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코뮌의 투사이자 교육자, 시인인 루이즈 미셸의 회고록이 국내에 번역·출간됐다. 해방된 사회를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은 혁명가의 치열한 삶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루이즈 미셸은 1830년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1865년 루이즈는 파리에서 진보적 학교를 열고 급진적 정치 활동에 참여했다.
1870년 프로이센 군대가 파리를 포위했을 때 루이즈는 국민방위군에 입대했다. 프랑스 정부는 국민방위군의 무장을 해제시키려 했지만, 파리가 이에 불복하고 봉기했다. 1871년 파리 코뮌이 선포됐고 루이즈는 여성 방위위원회의 대표로 선출됐다.
루이즈는 파리 코뮌 혁명 정부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프랑스 정부에 맞선 무장 저항에도 앞장섰다. 몽마르트 61대대의 일원으로 싸웠고, 야전 병원을 조직하기도 했다. 루이즈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화약 냄새와 공중을 가르는 포도탄이 좋았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혁명에 몰두했다.”
루이즈는 남성 투사들에게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일조할 것”을 촉구하며 이렇게 꾸짖었다. “남성과 여성이 모든 인류의 권리를 확보하고 난 다음에야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기여할 텐가.”
파리 코뮌은 잔혹하게 진압됐고 약 2만 명의 남성, 여성, 어린이가 처형됐다. 1871년 12월 루이즈는 시민들에게 무장을 촉구하고 무기를 사용해 정부를 전복하려 한 혐의로 기소됐다. 루이즈는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하라고 재판관에게 당차게 요구했다.
루이즈는 유배형을 선고받았고 약 1만 명의 코뮌 가담자들과 함께 추방됐다. 22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뒤 카나키(누벨 칼레도니) 섬으로 추방됐다. 루이즈는 카나키 선주민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1878년 카나크 반란을 지지했다.
1880년 코뮌 가담자들이 사면되자 루이즈는 파리로 돌아와 혁명적 활동을 이어갔다. 1881년 런던에서 열린 아나키스트 회의에 참석해 대규모 군중 앞에서 연설했다.
1883년 파리에서 루이즈는 실업자 시위를 이끌었고 그 시위는 소요로 이어졌다. 루이즈는 또 재판을 받았고, 재판정에서 자신의 원칙을 당당하게 방어했다. 결국 루이즈는 독방 6년형을 선고받았다.
1905년 1월 루이즈가 폐렴으로 사망하자 그녀의 장례식에는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파리 코뮌은 계급의 중요성과 국가의 구실에 관한 마르크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을 옹호하며 “새로운 사회의 영광스러운 산파로 영원히 칭송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투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루이즈 미셸의 삶은 국제 노동계급의 집단적 기억의 정수가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지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