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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적 유행을 열심히 따르는 정성진 교수의 우경화

이광일 교수의 논평 문장을 좀 더 정확하게 반영하여 수정했다.

2017년 5월 12~14일 성공회대학교에서 제8회 맑스코뮤날레가 러시아 혁명 1백주년을 기념하며 ‘혁명과 이행’을 부제로 열렸다. 메인 세션 중 청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인물은 정성진 교수였다. 그가 마침내 레닌주의를 공개적으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정 교수의 입장 변화를 보며, 그동안 레닌주의를 비난하던 많은 교수들이 흐뭇해 했다. 예를 들어, 한국예술종합학교 이광일 교수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논쟁들에서 이미 다 나왔던 것을 정성진 교수가 정리했다면서 “이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논평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였던 적이 없고 좌파적 개혁주의자였던 그가 정성진 교수의 최종 전향에 보내는 찬사였다. (혹시 자유주의자나 심지어 우익으로까지 변하랴 하는 남은 기대 속에서 ‘최종’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혁명 1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정작 러시아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레닌과 볼셰비키를 비난하는 자리가 됐으니 이보다 역설적인 일은 없을 듯하다.

물론 정 교수의 공개적 전향은 사반세기 이상 현실의 계급투쟁과 거리를 둔 채 순전한 이론적 논의만 일삼은 한 책상물림의 우경화일 뿐이다. 정 교수가 이번 맑스코뮤날레에서 발표한 ‘레닌의 사회주의론 재검토’의 머리말에서 한 말이 명징한 사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역사 또는 이와 관련된 레닌의 정치적 실천 그 자체를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어떠한 객관적 조건 속에서 어떠한 실천을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지 않은 채 한 혁명가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개념을 정 교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사실 이는 단지 정 교수만의 문제가 아니라 학술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일반적 문제이다. 그래서 정 교수의 주장을 다루기에 앞서 근래 좌파 교수들의 행보를 간략히 돌아보고자 한다.

좌파 교수들의 최근 우경화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이라면 항상 현실의 계급투쟁과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다루고 논의해 이를 다시 운동으로 피드백 하는 구실을 해야 한다. 근래 많은 좌파 교수들은 현실의 계급투쟁에 관여하기를 삼가다 보니, 보통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논의를 전개하다가도 정치적으로는 너무도 손쉽게 개혁주의에 빠져들곤 한다.

특히, 노무현 정권에 대한 억압받는 대중과 진보진영의 환멸을 이용해, 2006년 이후 지배계급과 우파의 공세가 집요했다. 더구나 노조 지도자들과 진보 정치인들은 갈수록 점점 개혁주의적이 돼 왔다. 여기에 우파 정권 10년이라는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돼 좌파 교수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물론 시장 지향적 대학 구조조정과 교수들에 대한 실적 압박도 대학의 교수 채용과 재임용 등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정 교수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2015년 정 교수는 그리스 시리자의 집권과 스페인 포데모스의 약진에 희망을 나타내는 것을 넘어, 그 정당들이 ‘21세기 사회주의’의 현실적 대안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이미 그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했던 것이다.

맥락에서 떼어 낸 거두절미

정 교수 발표의 주된 요지는 레닌의 사회주의관이 마르크스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레닌의 전체적 사상과 특별한 강조에 모두 유념하는 것이 아니라 레닌 말들의 파편을 거두절미 식으로 짜깁기해 비판을 하는 정 교수의 논법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일국사회주의’론이 스탈린의 발명품이 아니라 1915~17년에 레닌이 주창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 교수는 레닌이 1915년 8월에 쓴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에서 한 다음 말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독립된 슬로건으로서의 세계합중국은 전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첫째, 이 슬로건은 사회주의와 합치되기 때문이며, 둘째, 일국에서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잘못된 해석과 그와 같은 국가와 다른 국가들의 관계에 관한 잘못된 해석을 낳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일국에서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잘못된 해석”이라는 말만 보고 이 구절을 일국사회주의론의 함축으로 해석한 듯하다. 그러나 레닌은 이 구절의 바로 다음 문장에서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 때문에 혁명은 한두 나라에서 먼저 시작해 나머지 나라들로 확산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문맥에서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노동자 국가 수립을 뜻하고, ‘일국사회주의’ 비판자들에 대한 맞비판은 세계합중국을 위한 동시다발 혁명에 대한 비판으로 독해해야 한다. 당시에는 국제 혁명을 동시다발 혁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에도 그렇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 구절 하나만 갖고 레닌을 일국사회주의 주창자라고 보는 것은 우습다. 레닌은 생애 내내 자본주의는 세계적 체제이므로, 노동자 혁명도 국제적으로 확산돼, 사회주의가 세계적 차원에서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세계적 차원’은 선진 자본주의 세계를 의미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둘러싼 논쟁에서나 1918~23년 독일 혁명에 대해 레닌이 주장한 것을 보면, 그가 일관된 국제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1924년 스탈린이 주창한 일국사회주의론은 1923년 독일 혁명의 실패와 그에 뒤이은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화에 대한 패배주의적 대응이었다. 즉, 러시아에서 점차 득세하고 있던 관료 집단은 국제 혁명이라는 위업에 도전하기보다는 사태의 안정화를 바랐는데, 그들의 상태와 염원을 반영한 이데올로기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이었다.

둘째, 정 교수는 레닌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아나키즘이라고 비판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레닌이 1905년 혁명 와중에 쓴 ‘임시혁명정부에 대하여’에서 한 다음 말을 근거로 들었다. “원칙적으로 혁명적 행동을 아래로부터의 압력으로 제한하고 위로부터의 압력을 거부하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이 말에서 “위로부터의 압력을 거부하는 것”은 혁명적 지도를 거부하는 것을 뜻하는 것일 뿐,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즉, 노동자 계급의 자력해방)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레닌은 위 인용 문구의 몇 줄 밑에 혁명적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든 진정한 혁명적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정당은 봉기를 지도하고 혁명을 조직하며 모든 혁명적 세력을 집중시키고 군사적 공세를 과감하게 펼치며 혁명정부의 힘을 가장 정력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한다.”

셋째, 정 교수는 레닌의 사상이 1914년 즈음해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할 정도로 크게 변화했다”고 다소 과장스럽게 주장한다. 그 전까지는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와 인식을 완전히 공유했다는 것이다.

물론 1914년 이전에 레닌이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를 정설로 여겼던 것은 사실이다. 제1차세계대전의 개전, 독일 사민당을 포함한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의 배신, 헤겔의 《논리학》 독해, 제국주의론 정립 등을 거치며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과 확실히 선을 그었다. 그러나 1914년 이전 레닌의 사상이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와 똑같았다고 할 수는 없다. 레닌은 다가올 혁명의 과제가 부르주아적일 것이라고 본 점에서는 제2인터내셔널과 견해가 같았지만, 그 혁명의 주체는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레닌은 특별히 선진 노동자들과 유기적이고 개입주의적인 연계를 맺고 있는 혁명가들의 독자적 조직을 건설하려 했다는 점에서 카우츠키주의와 달랐다.

넷째, 정 교수는 국가의 분쇄·소멸 테제에 관해 레닌과 마르크스의 견해가 다르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마르크스와 달리 레닌은 사회주의를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전화된 형태로 보아, 사회주의 단계에서 국가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는 것으로 봤다고 주장한다. 그가 근거로 제시하는 레닌의 말은 《임박한 파국,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사회주의는 단지 국가자본주의적 독점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것이다. 또는 다시 말해 사회주의는 전 인민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게 된, 또 그러한 한에서 자본주의적 독점이기를 중지한 국가자본주의적 독점일 뿐이다.” 정 교수는 이 말을 근거로 “레닌이 노동자계급의 자기 활동, 자기 조직에 기초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개념을 일관되게 견지했다고 보기 어렵다”고도 주장했다.

먼저 마르크스와 레닌의 노동자 국가(“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 개념을 간단히 살펴보고 나서 정 교수의 견해를 비판하고자 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초기 국면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로 나아가기까지 이행기(과도기)에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국가(노동자 국가,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점차 소멸돼 갈 것이다. 그러나 과도기에는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에 대해 지배를 행사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레닌은 《임박한 파국,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1917년 9월 중순에 썼다. 그때는 내전이 임박했을 때였다. 그는 내전 중에는 주요 산업들을 노동자 국가가 통제할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국가의 독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사회주의”라는 그의 표현은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의 초기 국면으로서 사회주의가 아니라 노동자 국가를 뜻했다. 노동자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가 바로 그것의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혁명 성공 즉시 무계급 사회를 이룩한다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 교수는 용어 사용의 문맥도 파악하지 못한 채 레닌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관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다섯째, 정성진 교수는 레닌이 말년에는 협동조합의 확대를 통한 사회주의 건설 경로를 제안했고, 이는 이전의 그의 주장, 즉 국유화와 계획의 확대를 통한 사회주의 건설 전망에서 상당히 달라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도 레닌의 사상에 대한 완전한 무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레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동조합을 통한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시도를 공상적이라고 비판했었다. 레닌주의에 관한 권위 있는 연구자인 닐 하딩은 이렇게 지적한다. “레닌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 협동조합은 공상적 사회주의의 가장 강력한 피난처 중의 하나다.” 1921년 1월에 쓴 《협업》에서도 레닌은 로버트 오언에서 비롯한 구식 협동조합 계획이 계급투쟁과 노동자 계급의 권력 장악을 근본적 문제로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공상적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이런 비판은 대기업이 자본주의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에는 더더욱 참말이다.

그런데 정 교수는 레닌이 협동조합을 새로 고민했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협동조합에 대한 그의 새로운 논의를 1921년의 신경제정책과, 심지어 더 나아가 시장사회주의와도 관련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정 교수의 주장은 이렇다. “신경제정책 시기 레닌의 협동조합 사회주의론은 … 시장경제 확대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고, … 제2차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를 포함한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시장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봉사했다.” 시장사회주의는 1960~70년대에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 등의 전면적 국가자본주의 나라들이 경제 위기에 직면해 부분적으로 시장(특히 ‘자율경영’)을 도입해 위기를 해결하고자 한 시도로, 지역간·인종간 분열만 낳으며 실패했다.

그러나 레닌은 신경제정책 이전 시기에도 노동자 국가 하에서의 협동조합 설립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1918년 3월에 작성된 《’소비에트 정부의 당면한 과제’ 문건의 원판》에서 레닌은 이렇게 지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은 섬으로서의 협동조합은 소상점이다. 토지가 사회화되고 공장들이 국유화된 사회에서 협동조합이 사회 전체를 모두 포괄하면 그것은 사회주의다.” 1921년 1월에 쓴 《협업》에서도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정치 권력이 노동자계급의 수중에 있고 이 정치 권력이 모든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이지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과제는 인구를 협동조합 사회들로 조직하는 것이다.” 따라서 레닌의 협동조합 논의는 노동자 국가의 존재와 생산수단의 국영화 현실을 전제로 한 주장으로 이해해야 한다. 특히, 《협업》에서 레닌이 협동조합을 지지한 맥락은 신경제정책에 대해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신경제정책은, 내전을 거치면서 피폐화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후퇴였다. 이 후퇴를 견제하고자 레닌은 협동조합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래도 시장의 확대보다는 낫다고 봤던 것이다. 정 교수는 이런 정치적·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레닌의 협동조합 논의를 사회주의 건설 경로의 (‘시장사회주의’로의) 변질로 오해하고 있다.

비레닌주의적 공산주의의 재조명?

이처럼 학자로서의 엄밀함도 결여한 주장들을 걷어 내면 정 교수의 진의(眞意)가 드러나는 대목을 만나게 된다. 정 교수는 레닌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전위당이라고 주장”했고, 이는 레닌이 “대중을 주체가 아니라 전위당의 정치공학 대상으로 간주”했음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1917년 10월 혁명이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이 아니라 볼셰비키당의 쿠데타였다고 비난하는 진부한 통속적·통념적 주장과 겹쳐 보인다. 그러나 이 주장은 1917년 10월 봉기를 주도한 군사혁명위원회가 볼셰비키당의 기구가 아니라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기구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모순된다. 상식적인 주장들이 틀렸음은 비마르크스주의자인 역사학자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혁명의 시간》(교양인)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물론 정 교수는 더 나아가 이렇게 주장한다. “소비에트는 1920년대 말 스탈린 반혁명 이후가 아니라 이미 레닌이 집권했던 시기부터 노동자 인민의 다양한 층의 정책이 조율되는 포럼이 아니라 ‘당=국가 지도부’의 지시를 집행하는 행정기구로 전락했다.”(강조는 필자) 1917년 10월 혁명 직후부터 소비에트가 노동자 권력을 표현하는 기구가 아니라 당의 지배를 받는 하위 기구였다는 주장이고, 더 나아가 10월 혁명 직후 러시아에는 사실상 일당 지배적 억압 체제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 교수는 레닌이 “볼셰비키의 권력과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을 동일시”했고, 그 근거가 바로 《국가와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국가와 혁명》 어디에도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 즉 자신들의 행동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노동자 계급에 관한 개념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국가와 혁명》 어디를 봐도 정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정 교수 자신도 《국가와 혁명》의 어느 부분인지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율주의자 조정환 씨는 레닌의 저작 중 유일하게 《국가와 혁명》만이 정당의 구실에 대한 강조 없이 대중의 자발성을 강조했다며 그 저서를 반겼다.

정 교수는 결론으로 비(非)레닌주의적 공산주의를 복원하고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닌주의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나 노동자 계급의 자력해방 사상 등과 거리가 멀고,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생겨난 체제는 일당 독재 체제였고,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고, 아예 일국사회주의론이 스탈린이 아니라 레닌의 작품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정 교수가 재조명하고자 하는 ‘비레닌주의적 공산주의’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 귀결은 오히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좌파적?) 개혁주의인 듯하다.

사실 이 글에서 비판한 정성진 교수의 주장들은 일찍이 20여 년 전부터 그의 글에서 힐끗힐끗 비치듯이 선보였던 것이라고 노동자연대 운영위원 최일붕 씨는 필자에게 귀뜸을 해주었다. 그는 정성진 교수가 국가자본주의론을 ‘받아들였’던 때부터 가장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에르네스트 만델(그리고 콘드라티예프)의 장기파동론, 데이비드 고든 등의 사회적 축적구조 이론 등등 ‘마르크스주의’ 학계의 유행을 필사적으로 좇으며 자신이 아카데미의 품위 있는 학파들에 속해 있다는 외양을 한사코 취하려 애썼다고 술회했다. 또한 그는 정성진 교수는 알튀세르를 비판했어도 사실상 알튀세르의 핵심 문제점인 ‘이론과 실천의 분리’를 일관되게 실행했던 진정한 학술주의자였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십년 간 정 교수는 “초좌파에 속했지, (좌파적) 개혁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려웠다”면서, “그가 최근 변했다 해도 그는 ‘좌파적 개혁주의자’라는 라벨에 걸맞지 않은 그냥 학문적 명성을 추구하는 교수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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