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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이집트인이 말하는 이집트 혁명과 한국 촛불

내가 진정으로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운이 좋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자랑스러워 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지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이것을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나인가? 아니면 저들일까?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왜 저들일까?

내 무의식 속에서 매일같이 여러 질문들이 떠오르지만 나는 여전히 답변을 찾지 못했다. 내가 이 질문들 중 어느 하나라도 답변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내가 처음부터 시위에 참여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생 시절 나는 국가 정보기관이 학생회를 임명하던 광경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 학생회의 일원이기까지 했었다. 나는 혁명은커녕 자그마한 집회에 참여하는 것조차 상상해 본 적이 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운명이 나로 하여금, 그것도 적극적으로 불과 5년을 간격으로 연달아 벌어진 두 혁명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 나에게 낯설지가 않다. 이 두 혁명이 같은 나라가 아니라 동서양 양 극단에 위치한 두 나라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가장 신기한 점은 내가 두 혁명에서 느꼈던 감정이 똑같았다는 것이다.

낯설지 않은

그리고 이때 나는 책임감을 가지고 참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여기가 내가 태어난 곳이었던 것처럼 잘못된 것을 고쳐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던 것이다. 나는 내 주위를 둘러싼 온갖 연령대의, 다양한 모습과, 성별, 국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동시에 대통령 궁 높은 담장 뒤에서 꼼짝 않고 있는 이들에게 분노했다. 2011년의 이집트와 2016년의 한국, 거리와 광장의 이름도 다르고 집회에 나온 사람들의 생김새도 다르지만 “민중은 정권의 퇴진을 원한다”를 외쳐야만 했을 때 흘리는 눈물의 떫음은 똑같았다.

원래 나는 어느 정권도 무너지길 바라지 않았었다. 오히려 언제나 좋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사회는 현실과 너무나 달랐다. 어쩌면 여러분들의 생각도 같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조차 없는 지경에 이른 부패와 저급함, 좌절적 상황을 규탄하며 분노의 구호를 다 같이 외쳤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구호는 글자 그대로 하나로 모였다. 나는 한국의 수도 중심부에서 아랍어로 “민중은 정권 퇴진을 원한다”라고 적혀 있는 현수막을 보았다. 이 문구를 외치는 청년들을 보면서 내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11년 타흐리르 광장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1백만 명이 모인 11월 12일 박근혜 퇴진 촉구 민중총궐기에서 한국외대 학생들이 아랍어로 "박근혜는 퇴진하라"고 적은 현수막을 들고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이집트와 한국 사이의 여러 차이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나라의 상황 사이에 여러 공통점을 찾아보고자 하였으나 아쉽게도 하나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말해 보겠다.

첫째, 안전과 관련한 것이다. 이집트는 안전하지가 않았다. 대개 무사히 귀가를 할 확률보다 체포를 당하거나 부상을 입을 확률이 더 컸고 심지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정치적 동기나 의지가 강하지 않은 이들은 집회에 쉽게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위에 참여한 청년들은 가족에게 사실을 숨기고 나오거나 타흐리르 광장에 절대 가까이 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서야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시위에 참여하고자 했던 많은 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 즉 두려움이 의지보다 더 컸던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국가안정과 경제발전이 중요하다는 등의 변명을 하며 집안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이들은 결국 소위 첫 “소파 당원”들, 즉 침묵하는 다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은 규모와 무관하게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집회가 열리는 나라로 세계 1위다. 이 덕분에 모든 사회 계층에서 집회에 참여한 수가 늘었던 것이다. 나는 심지어 아이들과 애완동물까지 데리고 나온 가족도 봤는데 이들은 마치 집회의 광장에 나들이를 나온 것만 같았다.

둘째, 이집트의 경우 시위들은 지도부가 부재하거나 요구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었다. 시위대의 요구들은 다소 즉흥적이었고 경매하듯이 결정되었는데, 처음에는 “삶, 자유, 사회 정의”로 시작해 “민중은 정권 퇴진을 원한다”로 끝났다.

하지만 한국에서 나는 여러 단체와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대표를 파견해 다른 단체들과 요구와 구호, 그리고 집회가 시작하고 끝나는 시간까지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단체들의 구호가 집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구호였으며, 개인으로 참여한 나머지 시민들까지 이끌 수 있다는 점도 발견했다. 내가 기억나는 단체들 중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를 망라한 학생회들이 있었고, 철도노조와 같은 노동조합들도 있었다.

셋째, 서울시장이 집회에 공식적으로 참가했을 정도로 정세가 나아갔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시장이 시위에 참가하는 장면은 이집트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한국인 동료에게 어떻게 군 장성이 정부에 맞서 집회에 참석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내 질문을 채 다 듣기도 전에 말을 끊으며 왜 시장이 군 장성이어야 하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이집트 헌법에는 시장이나 도지사는 군 장성이나 그와 유사한 계급을 지닌 자여야만 한다고 명시하는 조항이 있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내 동료는 시장은 국민들이 자신들 중 한 명을 선거로 선출하며, 중앙권력과는 어느 정도 분권이 되어 있다고 설명해 줬다. 나는 현 서울시장이 정부에 가장 강하게 반대하는 인사들 중 하나라고 들었다.

넷째로는 집회 다음날 아침, 특히 백만 명이 모였던 집회 다음날 내가 본 광경이다. 집회를 위해 차량이 통제되었던 도로나 광장을 건널 때 모든 것은 정상이었다. 경찰차도, 탱크도, 뽑힌 나무도, 깨진 유리병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쓰레기가 바닥에 버려진 것을 하나도 보지 못했는데,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나라와 도시의 주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더 나은 삶을 위해 시위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발을 딛고 있는 바로 그 장소부터 개선하고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시위에 나선 것이다.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이집트에서는 시위가 끝나든지, 아니면 해산되든지 간에 집회 현장에는 파괴와 황폐함이 남았었다.

마지막 다섯째는 시위의 영향에 관한 것이다. 이집트의 경우, 모든 이들이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출근도 하지 않은 채, 나라에 대한 의무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그리고 광장에서 24시간 동안 먹고 자면서 거대한 국민적 분노를 표출했다. 이집트 정권은 이 거대한 분노를 18일 이상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민중은 정권 퇴진을 원한다”를 외치던 시위대가 “민중이 정권을 퇴진시켰다”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을 때 흘렸던 기쁨의 눈물을 기억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규모 시위는 휴일인 토요일에만 열렸다. 그리고 다음날인 일요일도 휴일이었기 때문에 정부를 민중의 요구에 굴복시킬 만큼 충분한 압력을 가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시간과 직장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나라를 위해 시간도 좀 더 들이고 직장도 덜 가는 희생을 할만 하지 않은가?

끝으로 나는 아직까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두 나라의 혁명이 성공하길 기원한다. 비록 두 혁명의 성격이 다르고 각각 처해 있는 상황이 상이하지만 나는 각각의 특징을 서로에게 전해주고자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혁명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서로 부족한 점들을 채우고 고쳐나갈 수 있으며 이집트와 한국에서 모두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