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ㆍ16쿠데타 - 억압적 근대화 프로젝트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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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 2등 객차에서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이것은 1963년 박정희가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쓴 시다. 그리고 계속해서 ‘고운 손’을 가진 “전체 국민의 1퍼센트 내외의 저 특권지배층 … 에 대하여 증오의 탄환을 발사하여 주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에서도 드러나듯이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는 단순히 민주주의에 대한 반동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1961년 5월 16일의 군사 쿠데타는 4월혁명과 연속적인 측면과 동시에 단절적인 측면이 있었다.
연속적인 측면은 4월혁명이 제기한 과제 중 하나인 “자립경제의 발전”을 추진하려 했던 점이다. 물론 해결 방식은 반동적 방식 ― 위로부터 폭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식 ― 을 통한 것이었다.(박정희의 경제성장 전략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논란은 몇 호 뒤에 다룰 예정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조차 아니었다. 데이비드 콩드가 전하듯이 “시중의 다방 등에서는 모종의 군사 쿠데타에 대한 소문이 심상치 않게 나돌고 있었다.” 쿠데타 행동 개시 5시간 전에 이미 정보가 누설되고 있었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다고 판단한 박정희는 ‘거사’를 감행했다.
그는 해병대를 비롯해 3천5백 명의 병력으로 쿠데타에 돌입했다. 그러나 쿠데타는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총리 장면은 혜화동의 깔멜 수도원으로 피신한 채 두문불출했다.
박세길 씨는 이 쿠데타가 ‘미국의 사주와 음모’로 발생한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랬는지는 불확실하며, 사태를 일면적으로 보게 만들 수 있다. 어쨌든 미국은 장면 정권이 사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이 분명해지자 사실상 쿠데타를 방조했고 나중에는 승인했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장면 정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 국민들’ 때문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집권한 자유주의자들의 행태를 봤을 때 이것은 책임을 엉뚱한 데로 돌리는 것이다.
장면과 권력투쟁을 벌이던 민주당 구파의 대통령 윤보선은 미군의 쿠데타군 진압 제안을 거부하면서 쿠데타를 옹호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이 쿠데타가 장면을 밀어내면 자신에게 더 많은 권력을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방의 신민당사에서는 “이제는 우리 세상이 되었다”고 좋아했으며 만세를 부르기까지 했다.
진실은 민중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 게 문제가 아니라, 장면 정권이 민중의 변화 염원을 배신했다는 점이다. 자신을 지지한 민중의 개혁 요구를 배신하면서 지지 기반을 상실해 결국 의회 쿠데타에 직면했었던 노무현은 최근의 사례일 뿐이다.
민주당 정권은 4월혁명의 요구였던 부정축재자 처벌을 회피했다. 당시 부정축재자 처벌 요구는 사실상 자본가 계급 전체를 겨냥한 요구였다. 당시 자본가들 중 원조경제에 기생해서 귀속재산 불하 등 각종 특혜를 받지 않은 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북한 괴뢰에 이익을 주는 부정축재 처리가 되지 않도록” 민주당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이후 민주당 정부는 처벌은커녕 그들과 한 몸뚱이가 됐다. 그들은 7월 29일의 총선과 총리 인준 과정에서 부정축재자들에게서 막대한 정치자금을 받았고, 그 대가로 부정축재자들에게 막대한 규모의 은행 융자를 허용했다.
이승만 정권의 3월 선거부정을 주도하고 시위대를 학살한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도 미온적이어서 민주당 정부는 혁명 참가자들의 분노를 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정권이 민중의 삶을 개선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 경제성장률은 1958년의 5.5퍼센트에서 1960년의 1.1퍼센트로 계속 하락하고 있었다. 민중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1960년에는 완전실업자가 2백50만 명, 농촌의 잠재실업자 2백만 명 등 약 4백50만 명의 실업자가 있었는데, 이는 전체 노동인구의 45퍼센트에 달하는 수치다.
전체 농가의 74퍼센트가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조업 부문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1960년에서 1962년 사이에 줄고 있었다. 당시 1인당 실질소득이 겨우 80달러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 이상의 소득 감소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했다.
민중이 급진화할 만도 했다. 예를 들어, 혁신계가 주도한 1961년 3월 22일 시위에서는 “장면 장권 타도하자”, “미국놈들 물러가라”, “반공보다 빵을 달라”, “반공보다 직장을 달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쿠데타 직전 일부 학생집단과 혁신세력은 통일운동으로 전환하게 됐는데, 이 역시 자립적 민족경제의 수립만이 경제적 파탄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당시 남한보다 먼저 ‘민족 자립경제 수립’에 착수한 북한의 GNP가 3백25달러로 남한의 3.5배에 달했던 점을 보면 이해할 만한 주장이었다.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장면 정부를 위해 피를 흘리려 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을 정도로 민주당 정권에 대한 환멸과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한편, 4월혁명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사람들은 대체로 쿠데타를 조용히 관망하고 있었고, 이 쿠데타의 성격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했다. 미국 CIC(방첩대)의 보고를 보면 서울대 학생들의 군사 쿠데타 지지 여부는 50대 50이었다.
오늘날 비판적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진 리영희의 말이다. “나는 군인 통치 하에서 정치적 팟쇼화의 경향을 걱정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구악’(舊惡)이 매질당하는 것에 대한 후련함이 뒤섞인 평가 때문에 흔들리고 있었다.”
일부는 쿠데타를 지지했다. 유신체제 하에서 반정부 지식인으로 알려진 장준하는 당시 군사 쿠데타를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 … 를 타파하(는) …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고 평가했다.
좌파로 분류될 수 있는 일부 혁신계열의 반응도 비슷했다. 혁신계열의 대표적 신문 〈민족일보〉는 “이 획기적인 군사위원회의 혁명 과업 수행에 더 많은 영광 있기를 바”랐고, 5월 23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군사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들이 이런 혼란된 반응을 보인 것은 심각한 오류였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1950년대 제3세계에서 군부 내의 소장 그룹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민족주의적이고 개혁적인 경제발전을 도모한 것은 하나의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나세르, 버마의 네윈 등의 쿠데타가 대표적이었다. 혁신계열은 민족 자립경제 요구가 박정희의 쿠데타에 의해 수렴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정희의 ‘좌익 경력’이 이런 환상을 부채질했고, 이 때문에 미국도 박정희를 의심했다.
박정희는 말로는 자신의 쿠데타를 4월혁명의 연장선에 놓으려 했다. 그래야 4월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군사 정부는 깡패들을 “참회”시켜 거리를 행진하게 하기도 했고, “국가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사람들이 대낮에 춤을 춘 것은 용서할 수 없다”며 댄스홀에서 춤을 추던 남녀들을 체포하는 등 포퓰리즘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주요 기업인들 17명을 체포해, 그 가운데 10여 명에게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각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농민들에게는 연리 2할 이상의 고리채 일체에 대해 채권 행사를 일시 정지시키는 농어촌 고리채 정리 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쿠데타는 4월혁명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급속한 자본축적을 위해 아래로부터의 근대화 ― 노동자들의 연속혁명 ―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반동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쿠데타 당일 아침 “즉시 용공세력 분자를 색출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틀 만에 9백30명에 달하는 활동가들과 혁신세력들이 검거됐다. 검거는 계속돼 며칠 사이에 모두 4천여 명에 이르렀고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가 처형당했다.
미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박정희는 자신이 반공주의자임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실천했다.
한국노동조합연맹이 강제 해체되고 준(準) 국가기구인 한국노동조합총연맹으로 개조됐다. 중앙정보부가 창설돼 비밀경찰을 통해 지배하는 독재 정권의 기초를 마련했다. 재건국민운동본부를 설치해 국가 통제주의적 ‘인간개조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쿠데타 주도 세력의 71퍼센트가 중하층 농민 출신이었지만, 그들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즉시 자신을 지배계급으로 만들었다. 그것도 가장 잔인하고 위선적인 모습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