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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이 글은 99·00학번 교육 캠프에서 발표한 연설문이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또는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학생 정당’을 건설하려 하는가? 두루 알다시피 정당은 정치 권력 장악을 위한 수단이다. ‘학생 정부’란 있을 수 없으므로 ‘학생 정당’도 있을 수 없다.

학생은 계급이 되기 전의 존재다. 학생 중 극소수는 장차 기업인이나 정부 고위 관료와 같은 지배 계급에 속하게 될 것이다. 나머지 학생 중 일부는 중간 계급에 속하게 될 것이고, 그 나머지는 노동 계급에 편입될 것이다. 노동자가 되는 사람들은 소위 사무나 서비스 부문에 종사하게 될 공산이 크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로 말하자면, 아마 거의 다 노동 계급에 속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동지들이 노동자가 되든 지식인이 되든 별 관심이 없다. 내가 진짜로 관심을 갖는 것은 동지들의 미래 직업이 무엇이든 동지들이 노동자 정당 건설에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방금 나는 ‘노동자 정당’ 건설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나나 동지들이나 우리 모두 노동자 정당에 들어와 있고 이것은 우리가 노동자 정당 건설을 지지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단순 명료하게 사고하지는 않는다. 노동자 계급이 사회 변화에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사림들도 우리 당에 들어와 있고 심지어 우리 학생 그룹에도 들어와 있다.

그 동지들에게는 좀더 복잡하고 미묘한 생각이 있겠지만, 나는 노동자 운동 중심성 명제를 당연시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얘기하겠다.

노동자 운동에 대한 효과적 개입

노동자가 아닌, 학생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이 노동자 정당 건설에 헌신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마르크스·엥겔스·레닌·트로츠키·로자 룩셈부르크·안토니오 그람시 등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1]들은 지식인들이었지만 노동자 운동 쪽으로 ‘넘어왔다’. 즉, 마르크스·앵겔스 등은 지식인이었는데도 중간 계급의 운동과 중간 계급의 조직을 건설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 운동과 노동자 정당 건설에 매진했다. 왜 그랬는가? 마르크스와 엥겔스 등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건 노동자 계급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학생 그룹의 압도 다수는 학생 운동보다 노동자 운동을 중시해 왔다. 물론 우리는 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다른 학생 개인이나 단체가 우리와 함께하기를 촉구해 왔고 그 결과가 바로 지난 1년 동안의 성장이었다. 지난 1년간 새로 3백 명 가량이 우리에게 합세했다.

이렇게 우리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실제 현실에서 지난 한 해 동안 노동자 운동이 다른 운동에 비해 중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성장은 노동자 운동의 성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되기 위해서는 노동 운동이 잘 돼야 한다. 노동 운동이 잘되려면 우리가 노동 운동 에 ‘참견’할 필요가 있다. 이를 두고 우리는 ‘개입’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노동 운동이 이렇게 이렇게 돼 왔고 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될 것이라는 분석과 전망 또는 관측만이 아니라, 이렇게 이렇게 돼야만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하고 ‘주제넘게’ 끼어들어 ‘간섭’해야만 한다.

학생은 노동자 투쟁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노동자 편에서는 노동자주의의 발로이고, 학생 편에서는 ‘정체성 정치’의 발로이다. ‘정체성 정치’란 학생은 학생 운동 하고, 여성은 여성 운동 하고, 동성애자는 동성애자 운동 하고, 흑인은 흑인 운동 해야 한다는 식으로 각자의 신분에 따라 각개약진하는 부문운동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정치적 관점이다.

이것은 잘못된 태도다. 중요한 노동쟁의가 일어나면 다른 기업주들과 언론과 정치인들과 심지어 때때로 정부 관료들이 한 마디씩 거들며 해당 기업 사용자 편을 든다. 우리의 적은 노동자 투쟁에 대해서는 잘 되든 안 되든 서로 단결하려 애쓰는데, 정작 우리 자신은 서로 오불관언의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각개격파당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개입의 필요성은 연대의 필요성에서 나온다.

지금까지 얘기한 바를 종합하면, 우리의 성장은 노동자 운동에 개입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물론 효과적으로 개입해야 성장한다.

투사와 활동가들을 조직하기

가장 효과적인 개입은 투쟁이 승리할 수 있는 방법(전술)을 제시하는 것이다. 가령 지난해 연말 은행 파업 때 우리는 파업이 승리하려면 경찰의 농성장 침탈 자체를 막아야 한다고, 막기도 전에 흩어질 생각부터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지금 우리는 기대했던 진정한 개혁을 폐기하고 그 대신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이라는 사이비 ‘개혁’을 민중에게 강요하는 정부의 지도자를 분명히 거부한다는 뜻에서 김대중 퇴진을 진지하게 주장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이를 가능케 할 방법은 대중 파업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학생들만으로는 개입이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예를 들어 보자.

대우차 해외매각 문제에 대해 노동 운동 진영은 단순히 해외매각 반대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처럼 공기업화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소수 있다. 실제로 대우차의 가장 큰 지분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소유하고 있다. ’법률상’은 아닐지라도 ‘사실상’의 공기업이 이미 돼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기업화를 해외매각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전혀 비현실적인 제안이 아니다. 또, 우리처럼, 공기업화를 강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도로서 공장 점거 파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소수 있다. 지난 2월 말 농성 때엔 공장 점거를 통한 공기업화라는 주장이 커다란 지지를 얻었다.

만일 대우차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 이런 사람들이 조직돼 있고 노조 집행부가 동요로 말미암아 일을 망쳐 놓지 못하게 할 수 있을 만큼 단호하고 경험이 풍부하다면 얘기는 다를 것이다.

동료 노동자들 사이에서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고 계급의식(근본적 사화 변혁의 필요성과 그것을 성취 하는 방법에 대한 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수천 노동자들이 조직될 필요가 있다. 사실, 작업장 수준에서 노조 조직이나 기타 형태의 조직을 유지하고 있는 수 천의 활동가와 투사 들이 있다.

문제는 이들의 정치가 마르크스주의와 별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주체사상, 각종 개링주의, 노동조합 운동 지상주의 등등).

이들에게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설득하는 방식은 종파적 설교와 같은 것이 아니어야 한다. 오히려 그들의 경험과 그들의 “모순된 의식”(그람시)에서 출발해, 그들 스스로 일관된 변혁적 정치 의식을 갖도록 도와 줘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노동자 운동의 경험에서 교훈을 추출할 줄 알아야 한다.

이 교훈은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일어나고 있는 노동자 투쟁에 직접 동참해 얻은 것이 가장 생생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교훈은 또한 역사적이고 국제적인 경험에서도 얻을 수 있다. 가령 우리는 1968년 프랑스, 1936년 프랑스, 1936~37년 스페인, 1923년 독일, 1917년 러시아, 1871년 파리, 1848년 유럽, 1838~42년 영국 차티스트 운동 등등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동자 운동뿐 아니라 1백60년에 걸친 세계 노동자 운동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은 집단적으로 토론해야 한다. 오직 집단적 토론을 통해서만 학생과 노동자 투사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서 효과적인 이념 무장을 할 수 있다.

이론·실천·조직

이런 계급 의식적인 투사들과 활동가들을 조직하기 위해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한가?

첫째, 공통의 정치적 관점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정치 문제들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 수준이 있어야 한다. 가령 자본주의를 개혁할 수 있는지, 왜 사회의 근본이 변혁돼야 한다는 것인지, 과연 그게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 사회주의는 노동자 민주주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 진정한 사회주의는 국제주의적이라는 점,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여성 억압·동성애자 억압·유색 인종 억압에 반대해 투쟁해야 한다는 점 등등의 문제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것은 공동 행동 속에서 이견을 좁히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여기 있는 동지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하자면, 서로의 주장과 생각에 대해 토론하기를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어떤 동지들과 MD 반대 투쟁을 한다고 하자. MD를 반대한다는 공감대로 모인 사람들과 “MD에 반대한다”는 얘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90퍼센트의 지지와 함께 10퍼센트의 차이에 대해서도 우호적으로 토론해야 한다. MD를 군수산업체의 음모로 보는 견해에 대해 우리가 제국주의론에 대해 배운 것을 적용해 얘기해야 한다.

서로 관계가 나빠지거나 기분이 상하지나 않을까 해서 논쟁하기를 회피한다면 우리는 이견을 좁혀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상대방의 주장에 처박히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의식 수준을 높여야 한다. 예컨대 노동계급 중심성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 내려 노력해야 한다.

둘째, 실천에 관해 합의해야 한다. 공개 집회의 개최, 간행물의 판매 필요성, 투쟁 참가, 서명·모금의 의의 등등에 대해 기본적인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각 지부의 토론이 불균등해, 어디서는 웬만큼 합의가 형성됐고 다른 데서는 그렇지 못한 상태다. 솔직히 말해, 토론보다 행동이 앞선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앞으로는 더 많이 실천 활동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

셋째, 당면 과제에 대한 민주적 토론과 논쟁과 함께 실천적 결정을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조직 구조를 세워야 한다. 이 분야도 많이 진척됐다고 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도 앞으로 많이 토론하자.

요컨대 이론·실천·조직, 이 세 가지가 한데 어우러져야 사회 근본 변혁을 지향하는 노동자·학생 투사들을 우리가 끌어당길 수 있다.

우리는 간혹 활동은 매우 활발한데 저널의 판매는 부진한 지부를 본다. 이 지부와 동지들은 열정을 다해 활동하다가 그 게 끝나고 나면 한동안 ‘이제 할 일 이 뭐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모든 동지들이 〈다함께〉 판매를 일상적인 자신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서너 부 정도를 정기적으로 판매할 사람을 마련해야 하고 이를 통해 우리 주변으로 묶어 둬야 한다.

우리는 일반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아마 여러분이 속한 대학 지부의 모임은 1부 정치 토론, 2부 활동 토론으로 이뤄질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 지부가 있다면 그 지부는 곧 어떤 종류의 문제를 낳게 될 것이다. 1부만 하면 이론 얘기만 하고 싶어서 나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활동, 활동”만 하다보면 비정치적으로 될 우려가 있다.(우리 학생 그룹은 그 동안 활동을 일반화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우리가 성장하고 단단해지려면 당원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동지들을 밖으로 떠밀어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게 하고, 저널을 판매하게 해야 한다.

생각이 정말로 다른 사람들과 토론해 봐야 어떤 문제를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저널 판매가 중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함께〉를 읽고 “김대중 퇴진 투쟁을 하면 한나라당만 좋은 일 아니냐?”고 말하면 이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이런 토론을 하는 것은 학교에서 또는 사회에서 우리가 지지하는 노동계급 중심성이나 사회 근본 변혁의 필요성 등을 자신있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기 위해서다.

지도의 관점

여러분들은 조직 안에서 그저 지도받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 지도해야 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여러분들이 학생 그룹 밖 사람들과 연관을 맺으라는 것이다. 여러분 개개인이 지도하지 않는 한 우리 학생 그룹도 지도할 수 없다.

변혁 정당은 투쟁 속에서 건설된다. 그러나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투쟁이 기름진 토양을 제공하는 것은 맞지만, 우리가 조직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때만 결실을 거둘 수 있다.

우리는 학생·노동자 투사들과 활동가들의 투쟁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에서 제기될 문제들 모두에 답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 변혁적 활동가들의 그런 조직을 건설하는 것을 향해 수수하지만 진정한 발걸음을 뗐다.

우리 다함께 이 과제에 정진하자. 우리에겐 쟁취해야 할 미래가 있다.


[1]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는 다르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다 그 이후의 스탈린주의(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호찌민 등)를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전혀 다르고 서로 적대적인 둘을 한데 아우르는 것은 부적절하다. 전자는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핵심적 중요성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실행했던 반면에, 후자는 어설프게나마 주장은 했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다. 후자에서 노동자 계급을 대신한 것은 당·국가의 관료였고, 특히 마오와 호찌민의 경우엔 농민이 혁명 과정에서 당 ― 지식인 간부들이 지도하는 ― 을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