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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새로운 반란

체 게바라가 꿈꿨던 남미 대륙 전체의 혁명 가능성이 대두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치적 지도력이 핵심 문제라고 크리스 하먼은 지적한다.

체 게바라가 살해당한 지 거의 40년 만에 새로운 반란의 물결이 남미 전역으로 퍼지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세 나라 ― 에콰도르·아르헨티나·볼리비아 ― 의 정부가 자생적 봉기로 무너졌다.

페루에서는 거의 독재나 다름없던 후지모리 정권이 몰락한 뒤 집권한 톨레도 정부가 경제 정책들에 반대하는 지속적 반란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겨우 20개월 전에 선출된 룰라의 노동자당 정부의 정책들에 불만을 품은 새로운 좌파 경향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에서는 우고 차베스 정부를 전복하려던 군사 쿠데타가 두 차례 실패한 뒤 격렬해진 정치적 양극화가 격화되고 있다.

이 새로운 물결은 겨우 4년밖에 안 됐다. 그 전 20년은 남미 대부분 지역의 좌파들에게 정말이지 쓰라린 시기였다.

1964년 브라질에서, 1973년 우루과이와 칠레에서, 1976년 아르헨티나에서, 1980년 볼리비아에서 잇따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노동자 운동을 파괴했다.

1980년대에 다시 민간 정부들이 들어섰지만 손실은 거의 회복되지 않았다. 노동자 투쟁이 있었지만 수세적 투쟁들이었고, 경제 위기와 산업 구조조정은 투쟁의 성과를 도로 가져가 버렸다.

당시를 일컬어 흔히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렀는데, 40년 간의 간헐적인 경제 성장이 엄청난 외채 위기와 함께 끝나버린 시기였다.

1990년대에도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어디서나 지배계급과 그 참모들이 내린 결론은 국가 개입 위주의 낡은 정책들을 버리고 신자유주의 정책들로 전환해야만 새로운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공기업을] 사유화하고 규제를 완화하고 복지 프로그램들을 해체하자 외국 자본이 물밀 듯이 들어와 사유화된 서비스들을 매입했다. 그리고 국내 자본은 외국 은행들의 안정성과 해외 주식시장의 이윤을 좇아 썰물처럼 외국으로 빠져나갔다.

한편, 산업 구조조정으로 일자리가 대거 사라져 새로운 경기 후퇴 사이클이 시작됐다. 심지어 1997년 아시아 경제 위기가 남미 대륙을 강타하기 전부터 그랬다.

각국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훨씬 더 많이 추진하고 광범한 부문의 사람들이 안 그래도 형편없던 생활 수준이 훨씬 더 열악해진 것을 알게 되자 사회 밑바닥에서는 새로운 불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비록 그런 불만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에콰도르

이런 불만이 처음으로 폭발한 곳은 2000년 에콰도르였다. 원주민 운동, 즉 파챠쿠틱(Pachakutik)이 조직한 수천 명이 에콰도르 수도 키토로 모여들었다.

국회의사당을 지키던 병사들은 그들을 격퇴하기는커녕 오히려 불러들였다. 대통령 하밀 마우아드(Jamil Mahuad)는 도망쳤고, 군 장교인 루시오 구티에레스(Lucio Gutierrez)가 원주민 지도자와 대법관과 함께 임시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 봉기는 광범한 부문의 사람들을 빈곤에 빠뜨린 경제 정책들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 전 해에 경제 생산량은 7퍼센트 이상 급감했고 인플레이션은 60퍼센트까지 치솟았다.

하버드대학교에서 공부한 마우아드의 대응은 긴축 정책의 고삐를 더한층 옥죄는 것이었다. 정부의 핵심 계획 중 하나는 에콰도르의 통화인 수크레를 미국 달러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봉기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몇 시간 만에 임시혁명위원회를 대체한 군 수뇌부가 마우아드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또 다른 신자유주의자 구스타보 노보아(Gustavo newsa)가 이끄는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저항은 그 뒤 3년 동안 계속됐고 2001년 2월에는 무장 충돌을 포함하는 거의 봉기에 가까운 투쟁이 또다시 벌어졌다.

파업과 도로 봉쇄가 거듭됐고, 결국 2002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구티에레스가 주도하고 원주민 동맹이 후원한 연합 세력이 신자유주의자들을 물리쳤다.

아르헨티나

2001년 12월 19∼20일의 아르헨티나 봉기는 1930년대에 선진 공업국들을 강타한 것과 비슷한 경제 위기의 타격을 받은 상이한 집단들이 모두 자생적으로 뭉친 결과였다.

대통령 데 라 루아(De La Rua)가 이끄는 급진당 정부는 모든 은행계좌를 동결함으로써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예금을 사실상 몰수하고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봉급과 연금을 삭감한 뒤 실업자들이 대형 수퍼마켓들을 약탈하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화이트칼라 노동자들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의 하층 중간계급 사람들이 도심으로 몰려나와 실직한 육체 노동자들과 함께 대통령궁을 포위했다.

이틀 동안 경찰과 유혈낭자한 충돌이 벌어져 약 30명이 사망했고 결국 데 라 루아는 헬기를 타고 도망쳤다.

4주 동안 대통령이 네 번이나 바뀐 끝에 노련한 페론주의 정치인 두알데가 반쯤 안정적인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고, 18개월 뒤에 치러진 선거에서 공식적으로 합법적인 대통령이 선출됐다.

그 때조차 정부는 IMF와 외채 상환 조건을 둘러싼 최종 합의를 거듭거듭 연기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벌어야 했고 감히 수도에서 실업자 운동 피케테로스를 일관되게 탄압할 수 없었다.(2002년 여름에 정부는 그런 시도를 했다가 대중의 거대한 반발에 부딪혀 급히 후퇴해야 했다.)

볼리비아

2003년 10월 볼리비아에서는 젤리그나이트[니트로글리세린이 들어 있는 강력한 폭약의 일종]로 무장한 광부 수천 명이 농민들, 원주민 조직들, 엘 알토의 거대한 교외에 거주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수도 라 파스의 도심을 장악하자 대통령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Gonzalo Sanchez de Lozada)가 헬기를 타고 도망쳤다.

볼리비아에서 최초의 반란을 촉발한 것은 2000년 코차밤바 지역의 물 사유화였다. 잇따른 저항 때문에 정부 ― 군 출신의 독재자 대통령 반세르(Banzer)가 이끌던 ― 는 결국 사유화를 철회해야 했다.

그 뒤 3년 동안 투쟁의 물결이 잇따랐다. 거듭된 도로 봉쇄로 전국의 대부분 지역이 마비됐다. 2003년 2월에 봉기에 가까운 투쟁이 벌어졌다.

정부가 세금을 인상하고 [복지를] 삭감하자 수도에서 충돌이 잇따랐다. 경찰이 파업을 벌이고 정부 관공서들이 불에 탔으며 헌병과의 충돌 와중에 33명이 희생됐다. 정부는 세금 인상안을 철회해 가까스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8개월 뒤에 봉기가 성공했다. 칠레를 통해 천연가스를 수출하려던 계획에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잇따랐다.

정부군이 시위대에게 발포하자 그 전 3년 반 동안 계속된 모든 반란이 하나의 운동으로 모아졌다. 이것은 산체스 데 로사다를 쫓아내고 유명 방송인 출신의 부통령 카를로스 메사를 대통령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에서는 기존 정부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빈민들이 자신들의 정부로 여기는 정부를 지지하는 대중 반란이 두 차례 있었다.

첫번째는 2002년 4월 우고 차베스한테서 잠시 권력을 찬탈한 군사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빈민들이 수도 카라카스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였다.

두번째는 8개월 뒤 고용주 ‘파업’(사실은 직장 폐쇄)이 아래로부터 ― 도시 빈민과 일부 노동자들의 ― 활발한 투쟁으로 패배했을 때였다.

차베스를 전복하려는 노력들은 오히려 노동자들과 빈민들을 급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1998년에 차베스는 정치권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이용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그의 선거 운동은 어떤 의미에서도 반자본주의적이지 않았으며 계급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바탕으로 삼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순수한 형태의 부르주아 의회주의를 요구하는 데 집중했으며, 이는 새 헌법으로 구체화됐다.

그러나 차베스가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빈민에게 유리한 개혁들을 추진하고 국영 석유회사(라틴아메리카 최대의 다국적기업)의 이윤이 사회 엘리트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석유회사 경영진을 교체하자 상층 계급들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심지어 차베스를 전복하려는 최초의 쿠데타 당시에조차 많은 노동자들은 옛 정치권과 결탁한 부패한 노조 지도자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그래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며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차베스에 대한 상층 계급의 공격은 그런 상황을 바꿔놓았다. 차베스 자신은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 자들에게 아주 관대했다.(차베스의 헌법에 따라 구성된 대법원은 군대 내 쿠데타 음모자들을 석방했고, 신문들과 민간 TV 방송들은 정부를 음해하는 거짓말을 끊임없이 내보냈으며, 여전히 상층 계급 야당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카라카스 시 경찰은 차베스 지지자들을 거리낌없이 공격했고, 이라크 전쟁 기간 내내 베네수엘라 석유는 대부분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 대중 속에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무리 민주주의, 민족주의, 베네수엘라 건국의 아버지 시몬 볼리바르의 유산 따위에 대한 얘기들로 포장돼 있을지라도 현 상황은 분명히 계급 투쟁의 발전 과정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베네수엘라의 부자들이 얼마 전 국민투표를 통해 또 한 번 차베스와 그가 상징하는 것을 제거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브라질

남미에서 가장 큰 나라이자 경제인 브라질의 [계급 투쟁] 발전 속도는 앞서 말한 네 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20개월 전 노동자당 정부가 선출된 것은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반감이 대거 표출된 결과였다. 그러나 그것은 선거를 통한 반대였지, 최근의 투쟁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었다. 대토지를 차지하려고 노력해 온 무토지노동자운동(Landless Workers’ Movement)의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노동자당의 기원은 1980년대 말 상파울루 ABC 지역 금속 노동자들의 전투적인 노동쟁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당 지도부는 옛 독재 정권의 민간인 후계자들에 대한 의회 내 반대 세력으로 몇 년을 지내면서 차츰 길들여졌다.

그래서 룰라는 2002년 대통령 선거 전에 당시 집권 카르도주 정부가 작성한 IMF와의 합의안을 승인했고, 집권 후 오래지 않아 야당 시절 노동자당이 그토록 반대했던 복지 삭감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시위와 파업이 잇따랐고 노동자당 국회의원 네 명이 출당당했으며 그들이 사회주의해방 당(Socialism and Liberty Party)을 새로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개량주의

봉기가 혁명의 발판을 마련할 수는 있지만 봉기 자체가 혁명은 아니다. 봉기에 참가한 대중이 행동에 나서는 것은 기성 체제의 여러 측면들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다. 그것은 기성 체제를 완전히 타도할 필요성을 이해하는 것이나 그럴 수 있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봉기가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상황을 조성한 순간에조차 개량주의의 여러 버전들이 전면에 부상하는 막간극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케렌스키 같은 자가 더 나중 단계에서 레닌 같은 사람에게 길을 내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남미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반란들에서 개량주의의 새로운 변종들이 등장했고 이들이 지금 혁명적 세력을 압도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키르히너(Kirchner)는 페론주의당 (Peronist Party) 소속이다. 10년 전 페론주의당은 당시 대통령 메넴의 신자유주의를 수용했었다.

그러나 지금 키르히너는 아르헨티나를 정치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IMF와 더 좋은 조건으로 협상해야 하고, 노조 관료들에게 잘 보여야 하며, 좌파들에게 어떤 상징적 제스처를 취해야 하고(독재 정권 시절 살인 행위에 연루된 군 장교들의 면책특권을 폐지하는 것 따위), 실업자들의 불만을 조금이나마 들어주어야 한다(“고용 창출 계획”을 통해 실업수당을 제공하고, 이를 페론주의 조직과 피케테로 조직들이 분배하게 하는)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태도 덕분에 그는 지난해 선거 이후 잠시나마 안정을 누릴 수 있었고 좀 유약한 일부 좌파들한테서 약간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볼리비아의 메사도 비슷한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그는 지난 4년 간 저항 운동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었던 에보 모랄레스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정부를 개방했다.

코칼레로스(코카인의 원료인 코카 잎 재배농들)의 지도자이기도 한 모랄레스는 메사 외의 다른 대안은 미국의 군사 개입을 유발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메사와의 제휴를 정당화하고 있다.

브라질의 룰라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훨씬 덜 시달린다. 왜냐하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거리에서 싸운 대중이 아니라 투표소에서 투표한 대중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좌파적’ 제스처들은 대부분 주요 제국주의들이 (자신들의 시장을 브라질 농업 자본가들의 수출품에 개방함으로써) 브라질 대기업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노조 관료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 중요한 무토지노동자운동도 룰라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에콰도르의 구티에레스는 지난해 IMF와의 새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자신의 지지자 다수에게 환멸감을 안겨주었다. 원주민 단체들은 정부와 관계를 단절하고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좌파들은 차베스가 이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래로부터 대중 운동의 압력에 떠밀려 개혁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개혁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 전에 그가 룰라가 라틴아메리카 전체가 가야 할 길을 보여 주었다고 칭송한 데서 드러나듯이 차베스의 핵심적 태도는 여전히 개량주의이다.

대중 운동은 이런 전략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베네수엘라 사회를 위에서 아래로 조금씩 바꿔나간다는 전반적 전략 안에서 압력의 한 형태 구실을 할 뿐이다.

이것은 핵심적으로 국가 기관들, 무엇보다도 군대 안에서의 책략에 의존하고 있다. 일부 고위 장교들을 전역시키고 다른 장교들을 좌천시킴으로써 지금까지는 더 이상의 쿠데타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차베스의 통제력은 사소한 개혁들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혁명 자체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장교들을 붙잡아두는 것에 달려 있다.

그 때문에 제국주의와 부자들에 반대하는 그의 장광설에는 항상 그들과의 화해 제스처들이 뒤따른다. 그래서 그들이 선동하는 국민투표가 정부의 미래를 좌우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혁명을 향하여?

봉기들은 아직 혁명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봉기에 참가한 사람들이 어떤 결정적 패배를 당한 것도 아니다.

새로운 개량주의는 전면적 충돌이 아니라 대중에게 약속을 내놓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체제가 더 취약한 국민 경제들에 가하는 압력 때문에 그런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 올 것이다.

이 점은 외채 문제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두 가지 상이한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한편으로, 국내 지배계급은 IMF와 은행들을 기쁘게 해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하기 위해 대중의 생활수준을 더 악화시키면 또 다시 대중 반란을 촉발할 수 있다.

혁명적 좌파는 새로운 폭발에 대비해야 한다. 4년 전 새로운 반란 국면이 시작됐을 때 혁명적 좌파는 취약했고 분열해 있었으며 흔히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겪은 대중 운동 패배의 경험 때문이었다.

이제 혁명적 사상에 귀를 기울이는 새로운 청중이 광범하게 존재한다. 다양한 혁명적 좌파들이 볼리비아 노총(COB) 활동가들의 토론에서, 아르헨티나의 피케테로스 사이에서,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노조연맹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어디서도 결정적 세력이 아니며, 개량주의나 반쯤 개량주의적인 사상으로부터 대중을 떼어내 자신들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의 노조 관료들은 사람들에게 키르히너를 믿으라고 말하고 있으며, 피케테로 운동 내부의 강력한 집단들은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고용 노동자들과 연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있다.

일부는 그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율주의적” 주장들을 펴기까지 한다. 즉, 각각의 그룹이 저마다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국가와 결정적으로 대결하지 않아도 사회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안데스 산악 지대의 공화국들(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에서는 원주민들, 즉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비(非)스페인어 사용자들의 운동이 새로운 반란에서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들은 3백 년 간의 식민 통치를 겪으며 사실상 노예로 전락했고, 독립 이후 거의 2백 년 동안에도 2류 시민 취급을 받으며 일상적 굴욕에 시달려 왔다.

그들의 운동은 1960년대 미국 흑인들의 운동이나 오늘날 인도 달릿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운동일 뿐 아니라 존엄성과 인정 ― 그리고 자기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 ― 을 쟁취하려는 운동이다.

이것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지배계급과 기성 정치권에 대한 적대감뿐 아니라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노동자들과 도시 빈민에 대한 적대감으로도 쉽사리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신자유주의 공격에 맞서 반격하고 있다.

혁명적 좌파는 억압에 저항하는 원주민 운동들과 제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과거에 그들은 항상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와 동시에,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단결된 운동의 필요성을 그들에게 확신시켜야 한다.

베네수엘라에서 대중 운동 활동가들은 차베스에 대한 엄청난 환상을 갖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르주아지와 우익의 실패한 공세를 자극한 것이 바로 차베스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베스가 기존 국가 구조를 통해 활동하기 위해 부르주아지와 거듭거듭 타협하려 할 때 대중 운동은 그런 환상 때문에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볼리바르주의 혁명’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에서는 어떤 혁명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을 두 번이나 물먹인 대중 운동에 복수하려는 희망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고, 그 중 일부는 이웃 콜롬비아의 강경 우익 정부와 살인마 집단인 우익 민병대들의 지원에 기대를 걸고 있다.

남미의 사태 전개 속도는 나라마다 상당히 다를 것이다. 내 생각에는 볼리비아·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가 브라질이나 우루과이보다 훨씬 더 빠를 것 같다. 정확한 패턴이 어떻든 간에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혁명가들이 어떤 구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