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편집자가 선배 편집자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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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 동안 장례를 무사히 치르고, 이승민 동지 자리가 아직 그대로 있는 사무실에 다시 들어왔다. 나이를 먹을수록 장례식장에 드나드는 일이 잦아져 제법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그곳은 낯설고 무겁고 차가웠다. 다행히 그와 함께한 많은 동지들이 찾아와 시끌벅적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억해서인지, 산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은 듯했다.
나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2년간 이승민 동지와 함께 책갈피 출판사에서 책을 편집하는 일을 했다. 그 전에도 종종 이곳을 출입하면서 책 번역이 난생처음이던 내가 곡절을 겪을 때 요모조모 조언을 듣기도 했지만, 그 2년이 그와 내가 공유하는 가장 짙은 기억일 것이다.
몇몇 편집자들이 새로 들어와 좌충우돌 편집 일을 배우기 시작했을 즈음, 이승민 동지는 이미 베테랑 편집자를 향해 내달리며 여러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 외래어 표기법 이거 왜 이리 어려운 거야!” 하며 후임자들과 잠시 편집 교육을 받았던 걸 돌이켜 보면, 늘 자기 능력에 물음표를 던지며 갈고닦기를 주저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2017년 초인가, 이승민 동지가 여러 해 고생하며 편집한 《계급, 소외, 차별》이란 책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갓 편집 교육을 이수한 나는 이런저런 초보적 업무를 하던 와중에 그에게서 교정을 마친 원고를 한번 읽어 봐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제 눈에 딱히 보이는 게 있을까요?” 하며 살짝 망설였지만, 그는 “여러 사람이 돌려 볼수록 글은 더 좋아지기 마련이에요” 하고 용기를 줬다. 그가 문장 하나하나를 윤문하는 데 탁월했다는 점을 그때 교정지를 읽으며 깨달았다. ‘뭔 글이 이렇게 술술 잘 읽히는겨(평상시 내 말본새가 이렇다)?’
그러고는 이따금 내 의견을 적어서 그에게 전달했고, 그는 내 연필 자국을 빠짐없이 검토해 최대한 반영하려고 애썼다(내가 잘못 바로잡은 걸 알려 주는 데도 시간이 꽤 들었다). 동료들과 토론하며 하나라도 더 배우고 가르치려는 태도가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대충 넘어가는 데가 한 군데도 없었던 걸로 보니, (나도 의견을 적으며 마음을 졸였지만) 어찌 보면 그도 자기 실력이 들통(?)나는 걸 넌지시 두려워했겠다 싶다. 때마침 기억나는 건,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아니, ‘담배를 피다’가 아니라 ‘담배를 피우다’였어? 헐 … ” 하며 놀란 장면이다. ‘이런 거라도 도움이 돼서 다행이다’ 하고 내심 흡족했다.
‘피다’가 아니라 ‘피우다’였어?
그 직후 우리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붉게 타오른 1917》이라는 만화책을 펴냈다. 이때도 이승민 동지는 특유의 집요함과 감각을 잘 활용했다. 만화책 분야는 우리에게 황무지나 다름없었고, 따라서 평소와 달리 온갖 구어체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어야 하는 난관을 뚫어야 했다. 한 동지의 조사(弔詞)에 언급된 “철의 규율”과 “작업의 고통”은 어쩌면 이때와 제일 잘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나는 그가 사무실뿐 아니라 자기 집 서재에 앉아서도 전력투구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됐고, 아무튼 그는 ‘또’ 해냈다. 아직 그 책을 읽어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승민의 진가를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꼭 권하겠다. 교정지가 남아 있다면 전시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2017년 여름, 출판사는 동시에 6권의 책을 내야 하는 험난한 시험대에 올라가 있었다. 이승민 동지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성차별, 성폭력》이란 책을 편집하고 있었다. 이미 《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의 전망》 같은 책들을 번역하고 편집한 경험이 쌓인 그는 차별 문제를 다룬 원고를 믿고 맡길 수 있는 편집자였다. ‘이번에도’ 그는 해냈다. 게다가 자신이 번역하고 편집한 책의 저자(영국의 실라 맥그리거)를 출간 직후에 만나서 책을 손에 쥐어 줄 때, 그 기분은 어땠을까? 짜릿짜릿했을 테다.
그때 나는 신입 편집자 처지에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두꺼운 책을 맡고 있었는데,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1917년 러시아 혁명》이었다. 모든 출판사 성원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꾸역꾸역 일을 진척하고 있었는데, 애초에 편집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것이 막판에 드러났다. 기한이 정해진 책을 이제 와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며 대책 회의를 하는데, 난데없이 그가 눈물을 쏟아 냈다. ‘그리 유쾌하고 야무진 사람한테 웬 눈물이여?’ 자못 신통한(?) 광경이었다. 그는 사실 신입 편집자로서 겪을 쓰라림에 공감했던 것이고,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며 나를 걱정했던 것이다. “그때 참 고마웠다”는 말을 이 글에다가 내뱉는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2017년 말 트랜스젠더 문제가 떠올랐을 때, 책갈피 출판사는 한국에 거의 유례없는 책이 될 《트랜스젠더 차별과 해방》을 펴내기로 한다. 편집은 누가? ‘또다시’ 이승민 동지의 몫이 됐다. 마침 책이 인쇄돼 세상에 나온 날, 우리는 출간 기념 강연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로켓배송’을 할 수 있었다. 부랴부랴 멀리 파주에서 책을 가지고 온 내게 “고생하셨다”며 자랑스럽게 책을 펼쳐 보던 장면이 눈에 훤하다. 강연 도중 책의 엮은이가 도움을 준 분들을 소개할 때 그의 공로도 빠뜨리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씨익 하고 짓던 그 얼굴을 기억한다. ‘아, 편집자, 이래서 할 만한 거구먼!’ 마음속으로만 외쳤다.
“좋은 책 많이 만들어 주세요!”
그의 투병 생활 10개월 동안 출판사 성원들은 ‘멘붕’ 상태를 소리 없이 감춰 가며 7종의 책을 냈다. 그중에는 이승민 동지의 마지막 완성작이 된 《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도 있었다. 이번에도 책을 가지러 파주에 갔을 때, 나는 따끈한 책을 사진으로 찍어 가장 먼저 그에게 보내 줬다. “우와~~ 빨리 봤음 좋겠네요^^ 빠른 소식 감사!” 이게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메시지가 될 줄이야.
투병에 집중하라고 아무리 얘기했다 한들 그는 후배 편집자들이 자꾸 눈에 밟혔을 것이다. 아직 배워야 할 게 산더미인 사람들에게 더 전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했을 것이고, 당장 출간 일정에 차질이 생겨서 걱정했을 것이다. 그가 지난해 말 투병 이후 처음으로 출판사에 방문해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신 적이 있다(스팸을 참 좋아한 듯한데, 그날도 메뉴는 부대찌개였다). 우리는 평소처럼 웃으며 요새 돌아가는 상황을 공유하고 볼품없는 농담도 주고받았다.
당연히 이 끔찍이도 안타까운 상황에 몸 둘 바를 몰랐지만, 나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여!’ ‘1퍼센트도 확률은 확률잉게!’ 하고 생각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정말이지 악착스러운 성품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만 같았다. 그날 헤어지면서 이승민 동지는 우리에게 이런 인사말을 건넸다. “좋은 책 많이 만들어 주세요!” 그때는 그 말이 투병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그러라는 것으로 들렸다. 이제 와서 보니 짐짓 자신의 결말을 인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왜 “좋은 책 많이 만듭시다!”가 아니었을까? 비통할 따름이다.
아직도 출판사 채팅방의 관리자는 ‘이승민’으로 돼 있다. 그가 투병 중에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는 올 초 풀무질 서점 폐업 소식이었다. ‘으이그, 으이그, 투병에나 집중하라니께!’ 이제는 이런 다짐을 하는 수밖에 없겠다. “당신 몫까지 다 하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부지런하고 몇 배는 더 뛰어난 사람이 돼야 해요. 꼭 그렇게 할게요.”
에피소드 1) 그가 가끔 사무실에서 내가 신은 양말을 보고 놀려 댄 적이 있다. 평소 아침에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양말이나 집어 신던 내가 나와는 너무 안 어울리는 ‘귀요미’ 양말을 신고 있었나 보다. 웃어 넘기기 일쑤였지만, 어느 날 그가 내게 사과를 했다. 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사과를 듣고 나니, 돌연 ‘이 양반, 참으로 섬세헌디 관찰력도 일품일세!’ ‘솔직하게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구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피소드 2) 그가 출근을 하던 때, 그와 그의 파트너(김종환 동지인데, 내 유능한 번역 멘토 가운데 한 명이다), 그리고 출판사 성원들은 자주 집에서 싸 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평소 소식(小食)을 즐겨 한 그는 그가 보기에 무지막지한 내 밥통 크기를 보며 놀라곤 했다. ‘이거 워쩐댜, 밥을 덜 묵어야 하는겨’ 하고 생각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밥 먹는 속도를 맞추는 센스를 발휘해 서서히 내 밥통에 무뎌지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이제는 그 경악이 “밥을 적당히 규칙적으로 드셔야 건강해집니다”로 들린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이것마저도 고인의 뜻이라 생각하고 기려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건강해야겠다.
에피소드 3) 나는 그의 독특한, 또 뭐랄까 … 아, 모르겠다. 하여간 생기발랄하고 톡톡 튀는 말씨를 못마땅하게 여긴 적이 있다. ‘헐! 내가 왜 말씨만 듣고 그랬던겨?’ 등잔 밑이 정말로 어둡기는 한가 보다. 다른 동지들의 조사를 보며 새로 알게 된 그의 ‘화려한’ 경력에 너무 놀랐다. ‘평소에 자기 자랑 좀 허시지!’ 생각해 보니 그는 신입 편집자들의 관성(또는 나태함)에 도전하려 한 드문 선배 편집자였다. 기든 아니든 그 토론이 아니었다면 내 성장의 속도도 그만큼 늦어졌을 것이다. 내게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 특유의 명랑한 태도와 서슬 퍼런 지적도 불사하는 진지함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았다는 점이다. 천만번 후회해도 모자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부딪히고 배우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았다. 그는 존재 자체로도 내가 가야 할 길을 미리 닦아 준 소중한 동지였다. 아까 말했듯이, 그는 궁금한 게 생기면 수시로 벌떡 일어나 질문을 하고야 마는 철두철미한 동지이기도 했다. 왜 이런 귀감을 ‘죽음’이 가르쳐야 하는 건지 너무 야속하지만, 꼭 그처럼 ‘해내는’, ‘하고야 마는’, 그런 편집자가 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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