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체 게베라 평전》, 쟝 코르미에, 실천문학사:
체 게바라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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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열풍이 불고 있다. 실천문학사가 펴낸 《체 게베라 평전》은 출간된 지 겨우 두 달만에 2만 부 남짓 팔리면서 비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몇 주째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바라의 삶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게바라는 메이데이 집회 사수대 학생들의 손수건이나 티셔츠, 미국의 하드코어 록밴드 RATM의 기타 앰프에 나온 그의 사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게바라의 사상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전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1968년의 전지구적인 ‘신좌파’에 대한 박식한 개설서(Katsiaficas, 1987)에서 그의 이름보다 더 자주 언급되는 이름은 (철학자 마르쿠제의 이름을 제외하면) 없었다.”(《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 608쪽)
의사이자 게릴라 대장, 외교대사와 토지개혁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국립은행 총재와 산업부 장관 등 그야말로 ‘팔방미인’으로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1))는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0년대 초 의협심 강한 젊은 의학도였던 그는 남미를 두루 여행하면서 도처에 널린 빈곤과 기아, 질병을 목격했는데, 이때 받은 충격은 그의 사상을 급진화시켰다.
1954년 여행 도중 들렀던 과테말라에서 그는 쿠데타를 경험하게 된다. 토지개혁을 추진하던 정부에 맞서 미 중앙정보국(CIA)의 사주를 받은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였다. 그 토지개혁은 온건한 것이었지만 미국의 거대 농업기업 유나이티드 프루트의 이익에는 위협적이었다. 결국 쿠데타 뒤 새로 들어선 정부는 몰수됐던 모든 토지를 곧바로 옛 소유자들에게 돌려 주었다.
게바라는 사람들에게 투쟁하라고 촉구하면서 저항하려 했지만 오히려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정부가 쿠데타에 맞설 수 있는 무기를 민중에게 나눠주는 데 실패한 것이 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한 이유라고 결론지었다. 이 때 이후 게바라는 혁명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중국의 마오를 혁명가의 모범으로 여기게 됐다. 그래서 첫딸인 일디타를 ‘나의 작은 마오’라 부르기도 했고 훗날 쿠바 침공 때는 자신의 부대에 ‘로스 마오 마오’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1955년 게바라는 멕시코에서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다. 전직 변호사였던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26일, 학생 156명을 이끌고 쿠바 동부 산티아고의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으나 체포되어 15년 형을 언도받고 이듬해 특사로 풀려나 멕시코에 망명 중이었다. 카스트로는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1933년에 하사관으로서 군사 쿠데타에 성공, 참모장으로 승진하고 1940년 대통령에 취임하여 4년간 재임했다. 1948년 상원의원이 된 후 1952년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헌법을 폐지했다)의 부패한 정권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시작할 일단의 전사들과 함께 쿠바로 되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게바라는 군의관으로서 게릴라 부대에 합류하는 데 동의했다.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하고 과테말라의 쿠데타를 경험한 뒤였기 때문에 내가 독재자에 반대하는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그는 나중에 회상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 투쟁해야 한다는 것,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것은 절대절명의 과제였다.”
1956년 11월 25일 쿠바를 향해 출발한 82명의 반란군은 표류 끝에 간신히 쿠바 해안에 도착했다. 예정대로라면 5일 안에 쿠바에 잠입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일주일하고도 6시간이나 걸렸다. “따지고 보면 그건 상륙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건 좌초였다.”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이 무모한 작전의 악몽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멕시코에서부터 카스트로를 감시하고 있던 바티스타 정권은 당연히 미리 첩보를 입수한 채 기다리고 있다가 기진맥진한 반군에게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그 결과 살아남은 대원은 겨우 19명 뿐이었다!
그 다음 2년 동안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8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산악 지대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부대를 재건하고 게릴라 전쟁의 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게 된다.
게바라의 생각에 따르면 혁명은 소규모의 헌신적이고 부패하지 않는 게릴라 전사들이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혁명] 군대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주관적 조건이 무르익은 시골에서 창설되어 외부로부터 도시를 정복하기 위해 진격한다.”, “농민들은 정보원이자 간호사, 보급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사들이다. 농민들이야말로 진정한 전위부대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들의 대지에서 모든 병참술을 펼칠 수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시골의 농민들은 수동적이나마 게릴라 부대를 지원해 주었지만, 도시의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미덥지가 않았다.
1958년 초 카스트로는 전국적인 규모의 노동자 총파업을 계획했다. 그러나 당시 쿠바 공산당은 사태를 관망하며 중립을 지키는 수동적인 태도를 취했고, 결국 4월 9일 파업이 시작됐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파업 참여율은 30퍼센트에도 못 미쳤고 정권의 탄압은 거의 1백여 명에 이르는 지지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게릴라 투쟁 과정에서 쿠바의 노동자들이 했던 역할은 보잘것 없었다.
도시 노동자들의 투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카스트로는 그 해 8월 21일 전면적인 공세로 돌입했다. 이 때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가까운 관타나모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의 태도가 관건이었는데, 미국은 양편[바티스타와 카스트로]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무기 구입 약속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협상 테이블에서는 바티스타를 갖고 놀았다. 한편으로 CIA는 모종의 지원을 반군에게 제공하면서 … 은밀하게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카스트로의 혁명은 크게 워싱턴의 신경을 거슬르지 않았을뿐더러 바티스타의 실각은 어느 정도 환영할 만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미국의 버림을 받은 바티스타 정권은 모래성이 무너지듯 붕괴했다. 12월 초에 일부 장교들은 카스트로에게 반(反)바티스타 군사 쿠데타를 제의하기도 했고, “4백명이 넘는 정부군들이 채 130명도 되지 않는 반군들에게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행렬이 이어지는” 사태가 속출했다. 12월 말 산타클라라 전투에서는 장갑열차를 앞세운 4천 명 이상의 정부군이 346명에 불과한 반군에게 무릎을 꿇었다!
마침내 1959년 1월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쿠바 상륙 작전 뒤 25개월 만에 아바나에 입성했다. 옛 독재정권과 비교하여 새로운 정부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의료와 교육 개혁, 토지 재분배가 신속하게 시행됐다.
그러나 쿠바의 새 지도자들은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조직하기보다는 상명하달식의 국가 경제 개발 전략에 전념했다. 사실 그들에게 쿠바 혁명의 성격이라든가 이념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1961년 5월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뒤늦게 ‘선언’하고, 그 해 7월 쿠바 사회주의 혁명통일당을 조직했다. 그래서 1960년 쿠바를 방문한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파리에서 나는 쿠바 혁명의 목표가 사회주의의 건설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대답하지 못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 쿠바인들을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했다. 이제 그들이 나에게 대답할 수 없는 이유를 알겠다. 이 혁명의 근원은 바로 국민에게 결핍된 것을 메우려는 데 있었지, 선험적인 이데올로기를 빌려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발적 노동에 대한 열렬한 수호자였던” 게바라가 말한 “윤리적 자극제(moral incentives)”나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이 뜻하는 바는 사실상 쿠바의 노동자들에게 무보수로 노동력을 제공하라고 촉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쿠바의 노동자들은 이에 대해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었다. 1960년 쿠바를 방문한 샤를 베틀렝은 “대중의 요구를 민주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하는 어떠한 대중조직도 부재하다”고 말했다.
혁명 쿠바의 전권대사,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의 업무를 담당하면서 게바라는 수출용 설탕 생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쿠바 경제를 독자적인 생산 기반과 설비를 갖춘 자립 경제로 새롭게 발전시키고 싶었다. 당시는 미국이 쿠바 [경제]를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으므로 쿠바 정부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원 조달을 차츰 구소련에 의존하게 됐다.
그러나 소련조차 공산품 지원의 대가로 설탕을 요구했기 때문에 설탕 생산에 대한 쿠바의 의존은 커져만 갔다. 게바라는 쿠바 혁명이 국제적 지원을 얻지 못한다면 소련에 대한 의존이 증대하여 결국은 질식사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특히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면서 게바라는 소련이 쿠바에게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게 됐다. 서로 터키와 쿠바에 깔린 미사일을 거두라고 으르렁거린 흐루시초프와 케네디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쿠바는 한마디로 “재갈 물린 무력한 볼모” 신세였고,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꼴이었다.
마침내 게바라는 1965년 2월 알제리에서 소련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쿠바에서 멀어졌다. 1965년 4월부터 1967년 10월 죽을 때까지 게바라는 “사라져 버렸다.” 이 시기에 그는 아프리카의 콩고 ― 나중의 자이레 ― 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그 전투는 미국의 후원을 받는 세력들에 맞선 것이었으며, 게바라는 그것이 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을 확산시키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목표는 옳았다. 하지만 저항을 확산시키기 위해 그가 선택한 수단은 소규모 게릴라 집단을 구성하여 콩고에서 이미 싸우고 있던 사람들과 결합하는 것이었다. 작전 수행 과정은 전반적으로 위태로웠고 결국 완전한 재앙이었음이 입증됐다. 1966년 3월 게바라는 아프리카를 떠나 남미의 볼리비아로 갔다.
게바라가 볼리비아를 선택한 것은 미국의 남미 침략을 유발하여 전대륙에 걸친 혁명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었다. 그는 인구의 4분의 3이 전 국토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에 모여 살고 있는 볼리비아는 게릴라 전쟁의 거점을 마련하는 데는 안성마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조건들을 무시했다. 볼리비아는 대중적인 노동계급 투쟁, 특히 주석 광산 노동자들의 투쟁 전통이 풍부한 나라였다. 농민들은 토지 소유권을 새로 허가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 재선출된 정부의 평판은 좋았으며 군대는 국민 대중과 친근한 듯했다.
40여명의 전사들로 이루어진 게바라 부대는 6개월 동안 거의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볼리비아의 정글 속을 헤매면서 굶주리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1967년 10월 그들은 마침내 붙잡혔다. 미국에서 훈련받은 볼리비아 군인들은 게바라와 그의 동료들을 CIA 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냉혹하게 처형했다. 군인들은 게바라의 두 손을 잘라내고 전세계에 과시할 요량으로 시체 사진을 찍은 다음 땅에 묻고 무덤의 표시를 없애 버렸다.
미국은 게바라를 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의 혁명적 사상이 끼친 영향력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글머리에서 얘기했듯이 ‘혁명에 성공한 게릴라 대장’ 체 게바라는 한 세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많은 추종자들은 게바라의 투쟁 방법마저 본받았다. 한 세대에 걸친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가들은 대부분 그의 뒤를 따라, 미국이 후원하고 무장시킨 정권들에 대항한 게릴라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게릴라전이란 무엇보다도 혁명 투쟁의 중심지가 도시에서 농촌으로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애초 이 방법은 혁명가들이 군대와 경찰의 추적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을 고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투쟁의 사회적 내용 또한 달라진다. 게릴라가 되려는 노동자는 노동자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계급 전체나 그 대다수가 농촌 게릴라전에 참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 계급이 노동계급 대신에 혁명을 수행하는가? 바로 ‘농민’이다.
그러나 농민을 노동계급의 대역으로 삼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모순된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을 자신의 바탕으로 삼는다. 이 말은 혁명을 위해 노동계급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노동계급을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다시말해, 혁명이 노동계급의 도구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농민은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생산관계에서 비롯된 존재다. 농민은 결코 자본주의의 산물은 아니다. 만일 농민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급이라면, 지난 수천 년의 역사에서 어느 때라도 사회주의가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농민도 투쟁할 수는 있다. 그것도 아주 맹렬하게 투쟁할 수 있다. 하지만 농민은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며 관리하는 지도력을 제공할 수는 없다. 전투에서는 얼마든지 농촌이 도시를 이길 수 있어도, 전쟁에서는 그럴 수 없다. 생산력의 중심지인 도시를 농촌이 경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민이 전국적 정치 세력으로 결집하려면 농촌 밖의 도시에서 형성된 계급이나 계급 일부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마오, 카스트로, 게바라 등은 거의 전부가 도시 인텔리겐챠 출신인(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게릴라 간부들과 사령관이 지도를 맡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에게는 생산력 발전이나 혁명을 위한 객관적 조건의 성숙 따위는 의미없는 공염불에 그치기 십상이다.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모든 조건이 존재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봉기가 그러한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고 게바라는 썼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이 아니라 터무니없는 관념론이다. 이런 관념론의 사회적 뿌리는 남의 노동 덕분에 먹고 사는 처지에 자기네 생각이 사회의 핵심 요소라는 믿음을 갖게 된 계급이나 계층의 존재다.
혁명적 인텔리겐챠와 농민은 그 근본 목표가 다르다. 농민의 근본 목표는 토지 소유였지만, 게릴라 지도부를 이루는 혁명적 인텔리겐챠의 근본 목표는 민족해방을 달성하는 데 지렛대 노릇을 하는 국가권력의 장악이다. 인텔리겐챠는 농민을 이용해 농민이 아니라 자신을 권좌로 밀어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게바라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미에서는 노동자 투쟁의 물결이 분출했다. 그것은 변화를 위한 투쟁에 사뭇 다른 전략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1970년 이후 칠레에서 살바도르 아옌데의 인민연합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노동자들의 혁명적인 투쟁이 폭발했다. 1970년대 말, 브라질에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남미의 가장 강력한 독재정권을 흔들었다. 이런 투쟁에 연루된 많은 노동자들은 게바라의 영웅주의와 자기 희생에 고무받은 바가 컸지만 그의 방법에서 배운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위대한 혁명가 게바라의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는 정말이지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두 살 무렵 앓게 된 폐렴 때문에 생겨난 천식은 열 살 이래 스스로 주사를 놓아가며 다스려야 할 만큼 그 정도가 심각했고 평생 그를 괴롭혔다. 멀쩡한 몸으로도 버텨내기 힘든 전쟁터에서 시도 때도 없이 발작하듯 엄습해 오는 천식을 무릅쓰고 전투를 치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나 업무라 하더라도 그것을 해야 할 때는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그 분야나 업무에 적합하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추스리고 훈련시켰다. 이런 대담함과 책임의식, 탁월한 의지력은 일개 군의관에 지나지 않던 그로 하여금 게릴라 대장, 외교대사와 국립은행 총재, 장관 등을 역임할 수 있게 했다.
게바라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을 권장했고 앵무새처럼 지침서에 적혀 있는 말만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각자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견해와 행동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이 서슴없이 비판하고 질책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지독한 독서광이었고 시와 문학을 좋아하는 낭만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너무나도 증오한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게바라 본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에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많은 사람들이 저를 무모한 모험가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압니다. 물론 저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모험가지요. 바로 자신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내던질 수 있는 그런 모험가 말입니다.”
게바라는 “그야말로 스스로 연마된 다이아몬드와 같았다.”
1) 체 게바라의 ‘체(che)’는 아르헨티나에서 말을 시작하거나 강조할 때 쓰는 일종의 감탄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