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인들의 민중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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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인들의 민중 봉기
이수현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제국주의의 이해 관계와 떼어 놓고 볼 수 없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언제나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구조들과 충돌했다. 그런 구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시온주의 운동과 그 구현체인 이스라엘 국가였다.
시온주의와 제국주의
시온주의는 19세기 후반 유럽 자본주의의 위기가 낳은 산물이었다. 자본주의가 동유럽으로 침투하자 봉건 경제 구조에 의존하고 있던 그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들은 위협을 느꼈고, 경제 위기에 직면한 지배자들은 실업이나 정치적 억압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유대인을 인종 차별하면서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사회의 그런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시온주의였다. 1896년에 씨어도어 헤르츨은 《유대인 국가》라는 소책자에서 유대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발전 국가에 유대인만의 국가를 세우고 그 곳으로 이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딱히 팔레스타인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주권 국가 없는 영토를 얻기 위해서는 당시 세계를 분할·지배하고 있던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과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고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자 당시 영국 정부의 관리였던 카임 바이츠만(나중에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된)은 영국 제국의 이익과 시온주의자들의 목적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임자 없는 땅’이 아니었다. 이미 50만 명 이상의 아랍인들이 그 곳에 살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유대인만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것과 같은 방식이 필요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아랍인 부재 지주들한테서 토지를 대거 매입하고 유대인들만의 ‘고립 경제’를 구축하는 일종의 식민화 과정을 통해 유대인 공동체의 기반을 구축하고 강화해 나갔다.
제1차세계대전 동안에 아랍 민족주의가 중동을 휩쓸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반제국주의 운동은 대영제국과 대결하기 전에 먼저 하위 식민주의 세력인 유대인 정착민들과 충돌했다. 시온주의 운동은 제국주의 열강의 훌륭한 보조 날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영국은 시온주의 민병대(하가나)의 창설과 무장을 도와 주고 아랍인보다 유대인을 우대하는 등 유대인들을 지렛대 삼아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했다.
1936∼1939년에 일어난 팔레스타인인들의 반란과 이후의 제2차세계대전은 시온주의 운동을 강화시킨 계기가 됐다. 영국과의 군사적·경제적 협력 하에 유대인 공동체는 두드러지게 성장했다. 반면에,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무장해제당한 채 점점 더 피폐해졌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 저울 변화를 감지한 일부 시온주의자들은 ‘지는 해’(영국) 대신 ‘떠오르는 태양’(미국)에 의존해 시온주의 국가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내에서는 시온주의자들의 로비가 강화됐다.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노쇠해진 영국이 1947년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회부하자 미국은 시온주의자들을 편들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그 지역에 개입할 준비를 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이 선포된 지 정확히 11분 뒤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새로운 국가를 승인했다. 미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물질적 보상 가운데 하나”인 중동산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이제 막 시작된 냉전에서 소련에 맞서기 위한 지역 동맹국으로서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후원했다.
그래서 전후에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포함한 어느 동맹국에게도 제공하지 않은 최신 첨단 무기를 제공해 이스라엘을 무장시켰고, 이스라엘은 미국의 최대 원조 수혜국이 됐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중동산의 석유를 지키고 아랍 민족주의를 억누르며 그 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데 동일한 이해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에 도전하는 것은 곧 서방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것이 됐다.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와 파타
1936년 4월에 팔레스타인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 자생적인 운동으로 시작된 그 파업에는 거의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이 참가했다. 팔레스타인 전역이 마비되다시피 했고 영국의 탄압도 파업을 끝장낼 수 없었다.
그러나 10월에 아랍고등위원회로 조직된 아랍 지배자들이 투쟁 중단을 선언하면서 파업은 끝났다. 아랍인 경제는 황폐해졌고 그 정치 구조는 파탄났으며 최상의 활동가들은 처형당하거나 투옥당했다. 팔레스타인공산당은 좌충우돌하다가 결국은 스탈린주의 정치 때문에 아랍 민족주의와 시온주의 속으로 용해되고 말았다.(제3세계 스탈린주의는 민족주의와의 융합이 가장 큰 특징이다.)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제1차 중동 전쟁으로 거의 1백만 명의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비롯한 난민촌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이 똑같이 고통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 지주와 자본가 들은 유동 자산 형태로 재산을 보존한 경우도 많았고 새로 이주한 곳에서 생활 기반을 마련하기도 쉬웠다. 그러나 농민이나 노동자는 실업자로 전락해 구호품에 의존해 살아가기 십상이었다.
1960년대 중반에 팔레스타인의 대중 운동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 지도부는 부유한 소수와 난민촌 대중 사이의 이런 커다란 차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 즉 알-파타라고 하는 이 새로운 흐름은 팔레스타인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전형이었다. 중동 각국으로 흩어진 팔레스타인 부르주아지는 현지의 상업·건설·금융 부문이나 언론·공직 사회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그에 걸맞은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국가 권력을 수립하여 그 속에서 그들의 지위와 경제력을 보장받고 싶었다.
1969년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장악한 파타의 지도부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데 중동의 아랍 정권들을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랍 정권들이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문제에 간섭해서는 안 됐다. 이른바 “불간섭” 원칙이었다. 1970년의 “검은[암담한] 9월” 사태는 이런 불간섭 원칙이 엄청난 재앙을 낳은 경우였다.
1975∼1976년의 레바논 내전에서 PLO는 또다시 불간섭 원칙을 고수하다 심각한 곤경에 처했다. 1987년 11월에 열린 아랍연맹의 정상 회담에서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걸프전보다 하위 주제로 다뤄졌다. 이는 연맹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PLO는 이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인티파다
그러나 한 달 뒤에 가자와 서안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는 사태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1930년대 이후 처음으로 대중적인 팔레스타인 운동이 시온주의와 직접 충돌했다. PLO는 다시 무대의 전면으로 떠올랐다. 봉기의 특징은 월등한 무기를 가진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이 계속됐다는 점이다. 1989년 7월까지 6백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이 살해당했지만, 시위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점령지의 노동 계급조차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핵심적인 산업들은 오직 유대인들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에 봉기가 이스라엘 경제에 결정적인 위협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봉기는 중동 전역에서 거대한 연대 운동의 흐름을 만들어 냈다. 봉기가 일어난 지 2주도 지나지 않아 레바논의 시돈에서 벌어진 시위를 시작으로 요르단·바레인·시리아·터키·이집트 등지에서 아랍의 학생과 노동자 들은 팔레스타인과의 연대 행동을 통해 자국의 지배자들과, 그리고 그들을 후원하는 제국주의와 충돌했다. 그것은 1988년 10월 알제리에서 일어난 ‘북아프리카 인티파다’에서 절정에 달했다.
제국주의 덕분에 존속할 수 있는 부패하고 무능한 아랍 정권들이 인티파다의 영향을 받은 대중 항쟁으로 인해 붕괴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아랍의 지배자들은 미국에게 압력을 넣어 이스라엘의 양보를 촉구하는 한편, PLO에게는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할 것을 종용했다.
다시 한번 파타는 아랍 정권들에 의존하면서 제국주의와의 대결을 회피했다. 파타는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단결과 아랍 지배자들의 통일을 추구할 뿐, 팔레스타인 대중과 아랍 노동 계급이나 농민들의 단결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제리에서 인티파다가 터졌을 때 PLO 지도부는 침묵을 지켰다. PLO가 아랍 정권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PLO 지도부는 아랍 민중을 억압하는 아랍의 지배 계급과 자신들을 동일시해 왔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의 대중이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아랍 자본주의,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과 대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회 세력, 즉 아랍의 노동 계급과 손을 잡아야 한다. 사실 아랍의 노동 계급은 그 지역의 지배 계급들에 대항한 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오래 전부터 보여 주었다. 지난 40년 동안 중동의 급속한 산업 성장과 불균등 결합 발전으로 아랍 노동 계급의 힘과 비중이 눈에 띄게 커졌다.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고 있을 때 이집트 노동자들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투쟁을 재개했다. 당시 일련의 대중 파업으로 파루크 왕정은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1950년대 내내 이라크에서는 파업이 되풀이됐고 1977년 1월에는 이집트 노동자들이 사다트 정권을 거의 타도할 뻔했다. 1979년에 이란의 노동자들은 팔레비 왕정을 타도하는 데서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1978년과 1981년에는 튀니지에서, 1980년에는 모로코에서 일어난 총파업이 1984년에는 폭동으로 발전했다. 1985년에는 초점이 수단으로 이동했고 1988년 알제리에서는 노동자들이 일으킨 파업이 10월 ‘인티파다’로 폭발했다.
바로 이런 투쟁이 팔레스타인 민중을 짓누르고 있는 이스라엘 국가와 그 후견인인 서방 제국주의, 그리고 그들의 지역적 동맹 세력인 아랍 정권들을 제거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동력이다.
비록 팔레스타인 문제가 베이루트의 난민촌이나 서안의 마을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지라도, 그 해결책은 다른 곳에 있다. 변화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은 무엇보다도 이집트의 산업 도시들, 즉 아랍 자본주의의 중심지에 존재한다.
■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인티파다를 다룬 훌륭한 책이 최근 출간됐다.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 좀더 알고 싶은 독자들은 《인티파다》(필 마셜, 책갈피, 2001년)를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