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 사상의 오늘날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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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 존 몰리뉴는 지난해 여름 방한해, ‘다함께’ 주최의 포럼 ‘전쟁과 변혁의 시대’에서 연설했다. 이 글은 그 연설문이다. 몰리뉴는 트로츠키의 사상을 교조적으로 적용하려 하지 말고 비평적으로(반성적으로) 적용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 ] 속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자가 덧붙인 것이다.
“우리가 멀리 내다볼 수 있는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원래 아이작 뉴턴이 한 말입니다. 하지만 국제사회주의 경향(이하 IST)의 창립자인 토니 클리프는 항상 이 말에 다음과 같은 사족을 덧붙여 말했습니다. “우리가 멀리 내다볼 수 있는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눈을 뜨지 않으면 소용 없다.” 트로츠키 사상의 현재성을 논할 때도 이 두 가지는 매우 필요합니다.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트로츠키가 거인의 반열에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거인이었습니다. 그가 이룩한 실천적 성과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1905년, 26세의 나이에 그는 세계 최초의 노동자평의회인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이 됐습니다. 1917년에는 레닌과 함께 10월 봉기의 핵심 조직자 구실을 하며 10월혁명을 지도했습니다. 1918년부터 1921년까지 그는 러시아 혁명을 방어하기 위한 내전에서 적군을 조직하고 지도했습니다. 1924년부터는 스탈린주의의 등장에 맞선 투쟁의 핵심 지도자였습니다.
이론과 사상 면에서도 트로츠키는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트로츠키가 최초로 고안한 연속혁명 이론은 러시아 혁명의 동역학에 대한 가장 과학적이고 정확한 분석이었음이 입증됐습니다. 망명 중이던 1931년에 그는 《러시아혁명사》를 집필했는데, 제 생각에 이 책은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역사서입니다. 같은 시기에 그는 파시즘의 성격을 분석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전술을 개발했는데, 이것도 당시로서는 가장 멀리 내다본 분석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근본에서는 가장 탁월합니다. 그는 단지 스탈린의 등극에 맞서 저항했을 뿐 아니라 스탈린주의 관료의 기원을 분석했고 그들이 국제적 계급투쟁에서 반혁명적 구실을 할 것이라는 점도 예견했습니다. 이러한 분석 역시 선구자적인 것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트로츠키는 훨씬 더 광범한 지적 영역에서도 거인이었습니다. 그의 저작과 사상이 넘나드는 영역은 실로 엄청나서 때로는 현기증이 날 정도입니다. 내전 중에 전장을 시찰하러 기차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그는 책을 한 권 집필했습니다. 그리고 1923년,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격렬한 정치 활동을 6년이나 수행한 뒤 그는 잠시 휴가를 얻었습니다. 휴가 중에 뭘 했을까요? 《문학과 혁명》이라는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스탈린주의에 맞선 투쟁
우리의 관심사가 무엇이든 간에 트로츠키는 그 주제에 대해 적어도 한 마디씩은 해줄 말이 있는 듯합니다. 예컨대 중국 혁명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1925∼27년에 트로츠키가 쓴 중국 관련 글들을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미국의 인종차별과 흑인 해방 운동사에 관심 있다면 흑인 민족주의 등에 관한 트로츠키의 글을 참고해야 합니다. 저처럼 영국에 살기 때문에 영국 노동당의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도 노동당 문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글들을 꼭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트로츠키의 위대함에 대해 지금껏 말씀드린 점 외에도 꼭 언급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정치적 용기입니다. 스탈린의 등극에 맞서 싸우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고참 볼셰비키의 다수는 스탈린의 방향이 잘못됐음을 이미 알고 있거나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무자비한 압력에 못 이겨 스탈린과 타협하거나 그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녜프뿐 아니라 레닌의 아내인 크룹스카야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스탈린에게 저항했지만 결국에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트로츠키만은 예외였습니다.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로서는 그 당시의 압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27년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스탈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대는 러시아 혁명의 무덤을 파고 있소!”라고 말한 것입니다. 퍄타코프라는 고참 볼셰비크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새파랗게 질려 회의장을 빠져나왔고 집에 돌아와서는 “내전 중에 겪은 어떤 순간도 조금 전의 회의만큼 무시무시하지는 않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퍄타코프는 내전중에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으로서, 동생과 함께 백군에 붙잡힌 적도 있었습니다. 동생이 먼저 백군에게 총살당했고 그 다음으로 퍄타코프 차례가 왔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백군이 장악하고 있던 그 도시를 적군이 탈환한 덕분에 퍄타코프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퍄타코프에게는 그 때의 경험보다도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대결이, 그 극적인 긴장감에 더욱 몸서리쳤던 것입니다.
그 뒤에도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와 서방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끈질기게 이어갔습니다. 철저히 고립되고, 추방당하고, 자식들까지 살해당하고, 사상 초유의 엄청난 비방 캠페인이 그에게 쏟아지는 와중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평가할 때 결국 트로츠키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앞서 설명한 어떤 개인적 성취보다도) 인류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질 뻔한 진실된 마르크스주의를 보존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는 트로츠키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토니 클리프가 말했듯이 우리가 눈을 뜨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트로츠키도 결국 인간이었고 가끔 오류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트로츠키가 죽고 65년이 흐르면서 세상도 변했고 그에 따라 마르크스주의도 발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트로츠키의 사상을 적용할 때 우리는 그의 주장에 담긴 진수, 그 정신을 파악해야지 그의 주장을 글자 그대로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트로츠키의 혁명 정신과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방법에만 충실하다면 그의 저작들은 매우 유용합니다. 하지만 그의 공식들 하나하나에 집착하다 보면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 있고, 더 나아가 트로츠키 자신이 견지한 근본 원칙들과 모순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연속혁명론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연속혁명론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대한 트로츠키의 기여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것입니다. 그 이론의 요지는 러시아 노동계급이 비록 전체 인구 중 소수일지라도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당시에 득세하던 ‘정설’ 마르크스주의의 견해, 즉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앞서 부르주아 혁명이 선행해야 한다는 견해와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트로츠키는 연속혁명론의 근거로 불균등·결합 발전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를 통해 그는 자본주의가 완만하게 일직선으로 발전한다는 생각을 반박했습니다. 영국과 미국 같은 나라들이 부르주아 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쳤다고 해서 다른 나라들도 그와 똑같은 경로를 따라가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나라마다 매우 불균등하게 발전합니다. 우리는 또한 여러 모로 저발전 상태에 있는 나라가 일단 경제 발전을 시작하면 외국의 첨단 기술과 산업을 접목시키면서 발전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혁명 전의 러시아에는 페테르부르크의 푸틸로프 공장처럼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공장도 있었던 반면 농촌은 사실상 17세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불균등·결합 발전이 트로츠키는 상상도 못했을 만큼 거대한 규모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초고속 경제성장과 함께 현대적 도시들이 개발되는 한편 농촌 지역 대부분이 몇 세기 이상 뒤처져 있는 중국이 단적인 사례입니다. 이러한 불균등성은 다른 많은 방식으로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세계 최초로 철도를 발명한 나라이지만, 지금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낙후한 철도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불균등 결합발전
이 모든 불균등 발전에는 커다란 사회·정치적 함의가 있습니다. 그런 나라[신흥공업국]에서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프롤레타리아가 성장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에는 사회주의라는 과제가 기본적으로 유럽과 북미 노동계급의 과제로들 여겼습니다. 그러나 연속혁명론을 통해 트로츠키는 그것이 러시아 노동계급의 과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줬고 그것을 다른 나라 노동계급에게도 확대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한국·중국·라틴아메리카·일부 아프리카 지역 등 곳곳에 제3세계라고 부르던 지역 전체에 어마어마한 규모로 노동계급이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국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꼭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트로츠키의 말을 글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트로츠키는 중국 혁명이 장제스와 국민당에 배신당한 경험을 근거로 1928년에 “연속혁명의 원리상 노동자 혁명의 승리 없이는 민주주의나 민족 독립의 성취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온갖 혼란에 봉착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들은 인도나 남아공 같은 나라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는 독립도, 민주주의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가 커다란 곤경에 처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중국과 쿠바처럼 독립을 쟁취한 나라들에서는 모종의 노동자 혁명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는, 노동자들이 전혀 혁명을 주도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 때문에 오늘날 연속혁명론이 쓸모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트로츠키의 원문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두번째 사례는 그의 스탈린주의 비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스탈린의 권력 장악과 소련 정치의 변질에 대해 트로츠키가 내놓은 모든 사실과 주장들은 오늘날 역사적으로 완전히 입증됐습니다. 그의 주장대로 스탈린 치하 러시아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 정권이었고 끔찍한 경찰국가였음은 이제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스탈린 생전에 트로츠키는 이러한 진실을 감히 발설한 대가로 “파시스트”로 낙인 찍혀야 했지만, 이제 스탈린을 변론하는 자들은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에 대해 1930년대에 자신들이 내세웠을 만한 설명보다 트로츠키의 설명에 훨씬 가까운 설명을 내놓습니다.
물론 트로츠키는 소련에 대해 ‘사회주의’라는 수식어를 거부한 점에서 완전히 옳았습니다.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이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생산을 통제하는 무계급 사회로서 사회주의의 개념을 고집한 것도 옳았습니다. 그는 또 스탈린 지배 하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하게 될 구실도 정확히 예측했습니다. 그는 일국사회주의 교리의 영향으로 각국 공산당들이 노동계급 해방의 도구에서 소련 관료의 도구로 변질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또한 일국사회주의 교리가 장기적으로는 각국 공산당 자체를 민족주의와 개량주의로 경도되게 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이 예측도 역사적으로 완벽히 검증됐습니다.
하지만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 투쟁 정신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그의 분석을 글자 하나하나까지 다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와 투쟁하면서도 소련에서는 재산이 국유화돼 있다는 점을 들어 소련이 여전히 어떤 점에서는 노동자 국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노동자 국가를 판별하는 기준으로서 국유화라는 표지에 집착한 사람들은 결국 그들 자신이 스탈린주의자가 되거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예컨대 만약 중국이 한때 노동자 국가였거나 지금도 노동자 국가라고 생각한다면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이 한때 노동자 국가였다면, 그 국가가 전복당하지도 않은 채 어떻게 현재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에도 어떤 곳에서는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를 자처하는 일부 좌파들은 중국이 노동자 국가라고 옹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무엇에 맞서 중국 국가를 방어한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중국에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맞서 그것을 방어하려는 듯한데, 중국 국가야말로 그러한 자본주의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 비춰보면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또는 민주화를 원하는 중국 노동자들에 맞서 ‘노동자 국가’를 방어하려는 것일 수도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일 뿐 아니라 범죄일 것입니다.
노동자 국가
제가 중국에 대해 드린 말씀은 이런저런 형태로 존재하는 다른 옛 스탈린주의 정권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국유화를 노동자 국가의 기준으로 여긴 트로츠키의 공식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오직 트로츠키의 스탈린주의 비판을 국가자본주의 이론으로 승화시킬 때만 우리는 그의 반스탈린주의 정신을 온전히 계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사례만 더 들겠습니다. 한국에 계신 동지들에게도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인 공동전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함께 공동전선 전략과 전술을 발전시킨 가장 중요한 이론가였습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초기에 그는 레닌이 ‘좌파 공산주의 ― 철부지 같은 혼란’이라고 부른 초좌파적인 경향에 대응해 공동전선 개념을 처음으로 개발했고, 나중에는 독일의 반파시즘 투쟁과 관련한 스탈린주의 전술에 반대해 공동전선 개념을 더욱 정교화했습니다. 독일에서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이 건설되지 못한 탓에 히틀러와 나찌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전선에 대한 트로츠키의 글, 즉 1921∼22년 코민테른 초창기에 쓴 글과 1932∼33년 독일과 관련해서 쓴 글 모두 마르크스주의 전술에 관한 정말 탁월한 글입니다. 노동계급의 투쟁 전술에 관한 분석으로서는 실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러나 이 때조차 트로츠키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뇌어서는 곤란합니다. 그 동안 세상도 변했고 특히 노동자 운동의 양태도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 글을 쓸 당시에 트로츠키의 주된 관심사는 독일의 양대 노동자 정당인 사민당과 공산당의 공동 투쟁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독일 노동자 운동을 대표하는 양대 정당이었고 공동전선이란 바로 그 둘을 함께 싸우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독일 외의 나라에서도 그 당시에 효과적인 공동전선을 형성하려면 이 두 세력들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명백히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민당+공산당이라는 공식이 더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먼저 공산당은 여러 나라에서 더는 예전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 데다가, 사회민주당들은 너무나 우경화한 나머지 (영국의 경우는 특히 더) 이제는 종종 그들에 맞서서 공동전선을 건설해야 할 판입니다. 토니 블레어에게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공동전선을 건설하자는 편지를 보낸다면 그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공동전선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오늘날의 현실에 맞게 적용할 방법들을 모색해야 합니다. 투쟁 속에서 노동계급의 단결을, 진보적 세력들의 단결을 극대화하고 그 속에서 혁명적 주장을 펴고 혁명정당을 건설할 수 있는 기회를 극대화하는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트로츠키의 생애를 통틀어 그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시의적절한 요소를 하나 지적하고 끝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제주의입니다. 오늘날의 반세계화·반자본주의 운동에서 우리 운동의 국제주의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계급을 창출하며 국제 자본주의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계급을 국제적으로 창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국제 노동계급]의 일부가 돼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레온 트로츠키의 투쟁과 유산을 계승하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답변과 결론
[청중석 발언 생략]
- 남미의 반란과 유럽에서 혁명적 운동의 약진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당연히 운동의 수준은 유럽보다 남미에서 훨씬 더 높습니다. 남미 대륙 전체에서 노동자·선주민들의 거대한 투쟁 물결이 일고 있으니까요. 적어도 세 나라에서 이 운동은 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에서는 준혁명적 상황이 펼쳐진 바 있습니다. 시간상 이 투쟁들을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투쟁들이 매우 중요하고 고무적이라는 점은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투쟁들은 또한 역사의 가장 중요한 교훈 한 가지, 즉 혁명정당 건설의 절대적 필요성을 웅변해 주기도 합니다.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처럼 노동자 투쟁은 대중 운동의 자생적 분출로 시작하지만, 그 운동이 승리로 끝나려면 대중적 혁명정당을 통해 집중되고 조율돼야 합니다. 남미에 비하면 유럽의 운동은 규모가 훨씬 작습니다. 대중이 혁명적 행동에 나서는 상황이라기보다는 여전히 대중 시위와 일부 작업장의 개별적 파업 정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작 자체가 워낙 보잘것없었기에 이 정도까지 발전한 것만 해도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하지만 발제 마지막에서 밝힌 요지를 되풀이하자면, 오늘날에는 자본주의 세계화 때문에 세계 각지의 투쟁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한국에서 동지들이 직면하고 있는 쟁점들이 이집트나 영국의 노동자들이 직면한 쟁점들과 놀라우리만큼 비슷합니다.
- 중국은 원래 노동자 국가가 아니었으므로 국가 전복 없이도 자본주의로 쉽게 이행했다고 시사하셨는데, 그렇다면 원래 노동자 국가였던 러시아가 국가 전복 없이 국가자본주의로 이행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이미 플로어에서 한 동지가 답변을 해드렸지만 한 가지만 더 보태겠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보통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주의 사이에 모종의 연속성이 있다고 전제합니다.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와 IST 모두 이 관점을 배격합니다. 즉, 우리는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으며, 스탈린주의가 반혁명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반혁명이라고 해서 꼭 바리케이드 전투가 벌어지고 정권이 타도되는 형태를 띨 필요는 없었습니다. 애초에 노동자 국가를 수립한 노동계급이 이미 1920년대 초의 내전과 기근 때문에 해체되고 국가권력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습니다. 하지만 반혁명이 가시적이지 않았을지라도 트로츠키의 말마따나 “볼셰비즘과 스탈린주의 사이에는 피의 강물이 존재”합니다. 스탈린주의 관료는 고참 볼셰비키들과 노동계급 모두를 상대로 일방적인 내전을 치렀고 전자를 거의 몰살하다시피 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과 동유럽 정권들의 경우 과거의 스탈린주의 체제와 오늘날의 시장경제 체제 사이에 피의 강물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들의 지배 관료는 단지 생산수단을 소유·통제하는 한 가지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옆걸음질 쳤을 뿐입니다. 러시아의 역대 통치자들을 한번 보십시오. 고르바초프, 옐친, 푸틴... 이들 모두 스탈린주의 지배 관료 출신입니다. 이는 전혀 이상하거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를 상기해 보십시오. 각국의 지배자들이 누구였습니까? 세르비아는 밀로셰비치, 크로아티아는 투지만이었습니다. 둘 다 스탈린주의 당 관료 출신이지요.
- 트로츠키는 왜 스탈린의 등장을 테르미도르 반동에 비유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는 실제로 스탈린의 등극을 테르미도르에 비유해 설명하려 했습니다.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 테르미도르 반동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코뱅파를 몰락케 한 반혁명이었습니다. 좌익반대파는 테르미도르를 반혁명의 상징으로 이해한 것이죠. 하지만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해 혼란을 겪었습니다. 1920년대 내내 그들은 테르미도르의 위험을 경고했는데, 훗날 트로츠키는 이미 1923년에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났다고 단정짓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프랑스 혁명 같은 부르주아 혁명에 뒤이은 반혁명과 노동자 혁명에 뒤이은 반혁명은 그 성격이 다릅니다.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통해 지배하는 계급인 부르주아지는 국가권력에 대한 통제력을 일부, 또는 심지어 전부 포기하더라도 여전히 지배계급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반면, 노동계급은 오직 집단적인 방식으로, 국가를 통제함으로써만 생산수단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만약 노동계급이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면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도 잃는 것이며 더는 지배계급으로 남을 수 없게 됩니다. 트로츠키는 국가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해 혼란을 겪은 듯합니다.
- 왜 서구의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오늘날 레닌의 당 개념을 거부하는 건가요?
그들이 진정 트로츠키주의자들이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누구보다 트로츠키 자신이 레닌주의 당 개념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교훈[레닌주의 당]을 배우기까지 우리가 치른 피의 대가가 너무 커서 그것을 버릴 수 없다.” 당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제가 책을 한 권 썼으니[《마르크스주의와 당》, 북막스] 더 길게 얘기했다간 제 손해일 것 같습니다.
- 트로츠키가 제4인터내셔널을 창립한 것은 옳았습니까?
IST 전체를 대표해서 말씀드리건대, 우리는 국제적인 조직, 즉 혁명적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한다는 이상 자체에 대해서는 완전히 공감합니다. 1938년에 제4인터내셔널의 창립을 선언한 것에 대해 맨 처음에 토니 클리프가, 그 뒤에 던컨 핼러스와 제 자신이 제기한 비판은 원칙 차원의 이견 때문이 아니라 그런 행보가 당시에는 부적절했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당시에 전 세계의 트로츠키주의 세력은 너무도 미미해서 “사회주의혁명세계당”이라는 이름을 내거는 것은 자기 기만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의도는 좋았지만 제4인터내셔널의 실체는 프랑스의 어느 가정집에서 반나절간 고작 11명이 회합하는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그 중 한 명은 보안경찰 공작원이었죠. 제4인터내셔널 창립이 초래한 진정한 해악은, 문서상으로는(오늘날에는 온라인상으로는) 어마어마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조직들을 급조해 내면서 스스로 과대망상에 빠지는 경향을 키운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트로츠키 사후에 훨씬 중증으로 발전했습니다.
- 부시 정권은 파시스트 정권입니까? 그렇다면 부시에 맞선 공동전선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부시 정권은 파시스트 정권이 절대 아닙니다. ‘파시즘’에는 과학적 정의가 있습니다. 그 말은 단지 우리가 싫어하는 상대에게 아무렇게나 붙일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저도 부시가 싫지만 말입니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오른쪽으로부터 분쇄하는 것을 뜻하며, 더 중요하게는 파시스트 운동과 국가가 노동계급의 독립적 조직을 완전히 분쇄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부시와 미국 제국주의를 아무리 증오한다고 해도, 미국의 현재 상황이 그 지경에 와 있지는 않습니다. 선거도 치르고(불행히도 부시가 재선했지만), 노조 운동도 존재하고, 실제로 AFL-CIO[미국 노총]는 최근에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미국 정권이 파시스트 정권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공동전선 전술을 응용할 수 있는 대상은 파시즘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트로츠키는 독일에서 파시즘의 등장에 맞서 공동전선을 구축하자고 호소했고 우리도 파시즘의 위협이 대두될 경우 공동전선을 구축하려 하겠지만 공동전선은 그밖에도 노동계급 투쟁의 수많은 영역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반전 운동의 경우, 특히 영국의 전쟁저지연합은 트로츠키의 공동전선 이론을 오늘날의 현실에 적용한 두드러진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의 국제적 구호는 무엇이 돼야 합니까?
제 생각에 이미 좋은 구호들은 많습니다. 연단에서 장내를 얼핏 훑어보기만 해도 “Stop the War”, “End the Occupation of Iraq”, “Stop Bush” 같은 구호들이 눈에 띕니다. 런던에서도 우리는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트로츠키주의에서 국제주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상기해 봅시다. 저는 다른 동지들에 비해 해외 여행을 덜 해 봤지만 오늘날 구호들이 국제적으로 확산되는 속도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국제 반자본주의 운동의 구호가 무엇입니까?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입니다. 뭄바이에서 포르투 알레그레까지, 중남미에서 동남아에 이르기까지, 이 구호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에 직면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투쟁 속에서 세계 곳곳의 사람들은 공동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 마흐노와 아나키즘에 대한 트로츠키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트로츠키는 마흐노 운동을 직접 탄압하지는 않았지만 마흐노와 대립 관계에 있던 소비에트 정부의 일원이었습니다. 마흐노는 내전 기간에 우크라이나에서 농민 운동을 이끈 사람입니다. 그는 아나키스트를 자처했지만 제가 볼 때 그의 운동은 사실, 아나키즘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민주적인 운동은 더욱 아니었죠. 만약 아나키스트들이 이 문제를 제기한다면 저는 이렇게 되묻겠습니다. 만약 그 운동이 정말로 민주적이었다면 어째서 그 이름이 마흐노 운동이었느냐고. 마흐노의 농민운동과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자 국가에 대한 반감을 공유했고, 둘 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에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운동은 어떤 면에서 상당히 반동적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러시아 혁명을 대변하는 볼셰비키가 백군과 사생결단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마흐노의 군대는 적군과 백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함으로써 혁명의 운명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특수한 경우였고 트로츠키 개인이나 트로츠키주의자들 일반이 아나키즘에 적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트로츠키는 최상의 아나키스트들을, 특히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을 투쟁 속의 동지이자 잠재적 동맹 세력으로 봤습니다. 비록 그들의 이론에 동조하진 않았지만 말입니다.
토론 요약
다시 강조하건대 국제주의는 트로츠키의 전 생애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원칙이었습니다. 그가 스탈린주의에 반대하고,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에 반대한 것도 국제주의에 기반한 행동이었습니다. 트로츠키의 국제주의가 아니었다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오늘 이 멋진 포럼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트로츠키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입니다.
녹취·번역 천경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