과 박근혜의 지지율은 갤럽에 따르면 40퍼센트대로 떨어졌다. 1년새 20퍼센트 포인트가 빠져나간 것이다.
이처럼 지배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서로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 피해를 보는 지루한 전투들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선 중간계급의 일부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흐름이 성장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견해와 바람을 대변한다며 계급을 가로질러 국민적 또는 민중적으로 단결하자고 제안하는 포퓰리즘 경향이다.
물론 포퓰리즘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브라질, 한국 등 후발 산업국가의 노동운동 전반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좌파적 민족주의 운동의 핵심부를 이루는 자민통 계열이 대표적이지만, 정의당도 포퓰리스트들이고, 노동당 우파도 그렇다. 심지어 새정치연합도 포퓰리즘 경향을 얼마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아주 최근의 맥락 속에서는, 금융 수탈 체제에 맞서 영세 소농과 금융 피해자까지 포함한 좌파 포퓰리즘적 저항을 제안하는 금민·이갑용·허영구 씨의 사회당-좌파노동자회도 들 수 있다.
포퓰리즘
또한 대졸 실업자 청년들 사이에서 성장하는 좌파적 포퓰리즘도 있다. 대졸 실업자 청년들은 국제적으로도 2008년 경제 공황 이후 일어난 주요한 거리 항의 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구실을 해 왔다. 튀니지와 이집트, 스페인과 그리스의 광장, 그리고 미국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모두 대졸 실업자 청년들이 핵심적이고 가장 유력한 성분이었다. 이 운동들은 그 안에서 사회주의자들이 효과적인 구실을 하느냐 여부에 따라 노동자 운동을 긍정적으로 보거나 부정적으로 보거나 그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1980년대 남아공 노동운동의 경험에 비춰 보면, 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은 포퓰리스트들에 대한 ‘노동자주의자들’의 비판에 공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면서 ‘노동자주의자들’의 정치적·이론적 약점에 대한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남아공에는 그런 능력이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적었기에 포퓰리스트들인 남아공공산당(SACP)과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금속노조 사무처장 모세 마예키소 같은 최상의 노동자주의자들을 설득해 자기네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노동조합 운동 안에서도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한국의 맥락 속에서 노동자주의자들인 ‘현장파’는 먼저 노조 관료 문제와 그 대안 문제에 관해 적절한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그동안 그들은 자기들이 노동조합 집행권을 행사하게 되면 더 투쟁적인 노조 운동을 보여 줄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결과는 두루 알듯이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노동자 계급 자력해방 원칙의 노동조합적 적용으로서 현장조합원 운동에 진지해야 한다. 즉, 노조 지도자들이 투쟁할 땐 기꺼이 그들을 지지하고, 그들이 현장조합원 대중의 바람을 거슬러 투쟁을 중단하면 그들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싸우기 위해 조직해야 한다.
또한 현장파는 대개 NGO들과 자민통 계열이 주도하는 정치 운동에 동참하면서, 그들보다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더 효과적인 세력임을 대중에게 입증해야 한다. 즉, 주요 정치 운동에 공동전선 전술을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점에서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에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와 노동자전선이 적극 동참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
다만, 박근혜 퇴진 또는 정치 파업 구호도 좋지만, 그보다는 노동자들이 경제적 파업이라는 무기를 사용해 이윤 시스템에 타격을 주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점도 고려해 봤으면 한다.
더 일반적으로도 그 동지들이 개혁주의 일반에 대한 적절한 인식과 효과적인 대처법인 공동전선 전술들을 고려해 봤으면 한다.
우리 노동자연대는 이런 사회주의적 전략·전술을 다른 좌파 노동단체들과 공유해 보고자 그들과 한상균-이영주-최종진 선거 운동에 함께하려 한다.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선거 운동을 돕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로부터 배울 것도 많다. 특히 노동조합 문제들에 관한 한 배울 게 더욱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호 학습 과정이 우리가 바라는 바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정치 구현하기
마르크스주의자는 조직 노동자 운동에 뿌리 내리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참을성 있게 해야 한다. 그동안 노동자 계급이 바라는 바 제구실을 못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결정론적 사고일 뿐이다.
노동운동에 뿌리 내리려 애쓰되 정치적인 방식으로 그래야 한다. 즉, 그저 ‘투쟁, 투쟁’, ‘운동, 운동’ 하는 것으로는 완전히 불충분하고 다음의 일들이 필요하다:
● 정치적 견해를 가져야 하고 그 견해를 밝히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즉, 사회의 변화와 나라 전체의 미래에 관심과 전망을 표명해야 한다.
특히 부패에 대한 항의는 정의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목소리이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여름과 특히 올해 여름을 뜨겁게 달군 항의 운동이 있었다. 국가 기관 대선 개입에 대한 항의와 세월호 구조 실패 또는 외면에 대한 항의가 바로 그것이다. 이 나라 우익이 역사적으로 워낙 부패해서, 앞으로 남은 박근혜 재임 기간에도 부패와 비리는 거듭 드러날 것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 운동 못지않거나 그보다 더 큰 항의 운동을 촉발할 수 있을 것이다.
● 노동자 계급 전체(일부분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힘과 권력을 강화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대기업(사기업이든 공기업이든) 정규직 노동자는 안 된다는 둥 이주민과 이주 노동자가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둥 하는 주장과 논쟁해야 한다. 이런 주장들은 노동자 계급의 상이한 부분들을 이간시켜 각개격파하려는 사용자들과 정부의 책략에 노동자들 전체를 무력하게 만들기 쉽다.
● 자본주의 국가(들) 문제에 항상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제국주의 문제를 절대 회피해선 안 된다. 오늘날 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동아시아 불안정 문제다. 동아시아는 세계 체제 내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지역으로, 미국에게 최대 라이벌은 단연 중국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나 최근 아이시스 공격은 중장기적으로 봤을 때 미국의 우선순위에 있는 사건들이 아니다. 미국은 지금 우크라이나와 이라크에서 원치 않는 군사적 개입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든 것이지, 진보진영 일각의 음모론이 시사하는 것 같은 유일 초강대국이 더는 아니다.
결국 제국주의 간 경쟁과 갈등의 태풍의 눈은 동아시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좌파적인 노동운동은 반제국주의 정치와 함께 이뤄져야 한다.
제국주의가 그 정의상 강대국들이 서로 지정학적·군사적 각축전을 벌이는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라면, 반제국주의는 당연히 반자본주의와 결합돼야 한다. 노동자 운동은 반제국주의적 이슈들을 외면해서는 안 되며, 반제국주의 운동이 계급투쟁과 반자본주의적 지향성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물론 당장에 동아시아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으므로, 동아시아를 겨냥한 반전 운동을 일으키려 애써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꾸준히 폭로하고 선전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결코 안 된다.
● 노동자 운동을 중시하는 것이 학생과 대졸 실업자 청년들을 경시하는 걸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을 조직 노동자 운동과 연결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