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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극우 이재명 정부 팔레스타인과 이란전쟁 이주민·난민 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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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주의의 유대인 역사 왜곡

1. 신화가 땅문서가 될 때

시온주의 운동은 신화를 기반으로 세워진 구조물이다. 여기서 신화는 오랜 종교적 기억이 근대 정치의 언어로 옮겨지면서 상식처럼 굳어진 서사를 말한다. 1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신화와 거짓말의 차이가 부차적이다. 한 신화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빼앗는 근거가 되고 정착촌과 군사 점령, 추방을 정당화한다면, 그것이 처음부터 기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피해의 현실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이 ‘고대 이스라엘’과 ‘유배’ 서사를 다루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 서사는 먼 과거에 관한 호기심이 아니라 오늘날 이스라엘의 영유권과 국가 정체성을 지탱하는 정치적 자원이다. 2

시온주의의 핵심 서사는 간단하다. 성서 시대에 하나의 유대 ‘민족’이 ‘이스라엘 땅’에서 국가를 이뤄 살았고, 로마에 패해 강제로 흩어진 뒤 2000년 동안 타국에서 박해받다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민족’이 근대에야 비로소 생겨났다는 사실은 잠시 내버려 두고 문제 삼지 않기로 하자.) 이 서사는 성서의 약속,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 서기 70년의 성전 파괴, 근대의 ‘귀환’을 곧바로 뻗은 단 한 가닥의 줄로 잇는다. 바로 그 단선(單線)이 우리의 역사적 검토 대상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눈에는 시온주의 이데올로기가 거대한 거짓의 체계로 보인다. 평화를 약속한 정부 아래서도 서안 정착촌은 늘어났고, 정치 지도자들은 그 확대를 ‘유대와 사마리아’라는 성서 지명으로 덧칠했다. 신화의 작동 방식은 과거를 잘못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권력 관계를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으로 만든다.

이 글의 목적은 성서의 종교적 진리를 역사학과 고고학으로 판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신앙은 옛 문헌이나, 발굴된 토기나 왕궁 유구(遺構: 건물 터, 성곽의 기초,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 등) 같은 고고학적 증거로 입증되거나 반증되지 않는다. 검토 대상은 성서 이야기를 현대 민족국가의 국제법적 근거처럼 사용하는 행위다. 성서를 경전으로 읽는 것과 국가의 부동산 등기부로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3

2. 약속의 지도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시작한다. 신은 아브라함과 언약(베리트)을 맺고 그와 후손에게 가나안 땅 전부를 영원한 소유로 주겠다고 약속한다(창세기 12장과 15장). 나그네로 머물던 땅이 상속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땅은 경계가 있다. 시리아 유프라테스강에서 시나이반도 북부의 ‘이집트 개울’(와디 엘아리시)까지다. 4

이 경계는 성서가 약속의 실현으로 제시하는 정치체의 최대 판도와 겹친다. 성서에 따르면, 기원전 10세기에 다윗과 솔로몬이 이른바 ‘통일 왕국’을 통치했고, 이 왕국은 당대 레반트(그리스와 이집트 사이에 있는 동지중해 연안 지역을 통틀어 이르는 말) 지역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이자, 신의 약속이 지상에 구현된 형태였다(이 서술의 비역사성은 아래에서 다룰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땅’을 뜻하는 ‘에레츠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약속과 성취, 상실과 귀환을 하나의 지도에 담아낸 신학적·정치적 이데올로기다. 5

사실 대부분의 시온주의자들은 성서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 경건한 신자가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서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 여부가 아니라, 유대인이 오래전부터 이를 믿어 왔다는 사실 자체다. 6

시온주의의 시간은 단선적이다. 아브라함의 약속, 모세의 출애굽(이하 이집트 탈출), 여호수아의 정복, 다윗의 왕국, 로마에 맞선 반란, 19세기 정착 운동이 하나의 ‘민족사’ 속 연속된 장면으로 배열된다. 그사이 수천 년 동안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수많은 주민과 제국, 언어와 종교는 막간극처럼 밀려난다. 현대의 국경과 정체성을 고대 텍스트에 투영해서 읽는 이러한 방법은, 실제로는 근대 민족주의가 과거를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20세기 초 팔레스타인 인구 약 70만 명 중 유대인은 약 5만 5000명이었고 시온주의 농업 정착촌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었다. 정착촌 토지는 흔히 부재지주에게서 매입했지만, 경작하던 팔레스타인 농민은 쫓겨났다. 시온주의자들은 총을 들고 정착촌을 지켰다. 그들은 “성서가 우리의 위임장(권리증)”이라고 말했다. 이는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밀어내며 빚어지는 영토 갈등을, 마치 190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신성한 과정인 것처럼 바꿔 부르는 정치적 논리였다.

3. 신화를 사실로 만드는 정치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 선언을 낭독하는 전 이스라엘 총리 벤 구리온 ⓒ출처 Wikimedia Commons

시온주의자들은 역사적 사실과 사실에 대한 믿음 사이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린다. 사람들의 강렬한 믿음이 행동을 낳고, 그 행동이 국가와 국경, 군대를 만들어 내면 신화가 사실로 전환됐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에 이끌린 행동이 새로운 현실을 만든다고 해서 과거의 신화가 사후에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신화 생산자’다. 7

시온주의자들은 메시아 사상도 세속적 민족주의에 이식했다. 전통 유대교에서 메시아적 구원은 인간 사회 전체의 정의와 쇄신을 뜻했지만, 시온주의의 언어에서는 유대 ‘민족’이 먼저 영토로 ‘복귀’해 국가를 세우는 일이 보편적 구원의 전제가 됐다. 인격적 메시아의 자리를 시온주의 운동과 그 국가가 대체한 것이다. “만민의 빛”이라는 예언자(이사야 42장 6절, 49장 6절)의 언어도 국가 건설과 군사적 정복의 정당화에 동원됐다. 8

이 연결은 추상적 수사가 아니었다. 1956년 이스라엘이 영국·프랑스와 함께 이집트를 침공했을 때(제2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 총리 벤구리온은 시나이에서 싸우는 병사들 머리 위에 모세와 십계명의 후광이 빛났다고 말했다. 고대의 성스러운 지리와 현대의 제국주의 전쟁이 하나의 장면으로 교묘하게 중첩됐다. 성서가 침략을 비판하는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침략을 신성화하는 근거가 됐다.

유대교 사상가 마르틴 부버와 예샤야후 레이보비츠가 문제 삼은 것도 이 지점이었다. 부버는 시온을 인류 전체에 대한 요구와 사명의 상징으로 봤고, 우상적인 ‘국익’을 최고 권위로 삼는 민족주의가 이를 찬탈했다고 비판했다. 레이보비츠도 종교가 세속 정부의 시녀가 되는 것은 우상숭배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 비판과 논쟁은 시온주의와 유대교가 동일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오히려 국가가 성서를 땅문서로 사용할 때 경전의 윤리적·영적 의미는 완전히 훼손된다.

시온주의자의 사고에서 성과 속은 서로 배제되지 않는다. 그들은 과학과 합리성을 숭상한다면서도 필요할 때마다 성서의 인물과 예언을 식민 정착촌 건설의 명분으로 사용해 왔다. 자신들을 신이 특별한 능력을 부여한 중개자로 여겼고, 시온주의를 ‘메시아적 비전’으로 규정했다. 이런 식으로 초월적 구원은 정착자 식민주의에 접목됐으며, 시온주의 지도자의 판단은 예언의 권위를 빌릴 수 있었다. 9

부버의 비판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그가 유대교 내부에서 다른 길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 공동체를 지지하면서도, 아랍 주민을 지배하는 배타적 국가는 거부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부버에게 주목한 이유도 유대교 전통의 윤리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권리와 양립시키려 한 드문 시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온주의 반대를 유대교 적대로 동일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10

4. 땅이 응답하지 않다

그런데 시온주의의 역사 서사는 고고학적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다. 100년 넘게 발굴이 이어졌다. 성서의 세부 묘사를 지도 삼아 기원전 10세기의 왕국을 찾는 작업이었다. 여러 차례 ‘발견’이 선포됐지만, 연대 측정과 층위 분석이 정교해질수록 확신은 흔들렸다. 1990년대에 이르러 일부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스라엘 핑켈슈타인, 제에브 헤르초그 등이 이끄는 텔아비브대학교 학파)은 성서가 발굴을 안내하는 열쇠가 아니라 발굴 결과를 왜곡하는 렌즈일 수 있다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11

그동안 유적지에서 나온 것은 가나안의 물질문화였다. 성서가 초기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집단을 주변 가나안 사회와 명확히 분리해 낼 독자적 유물군은 보이지 않았다. 기원전 12~11세기 가나안 중앙 산지에는 작은 취락들이 급증했다. 핑켈슈타인은 그 주민들을 외부에서 침입한 단일한 ‘히브리 민족’이 아니라 가나안 내부의 목축민과 저지대 주민 등이 재편돼 형성된 집단으로 본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초기 이스라엘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했지만, 당시 중앙 산지 주민 전체를 이스라엘인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이집트 탈출과 가나안 정복이라는 서사도 고고학적 증거가 없었다. 12

예루살렘은 거듭 발굴됐다. 그러나 기원전 10세기 층에서 성서가 묘사하는 광대한 수도와 기념비적 건축 프로그램에 걸맞은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이스라엘 핑켈슈타인과 닐 애셔 실버만이 강조한 것은 건축의 부재뿐 아니라 문자의 공백이다. 왕실 연대기, 행정 문서, 기록 보관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성서가 그린 중앙집권적 대국의 존재를 의심하게 한다. 문자의 부재 하나만으로 국가의 부재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행정, 제의, 왕권이 고도로 조직된 대제국이라는 거창한 상(像)과 맞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13

솔로몬 성전은 파라오의 건축 사업에 견줄 만한 프로젝트의 정점으로 성서에 묘사돼 있다. 그러나 발굴된 건물 터나 성벽들은 알고 보니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더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고고학계에는 큰 충격이 일었다. 솔로몬이 지었다고 믿었던 크고 화려한 건축 업적이 몽땅 그 후대 왕들의 차지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작 기원전 10세기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지층에서는 내세울 만한 거대한 건축물이나 제국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나, 이를 ‘기원전 10세기의 대제국’과 동일시할 근거는 없었던 것이다. 가장 관대한 해석을 적용하더라도 다윗과 솔로몬의 예루살렘은 성서 속 세계 제국이 아니라 산지의 작은 정치적 중심지에 불과했다. 14 물론 고고학이 무너뜨리는 대상은 관련 성서 구절의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현대 영유권 주장이 근거로 삼는 고대 증서다.

1999년 제에브 헤르초그의 언론 기고는 충격적이었다. 이스라엘인은 이집트에 대규모 집단으로 머문 적이 없고, 사막을 40년간 유랑하지도 않았으며, 군사 원정으로 가나안을 정복해 열두 지파에게 분배하지도 않았다는 내용이다. 그는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의 이야기에 역사적 증거가 없고, 다윗과 솔로몬이 실재했더라도 성서가 묘사한 ‘제국’의 군주였다고 볼 근거가 없다고 했다. 15 소위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은 성서가 묘사한 지역 강국이 아니라 기껏해야 작은 산지 왕국에 불과했을 것이다. 16

제에브 헤르초그에 이어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이 2001년 (실버만과) 공저를 내어 시온주의 신화를 공격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혔다. 첫째, 성서에 기록된 이집트 탈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그저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의 이동에 관한 오래된 기억이 이야기의 재료가 됐을 가능성만 있다. 둘째, 가나안 사회의 붕괴와 지역적 전쟁은 실제였지만, 여호수아의 일회적·전면적 정복 전쟁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그리고 초기 이스라엘인의 다수는 외부 침입자가 아니라 가나안 사회 내부에서 출현했다. 셋째, 다윗은(어쩌면 솔로몬도) 실존했던 듯하지만, 성서가 묘사하는 다윗과 솔로몬의 생애와 업적은 대부분 전설화·과장됐다. 넷째, 성서가 묘사하는 다윗·솔로몬의 강대한 통일 왕국은 실재하지 않았다. 통일 왕국 대신에 사마리아를 수도로 한 오므리 왕조의 왕국이 있었다. 즉, 실제로 최초의 크고 발전한 이스라엘 국가는 다윗·솔로몬의 예루살렘 왕국이 아니라 기원전 9세기의 북쪽 왕국 이스라엘이었다.

정직한 고고학자들이 일으킨 위기는 이스라엘 고고학이 지닌 정치적 성격 탓에 파장이 더 컸다. 발굴은 단순한 학술 활동을 넘어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뿌리를 땅속에서 찾는 국가적 사업으로 장려됐다. 특정 유구의 연대를 솔로몬 시대로 올려 잡는 일은 곧 국가의 고대성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반대로, 연대를 수백 년 낮추는 일은 단순한 학술적 수정을 넘어선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스라엘 정체성’을 뒤흔드는 효과였다. 이는 국가 정통성과 학문 연구가 오랫동안 착종된 현실을 반영했다. 17

5. 성서 안의 균열

유적지가 침묵하기 전에 성서 자체가 이미 곤란한 증언을 했다. 성서는 단일한 시대에 한 목소리로 기록된 정부의 공식 팩트 기록물(왕조실록 같은 국가 연대기)이 아니다. 서로 다른 시기의 기억, 왕실 홍보, 민담, 시가, 제사장(이하 제관) 전승, 예언자의 비판이 오랜 편집을 거쳐 한데 묶인 문헌이다. 수백 년간 다양한 집단의 기억과 신학적 해석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편집물인 것이다. 그 안에는 지배자를 찬양하는 목소리와 지배자의 폭력 및 불의를 폭로하는 목소리가 공존한다. 18

다윗은 메시아 전통의 출발점이다. 후대 예언자들은 그에게 내린 축복을 바탕으로 미래의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아)’를 상상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고대 근동 및 성서 시대에 특정한 사람을 구별해 중대한 직분을 맡길 때, 그의 머리에 특별히 배합된 거룩한 기름(주로 올리브유)을 붓거나 바르던 실제 의식을 뜻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받음은 종교적·정치적으로 매우 깊은 상징성을 지닌 용어다. 다윗이 지었다는 시편(23편)의 “목자”(양 치는 사람)와 “죽음의 그늘 골짜기”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영적 언어가 됐다. 그러나 성서는 다윗이 밧세바를 임신시킨 뒤, 그의 남편 우리아를 가장 치열한 전선에 내몰아 죽게 한 사실도 기록한다. 19

블레셋인의 사례는 더욱 노골적이다. 그들은 초기 이스라엘이 국가 형태를 갖추도록 압박을 가한 강력한 외적으로, 선진 철기 문명을 보유했던 에게해 출신의 해양 세력이었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유명한 이야기와 관계있는 집단이다.) 후대에 블레셋의 영어식 표기 ‘필리스틴’은 문화적 교양이 없는 사람을 뜻하는 멸칭이 됐다. 그러나 발굴된 블레셋 유물은 정교한 도기와 광범한 교역 흔적을 보여 준다. 20

솔로몬 성전은 성서에서조차 이스라엘 문명의 독자적 산물로 나타나지 않는다. 티레의 히람이 보낸 장인과 석공, 레바논의 백향목, 페니키아인이 건조하고 운항한 함대, 그리고 암몬·에돔·모압·페니키아·이집트 왕실을 잇는 혼인이 성서의 솔로몬 왕국을 이룬다. 이는 고대 근동 왕정의 통상적인 국제 질서였다. 고립된 ‘민족 국가’가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결된 지역 세계가 성서 안에서도 드러난다. 21

제의의 불연속성 문제도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는 로마 시대 서기 70년 이후의 랍비 유대교보다 가나안과 고대 근동의 관행에 훨씬 가까웠다. 성전의 중심은 희생 제의, 곧 제사(祭祀)였고, 이는 수메르 이래 널리 발전한 종교 형식이었다. 성서 시대부터 현대 유대교까지 동일한 종교와 민족이 변함없이 이어졌다는 시온주의 서사는 역사적 변형과 단절을 외면해야만 성립하는 이야기다. 22

성서는 다윗과 솔로몬을 이상화하면서도 그들의 세계가 ‘순수한’ 유대적 세계가 아니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솔로몬의 국제 혼인은 후대 성서 편집자에게 우상숭배의 일환으로 비쳤으나, 당대 왕정의 관점에서는 외교 동맹과 교역망을 구축하는 정상적 수단이었다. 시바 여왕의 방문, 금과 상아, 향료, 공작과 원숭이의 유입은 예루살렘 왕정이 페니키아, 이집트, 아라비아의 기술과 교역에 의존했음을 보여 준다. 성서가 묘사한 영광은 지역 세계의 상호의존을 전제한다. 23

예언자들의 목소리도 왕국과 경전을 단순한 찬양물로 읽지 못하게 한다. 왕과 제관,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를 억압할 때 야훼의 이름으로 그들을 고발하는 전통이 성서 안에 있다. 성서의 영토 약속만 떼어내고 과부와 고아, 비유대인에 대한 정의의 요구를 외면하는 시온주의는 성서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편리한 부분만 편집하는 것이다. 24

6. 야훼와 그의 아세라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이스라엘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고고학 데이터에 따르면, 기원전 9세기의 북쪽 왕국 이스라엘은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국가다. 남쪽 왕국 유다(이 이름은 그리스-로마 시대에 유대로 바뀐다)는 더 작고 늦게(기원전 8세기 후반) 성장한 정치체였다. 이 시기의 종교는 후대의 엄격한 일신교가 아니라 가나안 종교 세계와 뒤섞인 단일신교(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은 채 한 신을 으뜸으로 섬기는 형태)였다. 25

기원전 8세기 무렵 유물인 헤브론 인근 키르베트 엘콤의 무덤 명문과 시나이 북동부 쿤틸레트 아즈루드의 저장 항아리 명문은 공통으로 ‘야훼와 그의 아세라’의 축복을 언급한다. 가나안 종교의 여신이던 아세라가 이 명문에서 여신 그 자체(야훼의 배우자)를 뜻하는지, 아니면 제의적 상징물인지를 두고 학계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쿤틸레트 아즈루드 유물에 왕관을 쓴 두 존재가 나란히 묘사됐다는 점과 이스라엘 유적에서 출토된 풍요 소상(작은 흙인형)이 가나안 여성 신상과 유사하다는 점은 당시 다수 이스라엘인이 야훼에게 배우자가 있다고 여겼다는 고고학계의 해석을 뒷받침한다. 결국 이 명문에 등장하는 ‘아세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든, 이 같은 고고학적 발견은 초기 야훼 숭배가 후대 정통 일신교의 정형화된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음을 보여 준다. 26

십계명의 첫 계명인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규범 자체도 다른 신들의 존재를 전제한다. 문제는 신 존재 여부보다 어떤 신이 우선권을 갖느냐였다. 사해문서가 보여 주는 다양한 유대교 종파와 후기 회당에 나타나는 태양 상징까지 고려하면, 일신교는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형태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오랜 논쟁과 정화, 편집 과정을 거쳐 형성됐다. 27

유대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 전통이 주변 문화와 교류하며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유대교의 독특성은 과거 다신교 세계와의 단절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세계의 유산을 재해석하고, 들고 다닐 수 있는 문서와 율법을 공동체의 중심에 세운 데 있다. 28

엘레판티네(9절에서 후술됨) 문서는 이집트에서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확실한 유다계 공동체 자료다. 이 공동체는 나일강의 섬에 야훼 신전을 따로 세웠고, 그들이 남긴 문서에는 야훼와 나란히 다른 신의 이름도 등장한다. 예루살렘만을 유일한 성소로 삼는 규범이 기원전 5세기까지도 모든 유대인 공동체에 관철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자료다.

7. 유다와 이스라엘, 그리고 성서의 탄생

그런데 성서 속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원주인은 북쪽의 사마리아 왕국이었으나, 훗날 성서의 정통 서사를 기록으로 남긴 주역은 남쪽의 유다 왕국이었다. 북쪽 왕국이 아시리아에 멸망하고 유다만 생존하면서, 패자의 이름은 승자의 역사에 흡수됐다. 한때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았던 경쟁국 ‘이스라엘’은 점차 유다의 기원과 미래를 상징하는 명칭이 됐다. 29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유다와 사마리아를 둘러싼 정치 지형도 다시 짜였다. 그리스어와 헬레니즘 도시, 새로운 행정 제도와 교역망이 들어섰지만 두 공동체의 경쟁은 사라지지 않았고, 성서 전승의 편집과 재해석도 이 조건 아래에서 이어졌다. 30

패자는 사마리아였지만 사마리아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독점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별개의 이스라엘 공동체로 남았다(13절에서 자세히 다룬다). 서기 1세기에도 유대와 사마리아는 서로 적대했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도 그들은 결코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로 결속하지 않았다. 오늘날 요르단강 서안의 ‘유대와 사마리아’라는 지명이 고대의 단일 영토를 증명한다는 시온주의자들의 주장은 이 복잡한 역사를 자신들의 정치적 필요에 맞춰 짜깁기한 결과다. 31

핑켈슈타인과 실버만은 성서 편찬의 결정적 계기를 (생존한 남쪽 왕국) 유다가 행정력과 문자 문화를 발전시킨 기원전 7세기 무렵으로 본다. 북쪽 왕국 멸망 이후 유입된 유민과 전승, 유다 왕권의 중앙집권화 계획, 예루살렘 성전의 독점 요구가 과거 역사를 재구성하는 조건이 됐다. 이 관점에서 봐도, 소위 ‘다윗과 솔로몬의 제국’은 객관적 역사 기록이 아니라, 작고 위태로운 유다 왕국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장대한 계보일 뿐이다. 32

성서의 서사는 실제 장소와 왕조, 전쟁의 기억이 문학적 상상력과 결합한 설화다. 핵심은 문헌이 기록된 시대의 요구를 파악하는 일이다. 누가 예루살렘을 유일한 성소로 만들고자 했는가, 누가 북쪽 왕국의 경쟁적 전통을 우상숭배로 규정했는가, 어떤 패배와 추방이 하나의 ‘이스라엘’ 서사를 낳았는가. 이러한 질문이 성서를 역사적으로 읽는 출발점이다.

8. 기록을 들고 다니는 종교

고고학이 ‘통일 왕국’의 존재를 의문시하는 사이에 유대교의 진정한 힘을 보여 주는 다른 단서가 나타난다. 바로 영토가 아닌 기록이다. 유대교는 야훼의 율법과 역사적 전망을 담는 신성한 매체로 기록을 들고 다녔다. 왕국과 성전이 무너져도 두루마리와 율법, 역사와 예배 규칙은 영토를 넘어 이동할 수 있었다. 33

유대교의 고유한 특징은 특정 영토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들은 이동하면서도 끊임없이 공동체를 재구성했다. 회당은 단순한 성전의 축소판이 아니다. 다양한 제국과 도시, 언어 속에서 공부하고 토론하며 구제와 예배를 행하는 역동적인 조직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대회당이 신자들을 직업과 생업에 따라 조직했다는 기록은 종교 공동체와 도시의 사회경제적 삶이 밀접하게 결합됐음을 보여 준다.

기록 덕분에, 이동성은 정체성을 약화시키지 않았다. 땅을 떠났다고 해서 유대교가 약화된 것은 아니다. 글과 율법을 중심에 뒀기에 여러 고향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시온주의 서사는 이 이동성을 ‘결손’이나 ‘비정상’으로 규정하지만, 고대 유대사의 실제 역동성은 바로 이 이동 능력에서 나왔다. 34

성전 중심 종교와 글(기록, 문서) 중심 종교는 단순히 임무를 교대하듯 교체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순례와 제사(祭祀), 지역 회당과 율법 학습이 공존했다. 멀리는 기원전 8세기 후반 아시리아의 강제 이주 때부터, 그리고 특히 기원전 597년과 기원전 587/586년의 바빌로니아 유수부터는 지속적으로 유대인들은 제국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그런 그들에게 매주 모여 읽고 토론하는 회당은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공동체를 유지하는 버팀목이자 구심점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흩어짐(이산離散)이 지중해 전체로 확대됐다. 서기 70년과 135년은 이산의 시작이 아니라 주요한 재편이었을 뿐이다. 성스러움은 특정 장소에 고정되지 않고, 낭독과 해석이라는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됐다.

글의 이동성은 번역과 결합했다. 이집트 유대인은 성서를 그리스어로 읽었으며, 철학과 역사, 호교론 문헌도 그리스어로 저술했다. 언어가 바뀐다고 해서 정체성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번역은 유대 사상을 지중해 지식 세계로 진입시켰고, 비유대인에게도 매력적인 전통으로 다가서게 했다. ‘순수한 고대 히브리 고유문화’라는 시온주의의 허상보다 번역과 혼합이 유대교의 생존을 더 명확히 설명한다.

9. 엘레판티네: 이집트의 유대인

성서 속 이집트는 노예 생활과 탈출(출애굽)의 무대다. 그러나 역사적 사료에 등장하는 이집트 유대인 공동체의 실상은 전혀 다르다. 나일강 엘레판티네섬에 자리 잡은 그 공동체는 페르시아 제국에 복무하던 군사 식민 집단이었다. 그들은 기록을 남겼고, 선주민과 교역하고 혼인했으며, 제국의 보호 아래 종교 생활을 영위했다. 35

엘레판티네 문서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최초의 확실한 유대인 거주 증거다. 이 문서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규모 노예 집단이나 기적적인 탈출 사건을 입증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국 변방에서 군사와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공동체의 자율성을 보장받았던 유대인의 실상을 보여 준다. 36

이러한 공생 관계는 이후 역사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다. 유대인은 용병, 관리, 상인, 장인, 통역사, 금융 실무자로서 제국과 왕권에 유용한 기능을 제공했고, 지배자는 그 대가로 종교적 자율과 법적 보호를 허용했다. 그러나 바로 이 밀착 관계 때문에 토착 주민이 제국의 지배에 저항할 때, 유대 공동체가 지배자의 하수인으로 낙인찍힐 위험도 존재했다. 기원전 5세기 말 엘레판티네 공동체가 공격받은 사건은 이동성, 보호, 취약성 등이 하나의 구조적 모순 속에 얽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엘레판티네 문서의 중요성은 유대인이 제국에 봉사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공동체는 현지 법률과 경제 생활에 참여했으며, 가족 문제, 재산, 계약, 종교적 사안을 아람어 문서로 기록했다. 고향과 디아스포라가 서로 배타적이지 않은 생활세계가 이미 여기서 드러난다. 예루살렘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나일강의 섬은 여러 세대에 걸친 실제 삶의 터전이었다.

이 사례는 훗날 반복되는 모순의 원형을 보여 준다. 제국의 통치망은 소수자 공동체에 이동의 자유와 기회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이들을 지배 권력과 동일시하게 만들기도 한다. 유대인이 늘 지배자 편에 섰다는 뜻은 아니다. 동일한 시대와 장소에서도 계급, 직업, 정치적 선택은 저마다 달랐다. 다만 보호와 특권, 현지의 뿌리와 외부 네트워크가 결합할 때 공동체의 안전은 정치적 위기와 밀접하게 연동되기 쉬웠다. 37

10. 디아스포라(이산)라는 형태의 정착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자 지중해 세계의 연결 방식이 달라졌다. 서기 1세기 후반기에 활동한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예루살렘의 대제관에게 경의를 표하는 극적인 장면을 전한다. 글자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그리스 제국의 확장이 유대 역사에서 거대한 전환점이었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 일화다. 그리스어, 도시, 군대와 행정, 교역망은 유대인 공동체의 새로운 생활 공간이 됐다. 38

이집트가 헬레니즘 세계에 편입되면서 이집트 유대인은 병사와 관리로 충원됐고, 노예나 경제적 이주민으로도 유입됐다. 그 대가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이집트를 지배한 마케도니아계 왕조)는 유대인의 율법을 존중하고 보호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대규모로 성장했다. 로마가 이 지역을 장악한 기원전 63년 무렵에는 상당수의 유대인이, 일부 추산으로는 다수가, 유대 땅 바깥에 살고 있었다.

이는 시온주의의 ‘유배’ 신화를 깨뜨리는 결정적인 사실이다. 로마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서기 70년보다 훨씬 전부터 디아스포라가 존재했던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패전 후 강제로 흩어진 사람들의 임시수용소 같은 게 아니었다. 바빌로니아,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는 여러 세대에 걸쳐 형성된 사회였다. 많은 공동체에 예루살렘은 순례와 종교적 권위의 중심이었지만, 실제 생활의 터전은 그들이 거주하던 도시와 지역이었다. 39

따라서 ‘디아스포라’와 ‘유배’는 (시온주의의 용어법과 달리) 전혀 같은 말이 아니다. 디아스포라는 분산된 정착과 연결망을 뜻하지만, 유배는 본래 땅에서 쫓겨나 귀환만을 기다리는 비정상적 상태를 의미한다. 시온주의는 후자의 용어를 2000년 역사 전체에 덧씌웠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 유대인은 머무는 곳에서 일하고 배우며, 정치 권력과 협상하고 다른 집단과 갈등하며 어우러져 살았다.

알렉산드리아 인구를 50만 명, 유대인을 그 3분의 1로 추산하는 고대 수치는 정확성 논란이 있으나, 그 도시가 세계 최대의 유대인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곳의 유대인은 군인과 관료, 상인과 노동자, 지주와 빈농으로 분화돼 있었다. ‘디아스포라’라는 낱말의 단일한 어감은 내부의 계급 차이를 은폐할 우려가 있다.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도 일시적인 난민 집단이 아니었다. 황제(서기 19년 티베리우스 황제와 서기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추방령과 귀환, 사회 상층 인물들의 조롱이 반복됐으나 일부 로마인의 유대인 관습 수용도 있었고, 아무튼 공동체의 역사는 끊기지 않았다. 저명한 바울로 연구자이기도 한 존 M. G. 바클리는 로마 유대인이 여러 이주민 소수집단의 하나로 정착해, 유대 전쟁(서기 66~70년)에 직접 연루되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일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지속성은 서기 70년을 모든 유대사의 절대적 단절로 규정하는 시온주의의 시대 구분과 배치된다.

11. 필론: 고향은 태어나 배운 곳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이 세계를 가장 명확하게 증언한다. 그는 헬레니즘 철학과 유대 율법을 결합한 사상가이자, 부유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한 가문 소속이었다. 그의 형제 알렉산드로스는 도시 최고의 자산가로서 예루살렘 성전에 막대한 금액을 기부했다. 조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로마 제국의 고위 관리가 돼 유대 총독을 지냈고, 이후 예루살렘 반란 진압에도 관여했다. 이처럼 한 가족 안에서 강한 유대적 헌신, 제국 엘리트로의 동화, 종교와의 결별이 동시에 나타난다.

동화는 상류층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유대인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군대의 보병과 기병, 장교와 급여관으로 복무했으며, 토지를 분배받아 소지주가 되기도 했다. 동시에, 비유대인 농장에서 일하는 목자, 양모 상인에게 빚을 진 농민, 장인과 건축공, 직조공과 뱃사공 등 하층민도 존재했다. 이집트 유대인들(필론이 속한)은 히브리어와 아람어 대신에 그리스어로 방대한 문헌을 남겼다. 그들의 정체성은 단일한 계급이나 특정한 문화적 선택으로 환원되지 않았다. 40

필론은 ‘고향’의 정의를 명확히 했다. 그에게 ‘파트리스’, 즉 조국은 태어나 교육받은 곳이다. 지혜로운 자는 특정 장소에 대한 집착을 넘어 세계시민이 돼야 하지만, 실제 인간이 고향에 느끼는 애착도 율법이 명하는 선에서 인정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는 생활의 고향이었고, 예루살렘은 종교적 ‘모도시’이자 순례지였다. 41

성전과 율법에 대한 헌신이 필론의 유대인적 정체성의 중심이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헌신이 알렉산드리아라는 지역적 소속감을 없애지는 않았다. 종교적 중심과 정치적·생활적 고향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 유대적 코스모폴리터니즘이 시온주의보다 거의 2000년이나 앞섰다.

필론의 코스모폴리터니즘은 지역적 소속을 부정하는 추상적 세계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의 시민권을 보호하려고 로마 황제에게 사절로 갔고, 도시의 정치적 갈등에 깊이 관여했다. 세계시민이라는 철학과 특정 도시 공동체의 권리를 위한 실천이 공존했다. 이는 (시온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뿌리 없음’이 아니라, 복수의 소속을 감당하는 방식이었다.

시온주의와 반유대주의는 때로 이 복수 소속을 서로 다른 이유로 의심했다.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을 어느 나라에도 충성하지 않는 ‘뿌리 없는 세계시민’이라 공격했고, 시온주의자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불완전하고 자기기만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필론은 양쪽의 전제를 모두 무색하게 만든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인이면서 유대인이었고, 그리스 철학자이면서 유대 율법(토라)의 해석자였다. 또한 예루살렘을 사랑하면서도 그곳을 자신의 조국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12. 매혹과 적대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관계는 (시온주의 서사와 달리) 공존 아니면 박해라는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다. 물론 폭력은 존재했다. 서기 38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격은 로마가 그리스인, 유대인, 이집트인 사이의 시민권과 특권을 조절하며 집단 간 갈등을 부추긴 정치 상황과 연관돼 있었다. 유대인이 제국의 세금과 토지 정책을 집행하는 집단으로 비칠 때 비유대인의 적대는 더 쉽게 집중됐다.

종교적 차이도 마찰을 낳았다. 일신숭배, 할례, 음식 규정, 안식일은 주변인의 호기심과 혐오를 동시에 자극했다. 타키투스 같은 로마 저술가는 유대인이 “자기들끼리는 충성하지만 타인은 모두 미워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적대의 기록만 보고 ‘유대인들은 늘 미움받고 고립돼 살았구나’ 하고 단정 지으면, 그들이 주변 사회와 교류하며 역동적으로 일궜던 실제 삶의 모습은 가려지고 만다. 42

같은 시기에 유대교는 많은 비유대인을 끌어당겼다. 요세푸스는 거의 모든 도시에 유대화하려는 사람들과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경계에 선 혼합 집단이 존재했다고 기록했다. 다마스쿠스와 안티오키아에서는 유대교가 그리스인과 지역 주민에게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소 과장이 섞였을지 몰라도 이는 위축되고 고립된 ‘유배’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 종교의 보편적 매력을 확신한 공동체의 목소리다.

바로 이 교차점에서 그리스도 종파가 성장했다. 타르수스의 바울로는 디아스포라 회당을 순회하며 유대인 동조자와 비유대인 동조자를 결합했고, 일부 규범(특히 할례)을 완화해 운동의 경계를 넓혔다. 그리스도교가 훗날 유대인을 적대하는 종교로 변모한 역사는 비극적이지만, 그 출발 자체는 1세기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개방성과 선교적 활력을 반영한다. 43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하지 않으면서(특히 할례 때문에), 안식일이나 음식 규정 일부를 따르고 회당을 후원한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존재도 경계의 유동성을 보여 준다. 유대인 공동체는 폐쇄된 혈통 집단이 아니라, 친연성의 층위가 다양한 종교 네트워크였다. 로마 당국이 때때로 유대교의 영향력을 경계한 이유는 유대인 공동체가 고립돼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 사회로 침투하는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폭력의 원인도 단일하지 않았다. 종교적 편견, 시민권 경쟁, 제국의 이간질, 채무와 토지 문제, 전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반유대주의가 2000년 동안 변함없이 지속됐다’는 시온주의의 설명은 중세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적대와 근대 인종주의, 고대 도시의 시민권 충돌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희생을 정치적으로 기억하면서도 각 시대의 구체적인 역학을 구분해야 한다.

13. 하나가 아닌 땅: 사마리아, 갈릴래아, 유대

2000년 전 이른바 ‘이스라엘 땅’은 단일한 정치적·지리적 단위가 아니었다. 사마리아, 갈릴래아, 유대는 서로 다른 역사와 권력 구조를 지닌 지역이었다. 근대 민족국가의 영토 개념을 과거에 투사하면 이러한 지역적 차이가 은폐된다. 로마가 사마리아인을 학살했을 때조차 유대와 사마리아가 공동의 대의를 형성했다는 증거는 없다. 44

사마리아인은 자신을 이스라엘인으로 여겼으나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산을 성소로 삼았다. 유대 문헌은 그들을 이단자나 불완전한 유대인으로 묘사했으나, 델로스섬 명문은 그들이 스스로를 “거룩한 그리심산에 십일조를 바치는 이스라엘인”이라 칭했음을 보여 준다. 그들에게도 디아스포라가 존재했다. 45

갈릴래아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비옥한 농업과 올리브유 수출을 바탕으로 한 자립적 농촌 사회, 예루살렘 제관 엘리트가 ‘암 하아레츠’(무지한 농민)라며 멸시한 민중적 유대교가 존재했다. 탈무드 전승에는 학식 있는 자와 농민 사이의 증오가 비유대인과 유대인 사이의 적대보다 더 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서기 66~70년 반란 초기에 갈릴래아는 (시온주의의 주장과 달리) 로마에 맞선 ‘민족’ 전쟁의 무대가 아니었다. 요세푸스가 예루살렘 지휘관으로 파견됐을 때, 그는 산적 집단과 분노한 농민, 경쟁 도시와 지방 유력자 사이에서 권력을 다퉈야 했다. 그 상황은 (그리스-로마 시대 유대인 역사 연구자 테사 라잭이 규정했듯이) ‘갈릴래아 내전’이었다. 46 사마리아, 갈릴래아, 유대를 하나의 민족이 같은 목표로 움직인 영토로 묘사하는 것은 역사적 사료가 보여 주는 분열상을 은폐하는 것이다.

1996년 팔레스타인 당국(“자치정부”)의 첫 입법평의회 선거에서 나블루스 선거구에 사마리아인 몫의 의석 1석이 배정되고 사마리아인 살룸 알카헨이 당선된 사실은 고대의 균열이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님을 보여 준다. 현대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유대교나 팔레스타인 아랍 정체성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 공동체로 자신들을 규정한다. 유대와 사마리아를 묶어 ‘영원한 유대 민족의 심장부’라 부르는 시온주의는 사마리아인의 주체적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갈릴래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불신한 것은 신앙 생활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유한 성전 귀족과 지방 농민 사이에는 세금과 십일조, 토지와 권위를 둘러싼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존재했다. 예루살렘 문헌이 갈릴래아 농민을 조잡하고 무지하게 묘사한 것은 도시 엘리트의 계급적 편견을 반영한다. 지역 간 적대 속에서 유대 ‘민족’이라는 범주는 당시에 단일한 정치적 행위주체 기능을 하지 못했다. 47

14. 서기 66년: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 이어진 대반란은 로마 지배에 맞선 유대인의 해방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를 근대적 민족해방운동과 동일시할 수 없다. 이 반란은 로마에 맞선 전쟁인 동시에 예루살렘의 부유한 지배계급에 저항한 농민 전쟁이었다. 48 갈릴래아 사람 유다에게서 시작된 혁명적 가문은 로마의 인구조사와 조세에 저항하며, 인간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 자체가 악이고 오직 신만이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사상은 국가 건설의 청사진격 이데올로기라기보다 권위에 대한 종교적 거부, 즉 일종의 메시아적 아나키즘에 가까웠다. 농민 산적과 무장 집단의 활동도 (에릭 홉스봄이 탐구한) 부정의와 불평등에 맞선 원초적인 사회적 저항의 형태로 해석할 수 있다. 49

예루살렘을 장악한 열심당은 전통적 제관 가문의 독점을 깨고 제비뽑기로 대제관을 선출했다. 그들은 혁명 정부를 세워 자체의 은화와 동전을 만들었는데, 은화에는 ‘거룩함’이, 동전에는 ‘자유’가 구호로 새겨졌다. 여기에는 분명 해방을 향한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시온주의의 주장과 달리) ‘이스라엘 땅’ 백성 전체가 ‘민족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증거는 없다. 사마리아와 갈릴래아의 분열, 도시 엘리트와 농민의 내전, 종파적 대립이 동시에 존재했다.

민족주의는 근대의 정서다. 그것은 민족적으로 규정된 영토 안에서 국가의 국민(시민)이 될 사람들의 대중적 자기의식을 전제한다. 고대 반란자에게 자유는 로마의 세금 착취로부터의 해방, 성전 수호, 신 이외의 주인을 거부하는 삶, 토지와 부채를 둘러싼 사회 정의 등 저마다 다른 의미였을 수 있다. 이 복합적인 혁명을 20세기 시온주의 국가의 예행연습으로 규정하는 자들은 고대의 실제 갈등을 묵살하는 것이다.

갈릴래아 사람 유다의 두 아들은 반란 선동 혐의로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다른 아들 므나헴은 반란 초기에 예루살렘의 지도자로 부상했다가 내부 경쟁자에게 살해됐다. 조카 엘아자르는 마사다의 최후 저항과 연결된다. 오늘날 마사다는 시온주의에 의해 국가적 영웅주의의 성지가 됐다. 시온주의 운동은 마사다 발굴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시온주의 대의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공공연히 활용했다. 50

로마가 예루살렘 지배계급을 끝내 몰락시킨 이유는 그들이 민중 반란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민은 토라(유대 율법)를 독자적으로 해석해 자유로운 토지 소유와 채무로부터의 해방의 정당성을 확보했고, 혁명 세력은 고위 제관과 귀족의 권력을 공격했다. 반란은 외세의 강점에 맞선 단결뿐 아니라 사회 내부의 착취 관계를 둘러싼 투쟁이었다.

혁명 정부의 청동화(靑銅貨)에 새겨진 ‘자유’를 단지 종말론적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굶주림과 세금, 채무와 토지 상실에 시달린 민중에게 자유는 매우 현실적인 언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유가 지향한 정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는 사료가 말해 주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불명확성을 인정하는 것이 시온주의처럼 후대 국가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고대 반란자에게 현대적 민족주의 프레임을 덧씌우는 것보다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15. 유배 간 게 아니라 갈릴래아로 갔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예루살렘과 유대 일부 지역에서 강제 추방과 이주가 발생했고, 디아스포라 반란과 서기 132~135년 바르 코흐바 반란을 거치며 유대인의 거주는 크게 제한됐다. 그러나 (시온주의의 주장과 달리) 모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한꺼번에 쫓겨나 세계로 흩어진 것은 아니다. 상당수의 유대인은 이미 다른 지역에 살고 있었으며, 유대에서 이동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갈릴래아로 향했다. 51 갈릴래아에서는 패전 이후에도 유대교가 사라지지 않았다. 성전 제사 중심의 종교에서 공부와 율법 해석,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랍비 유대교로 탈바꿈했다. 기존 농민 유대교와 유대에서 이주한 랍비들의 엄격한 율법 해석은 날카로운 마찰을 빚었다. 로마는 초기에 이 종교적 재편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세금 징수에만 골몰했다.

랍비 문헌이 보여 주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일상은 ‘유배의 긴 밤’이라는 시온주의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그들은 함께 식사하고, 안식일에 이웃의 가축에게 물을 줬으며, 길을 동행했다. 상을 당한 비유대인을 위로하고 매장하기도 했다. 옷과 나귀를 빌려주고 돈을 융통했으며, 포도밭과 농장을 공동 소유했다. 사후에 가족과 재산을 비유대인 후견인에게 맡기는 관계도 존재했다. 랍비들은 이를 ‘평화의 길’을 위한 규정으로 설명했으나, 규정이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긴밀한 일상적 교류를 반영한다.

갈릴래아는 유배지인가, 디아스포라인가, ‘이스라엘 땅’인가, 아니면 로마 제국의 유대인 지역인가?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워도 분명한 사실은 그곳이 팔레스타인 탈무드가 형성된 중심지였으며, 로마에 패배한 후에도 유대교가 새로운 형태로 번성한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서기 132~135년 바르 코흐바 반란 이후 유대 지역의 파괴와 추방은 심각했다. 실제로 강제 이주가 일어났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온주의처럼) 이 사건을 전 세계 유대인의 기원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신화다. 바빌로니아 공동체는 이미 수백 년의 역사를 지녔고, 지중해 도시들의 공동체도 로마의 승리로 새로 생긴 것이 아니었다. 특정 지역 주민이 겪은 참상과 전 세계적 차원의 단일한 ‘추방’은 구분해야 한다. 52

갈릴래아의 랍비들은 뒤섞여 사는 현실을 규범 속에 수용해야 했다. 이교적 형상이 새겨진 생활용품과 그리스·로마식 회당 장식이 허용된 사실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시장과 일터, 예술 언어를 공유했음을 보여 준다.

갈릴래아는 눈부신 유물도 남겼다. 갈릴래아의 대표 도시 티베리아스 인근의 4세기 회당 모자이크는 이러한 혼합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토라 궤와 메노라(유대교를 상징하는 전통적인 촛대) 곁에 황도 12궁과 태양신 헬리오스가 배치됐고, 히브리어·그리스어·아람어가 나란히 쓰였다. 이를 단순한 ‘이교의 잔재’로 볼 수는 없다. 유대인 공동체는 주변 세계의 도상(圖像)과 상징, 이미지 등 시각 문화를 수용하되 고유한 전통 속에서 재배열했다. 유대인의 정체성은 외부와의 단절이 아니라 변형과 흡수 속에서 지속됐다. 53

이러한 혼합 양상은 서기 70년 성전 파괴 이후에도 이어졌다. 후기 고대와 초기 이슬람 세계에는 ‘유대화된 아랍인과 아랍화된 유대인’이 공존했고, 이들의 유대-아랍 문화는 이슬람 제국 치하에서 꽃을 피웠다. 유대 상인과 학자들의 연결망은 스페인부터 인도까지 뻗어 있었으며, 그 길목에 있는 바빌로니아와 바그다드는 오랫동안 유대교의 중심지였다. 54

물론 지배와 종교적 위계, 갈등과 폭력도 있었다. 그러나 공통 언어와 경제생활, 문화적 상호작용도 오랫동안 지속됐다. 이는 ‘아랍인과 유대인은 본래 공존할 수 없다’는 시온주의 서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동시에, 유대사의 중심을 유럽에 두는 부정확한 관점이 중동·북아프리카 유대인의 아랍어 문화와 지역적 정체성을 얼마나 가려 왔는지도 명확히 보여 준다. 55

16. 아브람 레온의 질문을 재발견하기

고대의 이동성과 제국과의 관계가 중세 유대사를 곧바로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유대인 공동체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종교와 네트워크를 유지했는가? 왜 어떤 시대에는 번영하고, 다른 시대에는 추방과 학살의 표적이 됐는가? 모든 현상을 영원한 반유대주의나 ‘유배의 운명’으로만 환원하면(시온주의처럼), 역사적 맥락과 차이는 사라진다.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마르크스주의 유대인 아브람 레온은 이 문제를 경제적·사회적 역할로 설명하고자 했다. 사후에 프랑스에서 출판된 《유대인 문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에서 그는 유대인을 단순히 종교 집단이나 영원불변의 인간 집단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레온은 유대인 공동체가 전근대 사회에서 상업·금융·중개 활동이라는 특정한 사회경제적 기능을 담당하면서 유지됐다고 보고, 이를 “인민-계급”이라고 불렀다. 레온의 ‘인민-계급’ 개념을 둘러싸고는 논쟁이 있으며, 모든 유대인을 하나의 경제적 기능으로 환원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유대인이 특정 시대에 장거리 교역, 금융, 조세 징수, 통역, 행정 등 이동 가능한 기능에 집중한 역사적 조건을 탐구했다는 장점이 있다. 유대교의 문자 문화, 다언어 능력, 초지역적 친족·공동체 연결망이 이 같은 역할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56

지배자들은 이 기능이 필요했기에 유대인 공동체에 법적 자율과 보호를 제공하기도 했다. 동시에, 유대인은 왕권과 농민, 제국과 피지배 주민 사이에서 불안정한 중간층이 됐다. 전쟁과 흉작, 부채 등 국가 위기가 닥치면 지배자는 보호를 철회하고 대중의 분노를 유대인에게 돌렸다. 박해는 유대인의 초역사적 운명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관계와 경제 구조 속에서 발생하거나 증폭됐다. 57

이 관점은 공존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1800년에 걸친 끝없는 고난’이라는 시온주의의 ‘눈물겨운 유대 사관’을 거부한다. 중세 유대인은 무력한 희생자에 그치지 않고 상인, 의사, 학자, 장인, 노동자, 외교관, 농민으로서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했다. 유대인 공동체는 지배자에게 의존하면서도 자율적 제도를 발전시켰고, 주변 사회와 끊임없이 교류했다. 시온주의가 이 역사를 “무국가 상태의 비참함”으로 해석하는 것은 유대인의 생존력과 창조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58

현대 이스라엘이 미국의 보호와 중동 지배 전략에 의존하는 현실은 강력한 지배자의 보호 아래 불만 가득한 피지배 주민과 대립하던 과거 구조의 위험한 재현이다. 고대와 중세의 역학 관계를 현대 국가에 기계적으로 대입할 수는 없으나, 시온주의가 약속한 완전한 독립이 실제로는 제국주의에 대한 긴밀한 유착을 낳았다는 이러한 문제 제기는 ‘유배에서 주권으로’라는 단순한 시온주의 서사를 교란시킬 것이다. 59

레온은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나치 점령하의 벨기에에서 활동한 젊은 유대인 혁명적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유대인의 고통을 (시온주의처럼) 민족주의 국가 건설의 명분으로 삼기보다, 박해를 낳는 사회 구조 자체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를 재조명하는 것은 시온주의의 숙명론에 맞서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공동 해방을 역사적 전망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60

중세 초기 유대인 상인은 그리스도교권과 이슬람권을 잇고 여러 언어를 구사하며 장거리 교역에 참여했다. 교육은 종교적 의무이자 실용적 자산이었고, 국제적 친족·공동체 연결망은 신뢰와 정보를 제공했다. 그들은 지배자들에게 외교, 무역, 의학, 금융 분야의 귀중한 인력이었다. 그래서 도시와 왕국은 유대인의 정착을 권장하고 자치와 보호를 약속했다. 61

그러나 서유럽 상인 계급과 국가 재정 기구가 성장하면서 유대인이 맡았던 사회적 역할은 그리스도인 상인과 관료에게 흡수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경쟁에서 밀려 고리대금업 같은 제한된 역할로 내몰렸고, 채무자와 왕권은 유대인 추방을 통해 (재산 취득 등)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 영국 요크에서 발생한 유대인 학살 당시 채무 증서가 불태워진 사건은 종교적 증오와 물질적 이해관계가 융합된 대표적 사례다.

근대 자본주의는 오래된 법적 차별을 해체하고 동화와 시민권의 길을 열었으나(마르크스의 1843년 논설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를 보라),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경제 위기는 새로운 정치적 반유대주의를 낳았다. 따라서 중세의 종교적 적대와 19세기의 인종차별주의, 20세기 나치의 절멸 정책을 하나의 연속된 증오로 묶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차이를 규명하는 일은 (박해의 심각성을 희석하는 것이 아니라) 박해가 어떤 조건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었는지 이해하기 위한 전제다. 62

17. 맺음말

성서는 팔레스타인 땅의 토지 등기부가 아니다. 성서는 역사적 기억과 전설, 민담과 왕실 홍보, 예언자의 항의와 고대 시가를 풍부하게 엮어낸 문헌이다. 여러 공동체가 거듭 편집하고 해석하며 정신적 닻으로 삼은 경전이기도 하다. 성서를 팔레스타인 땅의 소유권 증서로 읽으면, 팔레스타인인의 현실을 말소할 뿐 아니라 성서 자체의 다양성과 윤리적 긴장도 훼손한다. 63

시온주의의 고대사 서사를 비판하는 일은 유대인의 역사적 연결성과 종교적 기억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대사를 단 하나의 땅, 국가, 민족이라는 단선적 도식에서 해방하는 일이다. 그 역사 속에는 다양한 고향과 언어, 여러 갈래의 유대교, 갈등과 동화, 박해와 번영,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협력이 공존한다. ‘진짜 민족’ 신화가 아니라 역사 본연의 복잡성을 되찾는 것이 진정한 대안이다. 64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대 민족은 2000년 동안 고향을 잃은 채 동일한 모습으로 존속했다’는 시온주의의 주장은 이중으로 틀렸다. 유대인 공동체는 전혀 단일하지 않았으며 고향도 하나가 아니었다. 바빌로니아, 알렉산드리아, 로마, 갈릴래아의 유대인들과 아랍어를 쓰는 이라크 및 모로코의 유대인, 이디시어를 쓰는 폴란드 유대인은 서로 다른 사회에서 각기 다른 사회관계(특히 계급관계)를 맺고 살았다. 그들을 연결하는 종교와 기억이 존재했으나, 그것이 하나의 근대 국민국가 탄생을 예비하지는 않았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과 맺어 온 종교적·역사적 관계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관계가 배타적 주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땅은 팔레스타인 농민과 도시 주민,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사마리아인과 여러 제국의 주민에게도 수백, 수천 년 동안 고향이었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타자의 권리를 무효화할 수 있다는 발상은 역사가 아닌 식민주의에서 비롯한다. 65

따라서 고대사를 해방하는 일은 현재 정치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유대인의 안전을 팔레스타인인 추방 및 제국주의와 결부시키는 시온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야 양측이 공유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과거의 공존이 자동으로 되돌아오지는 않지만, 적대가 영원한 것도 아니다. 역사 속 여러 ‘꺼지지 않은 희망의 불씨’는 새로운 정치적 관계가 가능했고, 앞으로도 가능함을 보여 준다.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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