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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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와 통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현실로 만들고 있는 인터넷은 우리의 노동과 삶을 크게 바꿔 놓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던컨 블래키는 이미 10년 전에 되물었다. 과연 누가 인터넷을 지배할 것이며, 누가 거기서 이익을 얻을 것인가? 이 글을 읽으면 자율주의의 ‘제국’론이나 ‘다중’론의 이론적 전통이 무엇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혁명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혁명가라고 보기 힘든 미국 부통령 앨 고어의 말이다.
머지 않아 인터넷이 우리 생활 분야를 모두 바꿀 것이라고 한다 ― 교육에서부터 노동의 편제 자체에 이르기까지. 전선을 따라 흐르는 신호가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오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으로 진입이 이용자들 간의 물리적 익명성 덕분에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없앨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터넷은 컴퓨터들의 세계적인 연결망 체계로서,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어느 컴퓨터 사용자나 그것을 통해 다른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하게 보자면, 인터넷은 통신 링크들의 세계적 집합일 뿐이다. 이 체계를 이루는 물질적 요소들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생활 속의 물건들 ― 전화선과 컴퓨터 ― 이다.
하지만 인터넷이 그토록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이유는 이 네트워크가 지금껏 수천 가지 비공식적 수준에서 거의 자생적으로 조직됐다는 데 있다. 대기업이나 정부들이 주도하지 않았는데도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정보 뱅크나 게시판처럼 서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정보와 상상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수단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발명에는 분명 잠재적 혜택이 존재하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잠재력을 실현하고 있다. 또한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방대한 양의 지식들이 예전에는 그것에 접근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용 가능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대영도서관의 정보를 모두 조잡한 컴퓨터 한 대로 열람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듯하다. 컴퓨터를 보유하지 못한 사람조차 모바일 도서관의 스크린을 통해 무궁무진한 배움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 대한 열광이 쏟아져나오는 배경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정치 이론들마저 네트워크라는 생각을 중심으로 짜여지고 있다. 특히 서구 공산당 출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이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이 모든 정보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 자본주의의 억압은 끝장날 것이라고 한다. 집단적 노동이 사라지는 것도 시간 문제다. 누구나 직장 대신 집에서 [컴퓨터로] 메시지도 주고 받으며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들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정보 공유가 민주주의를 낳는다는 생각은 불평등과 고통이 무지에 의해 유지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해방을 위한 투쟁은 언제나 정보에 대한 접근이 중요한 관건이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우리의 지배자들이 권력을 유지하고 우리 삶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부를 생산하는 수단을 소유하고 지배하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 그러한 지배권을 장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조직력과 자신감 미비라는 서로 연관된 두 가지 요인이다.
물론 인터넷은 리플릿이나 토론회와 마찬가지로 조직화의 기술적 수단을 제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더 많은 승리를 거두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경험과 자신감을 얻는 길은 오직 행동뿐이다.
인터넷 예찬론의 두번째 오류는 신기술이 노동의 양식에 끼치는 영향을 과장하는 것이다. 컴퓨터 기술이 진전할 때마다 이와 비슷한 주장이 거의 예외 없이 등장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로봇이 노동자들을 대체할 것이라는 얘기가 유행했다.
단기적이고 지역적인 수준에서는 신기술이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 이용됨에 따라 막대한 실업을 낳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터넷의 경우 재택 근무를 가능케 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사무실에서 집으로 분산시킬 위험마저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만이 이윤의 원천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노동력 착취는 여전히 이 체제를 떠받드는 원동력이다. 지금껏 정보기술 혁명은 많은 숙련 노동자들을 설계판 대신 스크린 앞에서 작업하게 만들었지만 막대한 비용에 비해 전반적으로 수익성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편, 맥도날드 노동자들은 구식 잔돈 박스 대신에 첨단 계산대를 두드리고 있다.
또한, 비록 재택 근무가 일부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주로 자기 회사에서 승진의 기회가 보장된 고수입 관리/기술직을 중심으로) 그 규모는 아주 미미하다.
이론상으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적어도 노동의 일부분을 집에서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반면에, 현실에서 규모 있는 회사의 사용자들은 누구나 현장 감독의 감시와 사무실의 규율만이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쥐어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 회의론은 여태껏 수구 꼴통들의 전유물이었다. 우익들은 인터넷에 아직 적절한 검열이 이뤄지고 있지 않으므로 대중이 이용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불평해 왔다. 하지만 인터넷을 둘러싼 진정한 쟁점은(다른 어떤 기술 진보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지만) 결국 누가 그로부터 혜택을 볼 것이냐는 것이다.
인터넷의 기원 가운데 하나는 간단한 문제에 대한 어떤 해결책이었다. 1970년에 여러 섬에 흩어져 있는 하와이대학교 건물들의 컴퓨터를 서로 연결시키기 위한 체계가 개발된 것이 그 발단이다. 컴퓨터를 통한 일상적 정보 교환이 처음 개발되고 활성화된 것은 학자들 사이에서였다. 같은 시기에 미국 국방부도 그러한 체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
컴퓨터의 확산, 그리고 마침내 채택된 공통의 통신 방식(TCP/IP 방식)은 네트워크의 성장을 촉진했다. 아직 인터넷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전세계 2만 5천여 개 네트워크들의 반(半)공식적 집합일 뿐이다.
미국에서 빌 클린턴은 어떻게 하면 인터넷의 혜택을 대기업들의 이익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지 강구하기 위해 정보 기간산업 태스크포스를 창설했다.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 초대형 전화통신회사인 AT&T 같은 기업들은 새로운 시장 개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단지 인터넷 상에서도 구독료 수입, 저작권, 제한된 접근권 등이 보장되기만 한다면 인터넷은 더할 나위 없는 시장이 될 판이었다.
그래서 전화 회사가 고객들에게 돈을 받고 인터넷 확장에 필요한 회선을 설치하는 것이 허용됐다. 축구 팬들은 예전에 공짜로 볼 수 있었던 방송을 보기 위해 이제는 케이블 또는 위성TV 회사에 수신료를 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대기업들은 인터넷의 약속을 물구나무 세우려 달려들고 있다. 정보를 유료화하려는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인터넷 자체가 기업들의 진입으로 범람 상태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터넷에 등록된 3천4백여 개 네트워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사기업 네트워크들인 반면, 교육 기관은 4퍼센트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사례는 매우 시사적이다. 역사상 이보다 더 두껍고 비싼 책은 없었을 것이다. 그 어떤 인터넷 찬양도 이런 책을 광섬유 케이블에 담을 수 없다면 온전한 찬양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비 테스트로 미국 학생들에게 이 백과사전 정보를 제공할 참이다 ― 항목마다 이용료를 지불한다면!
이처럼 자본주의는 이미 오래 전에 대형 출판사, 저작권법, 서점들이 인쇄된 지식을 상품화했듯이 전자 지식마저 상품으로 만들고 있다.
이 과정이 완결되려면 아직 멀었으며, 앞으로도 수많은 진지한 인터넷 사용자들은 정보의 자유로운 교환이라는 전통을 이어가며 시장 논리에 저항할 것이다.
그럼에도 대기업들은 이미 자신들이 막강한 경제력을 동원해, 규제 완화된 TV와 라디오 방송들에 촉수를 뻗쳐 자기 소유로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정보 초고속도로에도 통행료 징수소를 세우고 있다.
번역 천경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