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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탈핵을 60년 뒤로 미루다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핵발전소는 노동계급 전체의 안전에 엄청난 위험이다 ⓒ이윤선

사상 최악의 폭염 속에서도 전력 설비예비율은 1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핵발전소를 계속 짓지 않으면 전력 위기가 올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 것이다. 보수 언론은 정부가 기업주들에게 전력 사용을 줄일 것을 지시한 결과라며 흠집 내기에 열을 올리지만 군색하기 짝이 없다. 오히려 이는 그동안 전임 정부들이 전력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조처도 취하지 않고 전기요금 인상으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전가해 왔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정작 문재인 정부는 집권 세 달 만에 사실상 ‘탈핵’ 공약을 거둬들였다.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모두 중단하겠다고 공약했지만, 건설 중인 핵발전소 다섯 개 중 두 개만(신고리 5·6호기) ‘일시 중단’하는 것으로 축소됐다. 그조차 최종 중단 여부는 공론화위원회에서 ‘사회적 논의’를 거쳐 결정하겠다고 물러섰다. 최근에는 이른바 ‘출구전략’이 논의되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면”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재개하고, 대신 노후원전 1~2기를 폐로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문재인은 보수 언론과 자본가들의 탈핵 반대 입장을 비판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은근슬쩍 신규 핵발전소 가동을 기정사실화 했다. “지금 건설 중인 신고리 4호기, 신한울 1·2호기 모두 수명이 60년이라 이것만으로도 원전은 2079년까지 가동된다. 앞으로 60여 년간 서서히 줄여나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

60년 뒤에 약속을 지키겠다니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60년 뒤면 문재인은커녕 민주당도 남아있을지 모르는데 도대체 누가 책임을 지겠다는 것인가. 무엇보다 이는 앞으로 60년 동안 후쿠시마 사고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기도만 하고 있으라는 얘기다. 후쿠시마 핵발전소도 깐깐하기로 이름난 일본에서 모든 ‘안전성’ 검사를 통과했다. ‘안전한’ 핵발전소는 없다. 수백만 분의 1의 확률일지라도 한번 사고가 나면 수세대에 걸쳐 사실상 영구적인 피해를 남기기 때문이다.

안전한 핵은 없다

탈핵 공약 후퇴를 우파의 반발 때문인 듯 정당화하는 문재인의 주장은 진보·좌파 진영의 비판을 단속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개혁을 재촉하고 비판하면 도리어 우파에게 힘을 실어줄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이는 매우 낯익은 수법인데 노무현 정부도 이런 식으로 진보 · 좌파 진영을 단속하려 했다. 당시 일부 NGO 리더들과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이런 논리를 수용해 ‘개혁’ 정부에 비판을 아꼈지만, 그 결과 돌아온 것은 이라크 파병, 노동법 개악, 한미FTA 추진 등이었다. 정작 노무현 자신이 약속한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 개혁, 검찰 개혁 등은 우파의 반발에 밀려 스스로 꼬리를 내려버렸다.

자본가들에게 기반을 둔 정당인 민주당(비록 자본가들의 제2선호정당일지라도)이 자본가들의 이익을 거스르는 것은 오로지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정권 자체에 위협이 될 정도로 클 때뿐이다. 그러므로 자본가 정당들 중 어느 한 편과 동맹을 맺는 전략은 운동을 자기제한적으로 만들어 오히려 승리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예컨대 노무현 정부의 핵폐기장 건설 시도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벌인 부안에서는 이를 막아냈지만, 주민투표 같은 ‘사회적 합의’로 결정하자는 정부 논리를 수용한 경주에서는 맥없이 패배했다.

따라서 최근 일부 환경운동 리더들이 문재인 정부를 정면 비판하기를 꺼리는 것은 우려스럽다. ‘문재인이 아니라 산자부 관료, 핵산업계와 싸워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이 선출된 대통령의 지침에 저항하는 일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는 정부의 ‘개혁’ 의지가 분명할 때 고려할 일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문재인은 저항에 부딪히기도 전에 스스로 탈핵을 먼 미래의 일로 미뤄버렸다. 핵잠수함 도입 추진에서 보듯 한국의 핵기술 개발에 의욕을 갖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문재인이 아니라 관료들이 문제라는 주장은 부적절한 문재인 변호론일 뿐이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산자부 관료들과 핵산업계의 반대 때문에 탈핵을 밀어붙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문재인에게 ‘탈핵’ 의지가 없다고 비관적이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탈핵 여론은 과거 어느 때보다 높다. 사실 문재인 정부가 말로나마 탈핵을 약속하게 된 것은 이런 압력이 크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탈핵 운동 진영은 문재인의 ‘개혁 정부 vs. 핵마피아’ 프레임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기층의 압력을 조직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후퇴를 폭로하고 항의하는 것은 그 필수불가결한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