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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선한 분노 ― 자본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랑》:
급진화하는 청년들의 ‘선한 분노’가 잠재력을 발휘하려면

올초 세월호 참사 1주기에 맞춰 나온 《선한 분노》는 ‘자본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랑’이라는 부제처럼 자본주의의 불의를 통렬하게 고발한다. 오늘날 급진화하는 청년들의 정서와 생각을 많이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좌파적인 학생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게 읽히는 듯하다.

저자 박성미 씨는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영화감독으로 2012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소재로 한 ‘희망버스, 러브스토리’를 제작했다. 세월호 참사 직후에는 청와대 게시판에 “이런 대통령 필요 없다”는 글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2011년 겨울 홍익대 청소노동자 투쟁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맺은 인연으로 김진숙, 송경동 같은 노동운동 내 좌파적 활동가와 배우 김여진이 이 책을 추천했다.

2011년 단호한 점거 투쟁과 연대 확대를 통해 승리한 홍익대 청소·경비 노동자들 이 투쟁은 많은 청년·학생들에게 영감을 줬다 ⓒ이미진

2011년은 제2의 1968년이라고 할 정도로 전 세계에서 급진화와 투쟁의 물결이 일었던 해다. 이 책에는 그 일들을 함께 겪은 많은 청년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경험들이 녹아 있다. 필자도 박성미 씨와 똑같이 홍익대 청소 노동자 투쟁을 보며 눈물 지었고,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타고 영도다리를 건너가 최루액을 맞는 잊지 못할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을 통해 체제에 대한 더 큰 물음들을 던지며 사회운동에 더 깊숙이 참여하게 됐다.

저자는 그런 경험들 속에서 부조리, 자본과 권력의 실체, 언론의 위선, 그리고 연대의 소중함과 승리의 가능성 등을 풀어냈다.

뒤집어진 세계

저자는 “이 글이 만약 힘을 갖게 된다면 학위도 전문성도 아니고, 그것은 오로지 사람들의 공감일 것이다” 하고 썼는데, 정말이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공감하기 쉽게 폭로했다는 점이다.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저자는 책 전반에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지만, 이 체제는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뒤집어 놓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선한 분노》, 박성미 지음, 아마존의 나비, 248쪽, 12,000원

“사람을 살리라고 파업을 하면 신문에는 ‘영업 손실 몇십 억’이라는 기사가 떴다. 그 사람들이 밤에 잠을 자게 해 달라고,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 대우해 달라고 파업을 하면 공권력은 그들을 복날 개 패듯이 패고 끌고 나왔다. 그리고 다음날 공권력 강제집행 덕분에 그 회사 주식이 오를 것이라는 뉴스가 떴다.” 2009년 쌍용차 파업을 잔인하게 진압한 조현오는 경찰청장까지 승진했고, 용산참사 살인 진압의 책임자 김석기는 한국공항공사 사장이 됐다.

“잘못된 결정에 대하여 CEO가 보수를 반납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가장 먼저 노동자들이 해고된다. CEO는 이익에 대한 보상은 가장 먼저 가져가지만 손실에 대한 피해는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떠안는다.”

이 책의 장점 또 하나는 홍익대 청소노동자 투쟁과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등 사회운동에 적극 참가한 저자의 경험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점이다. 불의에 분노했지만 현실은 잘 몰랐던 소위 “강남좌파”였다는 저자는 이 두 투쟁을 경험하며 체제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 경찰의 폭력, 가진 자들에게 유리한 사법체계 등.

“몰랐던 거다. 파업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기업이 어떤지. 이 나라가 어떤지 … 그리고, 뉴스에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었다. 나라 한쪽에서는 용역이 집단으로 사람을 패고 폭행하고 있는데 포털의 메인에서는 한 연예인과 그녀의 남자친구가 더 중요했다. 그게 서러워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저자는 “최초의 승리의 경험, 이 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왜 그토록 사람들이 싸우는지 아마 알 수 없을 것이다”라는 김진숙의 〈소금꽃나무〉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저자에게 (그리고 필자에게도) “최초의 승리의 경험”은 2011년 홍익대 청소노동자 투쟁이었다.

체제의 민낯을 마주한 저자는 동시에 연대의 가능성도 느낀다. 저자는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을 지원하고자 ‘날라리 외부세력’을 만들고, 한진중공업 공장 담벼락을 넘고, 노동자들과 어우러지며 느꼈던 연대의 소중함을 생생히 전해 준다. 당시 필자도 투쟁 속에서 꽃피는 연대감과 동지애 등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텐트가 필요하다고 하니 텐트가 생겼고 난로가 필요하다고 하니 난로가 왔고 바자회 물품이 여기저기서 들어왔다. … 미디어에서 보는 ‘대중’은 바보 같았으나 SNS에서 발견한 ‘시민’들은 선하고 멋졌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때도 마찬가지였다. 연고도 없는 부산에 수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와서 길바닥에서 하루를 꼬박 새우며 해고자들의 복직 투쟁에 함께했다.

화수분

이 책은 쉽게 읽는 정치 에세이지만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데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다. 저자의 주장이 글 전반에 흩어져 있어서 명쾌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여기저기서 반짝인다.

저자는 자본주의에서 경제 성장이 평범한 사람들의 사정이 좋아지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벌려다 스트레스 때문에 병에 걸려 번 돈을 병원에서 다 쓰게 되면 그것도 경제성장이 되었다. … 시간을 사기 위해 과하게 일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행복을 포기하고, 돈으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해 돈을 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돈을 버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수분을 구매해서 돈을 버는 것이라 주장한다. “노동 소득은 내가 일하면 벌고 일하지 않으면 돈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화수분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돈이 끊임없이 나온다.”

여기서 ‘화수분’은 부동산, 은행 같은 금융자산이다. “화수분은 물건이나 서비스를 생산하지 않는다. 화수분은 돈을 생산한다고 여겨지는데, 사람들은 ‘돈이 돈을 낳는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 표현은 틀렸다. 돈이 돈을 낳는 것이 아니다. 화수분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돈을 가져올 뿐이다.” 따라서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 전체에서 추가적으로 늘어나는 이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오로지 남의 것을 빼앗아 오는 방식만 있을 뿐이다.

이런 분석은 저자의 정치적 결론과도 연결이 된다. 저자는 대형 브랜드를 소비하지 않기,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소비하지 않기, 누군가를 수탈하지 않는 윤리적 기업을 만들기 등으로 이윤 중심 체제를 개혁해 보려 한다. 물론 기본소득은 지지할 만하다. 그러나 개개인의 윤리적 소비나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기업(형용 모순이다) 만들기 등은 체제에 별다른 타격을 주기 어렵다.

또한 저자의 눈에 비친 노동자는 생산영역에서 집단적인 생산을 하고 그렇기에 집단적으로 이윤에 타격을 미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가진 거인이라기보다는, 소비 영역에서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개인들의 통칭이다.

‘선한 분노’를 급진화 시키기

이처럼 저자가 주장하는 사회적 연대는 선한 개인들의 도덕적인 정의감에 바탕을 둔 연대다. 물론 이런 연대는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개인에게 가하는 압력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들의 연대는 강점 만큼 약점도 크다. 이런 딜레마 때문에 저자는 괴물 같은 자본주의 체제가 존속하는 이유로 “우리 안의 욕망”을 탓하는데, 기독교적 원죄론이 떠오르기도 한다.

따라서 분노한 우리는 사람들을 객관적이고 집단적인 이해관계로 묶어주는 ‘무엇’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계급’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저자가 아쉽게도 주목하지 않은 곳,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을 착취해 이윤을 만들어 내는 생산영역을 주목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스물네 시간 생존하는 데는 반나절 노동이면 충분하지만 그럼에도 하루 종일 일해야 한다”고 썼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일한 만큼’의 돈을 주지 않는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에게 오직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만 주며 나머지를 가져간다. 이것이 이윤의 비밀이다.

이는 뒤집어서 노동자들의 작업 거부 즉, 파업이 이윤의 원천을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 준다. 청년들의 ‘선한 분노’는 더 급진화해야 한다. 체제를 멈출 수 있는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인식한 ‘계급의 정치학’과 만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