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제정 운동 선포 기자회견: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나중 말고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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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 선포를 위한 각계각층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기자회견에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이주공동행동,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을 포함해 1백22개 단체가 이름을 올렸다. 정의당, 녹색당, 민중연합당 등 진보정당도 참가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고용, 거래, 교육 영역에서 성별·장애·병력·나이·출신국·인종·피부색·용모 등 신체 조건, 혼인 여부, 가족 형태, 종교, 성적 지향, 학력, 고용 형태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가해자를 제재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절차를 규율하는 법이다.
이 법은 2007년 노무현 정부가 처음 입법예고를 한 이래 17대, 18대, 19대 국회에서도 꾸준히 발의됐다. 그러나 우파들의 반발로 10년째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2007년 당시 경총은 차별금지법이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막는다’며 반발했고,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차별금지 사유 중 ‘성적 지향’을 집요하게 문제 삼으며 차별금지법이 “동성애 찬성법”이라고 공격해 왔다. 19대 국회에서는 민주통합당 김한길, 최원식 의원이 우파들의 반발에 굴복해 자신이 발의한 법안을 스스로 철회하는 일까지 있었다.
최근 민주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문재인은 보수 기독교 단체를 만나 ‘사회적 합의가 안 돼서 차별금지법을 만들 생각이 없다’고 입장을 밝혔고, 안희정도 차별금지법 제정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중도 보수층의 표를 의식한 기회주의적 행태이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민주당 후보들의 이런 행태에 분노하며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사회적 소수자, 힘과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 폭력을 묵인하고, 동조하는 세력에 정당한 명분과 권력을 주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사회적 합의 운운하지만 “정치인들과 주요 정당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위해 정작 10년 동안 어떤 노력을 해 왔는가?” 하고 규탄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주노조 우다야 라이 위원장은 “법이 있어도 사용자들이 지키지 않는다. 말로만 평등하다고 말한다. 경찰들도 사업주 편만 든다”고 폭로하면서 이주민 평등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서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자식이 동성애자라고 밝힌 한 어머니는 ‘촛불 민심’을 말하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했다. “나는 박근혜 퇴진 촛불에 여러 번 나왔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바라면서 촛불은 든 것이다. 촛불 시민에는 성소수자와 같은 우리가 있음을 알아 달라. 차별금지법은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절실히 필요하다.”
트랜스젠더라고 밝힌 박한희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 활동가는 “나는 여성으로 살지만 법적 성별은 아직 남성이다. 주변에는 이런 이유로 직장을 구하지 못하거나 가족에게까지 외면 당해 고립된 친구들이 많다. … 그런데 이런 현실 앞에서 어떻게 ‘나중’이라고 말할 수 있나? ‘사회적 합의’를 기다리라고 할 수 있나?” 하고 규탄했다. 또, “나도 광화문 촛불 속에 있었고, 그 안에는 무지개 깃발과 수많은 성소수자들이 있었다. 차별금지법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지금 당장 제정하라”고 주장했다.
이번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가입 단체를 확대하고, 20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여러 활동을 벌일 계획이다.
기자회견문
차별금지법도 못 만드는 이게 나라냐!
2017년, 사회정의와 변화에 열망과 실천이 어느 때보다 뜨거운 지금, 정치권 일각에서 모욕스런 풍경이 반복되고 있다. 차별을 조장하는 이들이 마치 합당한 후보 검증 절차마냥 "'성소수자와 동성혼을 지지하는'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느냐"고 질문하고, 그들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답변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지난 10년 동안 차별 금지 법안을 발의했다가 자진 철회하고, 보수 기독교 세력, 혐오 세력에게 가서 '나는, 우리당은 차별금지법 안 만든다' 읍소해 왔다. 유력 대선 후보들의 '성소수자 지지하지만 차별금지법은 안 된다'는 발언은 보수적 개신교 교리와 가치관, 사회질서 유지를 이유로 소수자들의 차이와 정체성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국민 편에 서겠다는 정치인들의 약속들 속에서, 역설적으로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드러나는 순간이다.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10년의 과정은 한국 사회 인권 증진 요구가 어떤 방식으로 후퇴해 왔는지, 차별금지법 제정의 의미가 어떻게 오염되는지 확인하는 시간들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공약이었던 차별금지법은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에 따라 2007년 10월 법무부가 입법 예고를 하였지만, 보수 기독교 단체들의 반대에 부딪혀 성적 지향과 병력 등을 삭제하며 누더기 법안으로 변하는 순간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다시 2010년 법무부가 입법을 시도하지만 같은 세력에 의해 무산되었다. 17, 18, 19대 국회, 소위 '이명박근혜' 정권에선 연이은 발의에도 제정되지 못하였고, 심지어 국회의원들이 반대 세력의 압박에 못이겨 발의한 법안을 자진 철회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다 결국 법무부가 차별 금지 법안 추진을 포기하였던 2012년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이후 2011년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와 아동권리위원회, 2012년 8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2012년 UN 국가별 인권 상황 정기 검토(UPR) 등 국제사회의 요청과 권고는 계속되어 왔다. 사회적 합의를 운운하는 자들에게 묻는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목소리를 모으고 제정 운동을 지속해온 사람들의 의견은, 또한 국제사회의 권고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에 과연 아무런 영향을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인가? 1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정치인들과 주요 정당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위해 정작 어떤 노력을 해 왔는가?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만을 위한 법이 아니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의 존엄한 삶을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이 말을 반복해야 하는 사실이 매우 참담하다. 한국은 현재 장애인 차별 등 일부 차별 금지와 관련된 개별법이 존재하지만 구체적인 구제 조치가 미흡하고,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른 조정·권고만으로는 차별받은 피해자의 효과적인 구제가 어렵다. 무엇보다 독립 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에 국가적 책임과 역할을 떠맡겨서는 안된다. 정부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평등권 실현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정책을 수행해야 하고,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를 감시하는 독립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을 제고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첫걸음이다. 따라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언어,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피부색, 출신 지역, 출신 학교, 용모 등 신체 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학력, 고용형태,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합리적 이유 없이 이루어지는 차별을 구체적으로 금지·예방하고, 불합리한 차별을 겪고 있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구제를 포함하는 기본법이다. 장애 여성, 성소수자 여성, 이주 장애인 등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복합적인 사회적 위치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차별을 경험하는 모든 이들의 평등권 실현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다.
나중에, 다음에,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묻자. 혐오와 폭력이 벌어지는 바로 지금, 이 현실에 대해선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지난 2월 19일 국가인권위원회 실시한 '혐오 표현 실태 조사 및 규제 방안 연구' 발표는 우리 사회 혐오 표현의 실태와 소수자들의 삶을 드러내 준다. 온라인 혐오 표현 피해 경험률은 성소수자가 94.6%, 여성 83.7%, 장애인 79.5%, 이주민 42.1%로 나타났다. 오프라인 혐오 표현 피해 경험률도 성소수자가 87.5%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증오 범죄 피해 우려는 성소수자의 92.6%, 여성의 87.1%, 장애인의 81%가 '그렇다'고 답했다. 피해를 소수자 집단은 낙인과 편견으로 일상생활에서 배제되어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고 지속적인 긴장 상태나 무력감 등 심리적 어려움에 시달린다고 발표했다. 혐오와 차별은 실존을 위협하고 일상을 통제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인권을 유예당하라고만 말할 텐가.
차별금지법 제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사회적 소수자, 힘과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 폭력을 묵인하고, 동조하는 세력에 정당한 명분과 권력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 세력이 힘을 갖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겐 학교에 갈 때, 일터에 나갈 때, 거리를 나설 때, 사랑할 때, 나의 의견을 말할 때, 생명의 위협이나 모욕감을 느끼는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상과 실존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손들어 주는 행위가 더 이상 계속되어선 안된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은 합의의 대상도 표심 잡기를 위한 홍보의 대상도 아니다. 보수기독교라는 이름 뒤에 숨은 것은 한국 사회 정치 경제를 독식하고 있는 가진 자들이다. 차별 금지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더 이상 경제적 착취와 차별을 통해서 만들어진 현재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력들 말이다. 제정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질수록 차별 반대 운동과 법 제정의 필요성은 더욱 선명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 광장에 모여 차별의 반대하는 목소리를 더욱 크게 함께 내자고 제안한다. 광장의 우리 속에서도 숨겨져 있던, 큰소리 내기 어려웠던, 묻혀졌던 존재와 목소리를 더욱 크게 드러내자. 그것이 바로 반차별 연대의 새로운 물결이다. 지연된 인권과 탄핵이 아닌, 바로 지금의 인권과 지금 탄핵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내자. 반차별 행동의 광장에서 정의와 진실을 위해 투쟁하는 우리는 서로를 자랑스러워 한다. 명분과 이권으로, 사회적 소수자를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힘이 되고 사회적 적폐를 청산하는 연대를 만들어 갈 것이다.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이렇게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혐오는 더욱 조직화되고 정치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맞서 사회적 소수자들은 변화를 위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자긍심을 표현하고, 대중을 설득하고, 잘못된 제도와 차별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이젠 촛불을 들고 바로 이 광장에 함께 모였다. 우리는 이 광장의 싸움이 모든 차별받는 사람의 연대의 장이 되기를 염원하며 반차별을 위한 차별금지법 제정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낼 것이다. 이 광장에서 나의 존엄과 인권, 새로운 세상을 정치인에게 위탁하지 않고, 우리의 목소리와 투쟁으로 박근혜를 탄핵시키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그 힘이 결국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으로 향해 가도록 만들자.
2017년 2월 23일
차별금지법제정을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